이빨요정 대리인
믿으면 있는 거고 안 믿으면 없는 존재
며칠전 초등학교 5학년인 첫째가 등교 준비를 하다 욕실에서 외쳤다.
"엄마, 나 흔들리던 그 이 빠졌어!"
맨 처음 첫 유치가 심하게 흔들렸을 때만 치과에 가서 이를 뺐다. 그 이후론 집에서 내가 살살 달래다가 손으로 톡 빼고, 학교 급식 먹다가 자연스럽게 툭 빠지기도 했다. 이번엔 아침에 양치질하다가 칫솔에 밀려 쓱 빠졌다. 아이는 무용담까지 늘어놓을 정도는 아니었는지, 굉장히 쿨하게 입 안을 몇 번 헹구고는 빠진 송곳니를 들고 욕실을 나왔다.
"엄마, 오늘 밤에 베개 밑에 넣어놓고 잘 거야! 이빨요정이 가져가게~"
'이빨'은 동물한테나 쓰는 거라고, '이'를 낮잡아 부르는 말이라고 몇 번 말해준 것도 같은데, 그렇다고 '이 요정'은 무척 낯설다. 이미 여러 동화책이나 설화에서 전해 내려오고 있으니 문학적 표현으로서 허용한다 치고 넘어가는데, 아이가 이빨요정이라고 말할 때마다 나는 무시무시하게 생긴 도깨비 이빨 요정이 연상된다.
모른 척 아이가 말하는 '이빨'을 자연스럽게 '이가 빠질 때가 돼서 빠졌네~'하면서 '이'의 표현을 써 보지만, 차마 '이 요정' 혹은 '치아 요정'이라고 하기엔 부자연스럽다. 그래, 그냥 '이빨 요정'은 예부터 내려오는 대명사다.
등교를 하면서 아이는 우리 집에 오는 이빨요정은 이를 가져가면서 과자를 놓고 가는데, 어느 나라의 이빨요정은 동전을 갖다 둔다고 하였다. 그 동전은 어디서 났을까?라는 질문으로 한참 또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가, 이빨을 가져가서 어디에다 쓸까?라는 질문에 이빨 성을 만든다, 이빨 요정 나라에선 이빨이 돈으로 거래된다, 이빨을 녹여서 보석을 만든다 등등 한참을 수다 떨었다.
학교를 다녀와 아이는 아침에 빠진 이의 행방을 찾았다.
'엄마, 밤에 잘 때 이빨요정한테 줘야 하는데 어디다 넣지?"
한두 번 해본 것도 아니면서 괜히 묻는다.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작은 지퍼백을 건네주었다. 아이는 지퍼백에 빠진 이를 넣더니 그걸 또 주방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그러고선 밤이 되고 잠자리에 들 때가 되어서는 굳이 내게 한마디를 더 한다.
'엄마, 오늘 밤에 베개 밑에 넣고 자면 이빨요정이 가져가고 선물을 주겠지?"
아, 너 정말... 몇 살이니?
우리 집 두 아이는 산타의 존재를 아직도 믿고 있다. 사실 학교를 들어가니 친구들의 제보에 의해 정말 이 세상에 존재하냐며, 그것이 엄마냐며 진실을 말해달라고 하던 때가 있었다. 위기의 상황에서 나는 고심 끝에 한 마디를 던졌고, 그 명언을 이때까지 써먹고 있다.
'믿으면 있는 거고, 안 믿으면 없는 거야.'
네가 믿으면 진짜로 존재하거나 혹은 존재하지 않더라도 그 믿음을 응원해 주는 누군가의 도움이 있을 수 있다고. 네가 믿고 싶으면 믿으면 되고, 안 믿고 싶으면 안 믿으면 되는 거라고.
초등학교 5학년, 3학년인 두 딸아이는 아직까지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산타 할아버지께 편지를 쓰고, 수고하신다고 쿠키와 우유를 준비해 나를 시험에 들게 한다.
어쨌든 초3인 둘째 아이에게는 미안하게도 이빨 요정에 대한 진실을 너무 일찍 말해주었다. 두 달 전쯤인가 이가 빠져서 베개 밑에 넣어 놓고 잤는데, 그다음 날 이빨 요정이 이를 가져가지 않았다. 넣어놨다는 것을 내게 얘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건 마치 크리스마스에 산타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혼자만 카드에 적어 보여주지 않고서는, 원하는 선물이 올 거라고 기대하는 아이의 엄청난 시험문제와도 같다.
아이에게 이빨 요정이 바빴나 보다 라며 다시 그날 밤 베개 밑에 넣고 자라고 얘기했다. 그런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내가 나의 역할을 깜빡했다. 다음 날 아침 아이는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이빨요정이 안 왔다며,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아이가 귀여웠다. 동시에 나의 죄책감이 치솟아 아이를 안으면서 이실직고를 해 버렸다.
'사실은 엄마가 이빨요정이야. 엄마가 깜빡했어. 미안해'
하면서 미리 사 두었던 과자 한 통을 주었다. 아이 몰래 베개에서 이를 꺼내고 대신 넣어 놨어야 했던 그 과자를 눈앞에서 내민 것이다. 너무나도 섣부른 행동이었다.
그 이후 둘째는 언니의 동심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언니, 이빨요정이 누군지 알아?
바로 엄마야!
엄마가 그랬어. 엄마가 이빨요정이라고!
엄마가 우리 잘 때 이빨 가져가고 과자 넣어놓은 거야!"
첫째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진짜냐고 물었다.
나는 동요하지 않고 아주 우아하게 말했다.
"믿으면 있는 거고, 안 믿으면 없는 거야."
이미 둘째는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게 되었지만, 둘째의 제보에도 불구하고 첫째는 믿고 싶었나 보다. 혹은 과자를 선물 받는 경험을 원했나 보다. 이번에 빠진 이도 이빨요정에게 줄 거라면서 굳이 내게 와서 몇 번이나 얘기하고, 베개에 넣었다.
그런데, 또 내가 나의 역할을 깜빡했다. 부지런하지 못해 이제 그 역할도 못 해 먹겠다. 아이는 이빨요정이 안 가져갔다며 12살답지 않은 순수한 얼굴에 울먹임을 한 스푼 곁들인 표정으로 내게 왔다. 나는 믿는다고 다 이루어지는 건 아니라는 인생의 진리를 가르쳐야 할 때인가 싶어, 아침부터 망상에 빠졌다 나왔다. 둘째는 보란 듯이 시선은 나에게 던지고 말은 언니에게 던졌다.
"거봐, 내가 이빨요정 없다고 했잖아. 엄마가 또 깜빡했나 봐!"
나는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책상에 가서 무언가를 끄적였다. 그리고 첫째에게 조심스럽게 건넸다.
"편의점 이용권 3,000원 -이빨요정 대리인-"
포스트잇 한 장에 급하게 마스킹테이프를 붙이고 볼펜으로 써서 급조한 쿠폰이다. 이빨 요정이 안 왔으니 대리인으로서 준다고 했다. 첫째의 표정은 해석할 수 없이 오묘했다. 하지만 싫어하진 않았다.
아직도 아이들은 빠질 이가 남아있다. 이제 앞으로 이가 빠졌을 때 이빨요정에게 줄 것인지 나에게 줄 것인지를 관찰하는 과제가 남았다. 믿고 싶은 동심이 있는지, 혹은 엄마와 이빨요정 놀이하는 것이 재미있는지, 어쨌든 아이들이 믿고 싶다면 믿을 수 있도록 도와주자는 것이 내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