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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인 Dec 08. 2024

2. 내향인의 마드리드 적응기

'조금' 달라질 결심

오늘은 괜히 스타벅스가 아닌 다른 카페에 가봤다. 유럽의 많은 카페들이 그러하듯, 마드리드도 진득하니 앉아서 작업할 만한 곳이 많지 않다. 그래서 글 쓰는 일요일엔 자연스레 스타벅스로 향하게 되는데, 오는 길에 신문 읽는 분들이 많은 브런치 카페를 발견했다. 여기라면 나도 섞일 수 있겠다.


섞이는 건 두 번째 문제고, 직원은 불친절했고 비엔나커피는 맛이 없었다. 스페인이 커피 강국이 아니라는 건 이제 몇 번의 실패 경험을 통해 알게 됐지만, 무뚝뚝을 넘어 눈 맞춤 없이 삿대질로 의사소통을 한다든가, 음료나 음식을 테이블 위에 탁 소리 나게 놓는다든가 하는 태도는 참기 어렵다. 안 그런 곳이 훨씬 많지만, 오늘은 뽑기 운이 별로였다.


결국은 또 그 스타벅스, 오늘은 트리를 마주 보는 구석 자리에 앉았다. 한 판을 다 진열해 놓은 당근케이크가 맛있어 보여 한 조각 주문했다. 이곳의 스타벅스는 아직 현금을 받는다. 아무래도 갈색 단발머리 직원이 날 알아보는 것 같다. 쭉 스페인어로 주문을 받다가 저번부턴 살짝 미소를 띤 채 영어로 인사를 건넨다. 나 이제 스페인어 공부할 건데...! 주문도 스페인어로 할 거니까 기다려요...


여러모로 별로였던 카페
구관이 명관이다.



[회사는 아직까지 이상무]

회사 다닌 지 딱 2주 됐다. 첫 주는 당연히 이런저런 온보딩 세션으로 정신없었고, 이번주도 실무에 본격적으로 투입되진 않았다. 그래도 혼자만의 낯가림은 좀 괜찮아졌다. 출퇴근길이 완전히 눈에 익었고, 첫날엔 읽기도 어렵던 팀원들의 이름을 외웠고, 칸틴의 커피머신과 정수기 사용도 척척이다. 출근하면 과일 바구니에서 바나나나 귤을 고르고, 텀블러에 디카페인 아메리카노를 내린다. 차가운 음료를 마시는 사람이 없어 냉동실의 얼음칸은 나만 쓰는 것 같다. 언젠가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멋짐을 전파하리.


아침상 차리는 재미가 쏠쏠하다!


수요일은 외근했다. 호주에서 곧 론칭할 이벤트가 마드리드에서 이미 진행 중이라 체험해 볼 겸 팀원들과 방문했다. 팀워크가 필요한 게임을 연달아하는 형태라 꽤나 즐거웠다. 방탈출과 비슷한데 머리보다 몸을 쓰는 게임들이었다. 플레이를 잘하는 것보단 공간의 구성이나 마케팅 포인트를 찾아내는 게 중요했지만, 당장의 내 프로젝트는 아니니 그냥 놀러 온 사람처럼 열심히 했다. 소비자 관점에서 생각하는, 뭐 그런 거지.


금요일은 쉬는 날이었다. 스페인에서 12월 6일은 제헌절(Día de la Constitución)이라 공휴일인데, 8일까지 쭉 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아쉽게도 올해는 8일이 일요일이네. 아무튼, 스페인에서 직장인으로서 처음 맞는 빨간 날은 참 반가웠다. 입사하고 얼마나 됐다고...!



[내향인의 타지생활이란]

서울에선 알아주는 집순이였지만, 방 한 칸 세 들어 사는 외노자가 되니 자꾸만 외출하고 싶어 진다. 방이 싫은 건 아닌데 좋은 건 더욱 아니다. 이곳을 임시 거처로 생각하고 집을 찾아보고 있긴 한데, 이것만큼 고단한 일이 없다. 월세 150만원 밑으론 멀쩡한 원룸 구하기도 어려울뿐더러, 그마저도 집주인과 연락이 닿으려면 한세월이다. 동료들에게 물어보니 현지인들도 집 구하는 건 똑같이 힘들다고. 연락을 몇십 개 돌려야 한두 개 답장 올 정도라니, 이러다 지금 지내는 방에서 일 년 채우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금요일 아침에도 눈뜨자마자 부동산 어플을 텅 빈 눈으로 뒤지다 그냥 단념했다. 소중한 빨간 날을 이렇게 흘려보낼 수 없다. 재빠르게 씻고 아침 7시에 여는 추로스 집에 갔다. 스페인 사람들은 추로스를 해장 음식으로 자주 먹는다는데, 그래서인지 일반 카페보다 추로스 집이 더 일찍 연다. 아침이든 저녁이든 항상 북적거리는 곳이라 궁금했는데, 공휴일이라 그런지 손님은 나 포함 세 명뿐이었다.


'Chocolatería 1902 Churrería'라는 곳인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 120년 넘게 추로스와 초콜릿을 팔았다. 가느다랗고 길쭉한 추로스를 걸쭉한 초콜릿에 찍어 야금야금 먹었다. 추로스는 갓 튀겨서 카삭카삭하고 따끈했고, 초콜릿은 달지만 찍어먹기에 좋은 농도였다. 유명세 때문인지 가격은 다른 로컬 추로스 집보다 비싼 것 같은데, 안 먹어봤으면 계속 궁금했을 거다.



옆자리의 손님이 내 테이블을 톡톡 치더니 손짓으로 휴대폰 충전기가 있냐고 물었다. 얼굴을 보니 화장이 잔뜩 번져 있고 커피잔을 드는 손짓이 어딘가 둔했다. 추로스 집에 해장하러 온다는 게 진짜였나 보네.


하나 남은 추로스를 먹을까 말까 고민하며 머릿속으로 하루의 계획을 세웠다. 그랑비아(Gran Vía) 거리에 있는 커다란 서점에 가서 영어책을 파는지 보고, 11월에 읽은 소설 두 권에 대한 리뷰를 써야지. 저녁엔 카사 데 캄포(Casa de Campo) 호숫가를 달려야지. 일단은 8km, 컨디션 좋으면 10km.


생각이 신나게 뻗어나가다가 급하게 브레이크가 걸렸다. 잠깐, 장소만 바뀐 거지 이거 서울에서의 내 일상과 똑같잖아? 서점, 도서관, 카페를 탐방하다 저녁엔 노원에서 석계까지 중랑천을 내달리는 하루. 비행기 타고 15시간을 날아왔는데 이렇게까지 비슷한 루틴을 찾아가고 있다니!



[이대로도 괜찮을까?]

내가 무얼 좋아하고, 무얼 싫어하는지 안다는 건 나를 잘 안다는 거다. 30대가 되며 나는 그걸 꽤 잘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할 때도 스트레스를 잘 안 받고, 놀 때도 무리하지 않고 내가 편한 선에서 컨디션을 조절하는 편이다. 이렇게는 몇십 년도 편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잔잔한 일상이 계속되니 청개구리처럼 여기에 돌을 던지고 싶어졌다. 크게 성취한 것도,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정도로 행복하다 느낀 적도 없는데 이렇게 쭉 살아도 되는 걸까. 성공이나 행복은 허상이며, 지극히도 주관적인 개념이라는 말, 많이도 읽고 들었다. 그런데 주관적이라도 그에 대한 갈증을 느낀다면 제대로 좇기라도 해 보는 게 낫지 않을까.


작년 말부터 올해 여름까지, 잊을만하면 이런 생각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던 것 같다. 의지만으로는 당장의 삶을 바꿀 수 없으니 아예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됐다. 그런데 막상 새로운 곳에 오니 어떻게든 익숙한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게 흥미롭고 웃기다.


이걸 의식하게 된 건 해외생활을 하는 다른 친구들 덕분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때부터 오랫동안 친하게 지낸 나 포함 여섯의 무리가 있다. 그중 넷이 해외에 있다. 유럽에 두 명, 미국에 두 명. 공교롭게도 넷 중에 나만 (MBTI 기준으로) 내향형이다. 그래서인지 친구 셋의 해외생활은 나와 달리 꽤나 다이내믹하다.


독일로 간 친구는 매주 새로운 테마의 소모임에 참가하며 현지인들을 많이 사귀었다. 독일에 사는 지인과 지인의 지인까지 소개받으며 인적 네트워크를 넓혀가고 있다. 미국으로 간 둘은 대학원에 다니며 자연스레 친구들이 생겼다. 숱한 파티들에도 즐겁게 어울릴 수 있는 사교적인 친구들이다. '파티'라는 단어만 들어도 뒷목이 뻣뻣해지는 나에겐 참 신기하고 멋져 보인다.



[조금씩 다르게 살아볼 용기]

나는 지금의 삶의 리듬도 좋다. 다른 사람에겐 지루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떠 있기 위해 물아래서는 끊임없이 발짓하는 백조처럼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아왔다. 그런데 나는 아직 젊고, 모르는 게 많다. 혼자서 삶의 균형을 유지하는 법은 얼추 알겠는데, 사람들과 섞였을 땐 어떤 모습으로 삶을 확장하게 될지 모르겠다. 예전엔 그냥 모르는 상태였다면, 지금은 궁금해졌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닌 사회적인 동물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새로운 사람을 만나 친구가 된다는 게 배로 어려워질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관계에서 얻는 에너지는 나 혼자 낼 수 있는 것과 다르다. 그걸 알면서도 지금까지는 나의 생활반경을 굳이 넓히려고 하지 않았다.


12월이니 한 해를 정리하고 서서히 새해 다짐을 계획할 때다. 리스트 1번으로는 '노력해서 새로운 사람과 접촉하고, 대화하고, 관계 맺기'를 쓸 거다. 사실은 커리어 개발보다도 이게 내가 마드리드에 온 가장 큰 이유일지도 모른다.


친구들처럼은 못 하겠지만 나답게 반 발짝씩 내디뎌보려 한다. 연습은 시작했다. 같은 하숙집에 사는 동생 한 명과는 통성명하고 스페인어 교재도 물려(?) 받았다. 눈짓으로만 알은체하던 경비 아저씨에게 스페인어로 인사를 건넸다. 가끔은 회사 사람들에게 먼저 어제 뭐 했냐고 물어본다. 사실 별 거 아닌데, 사회 초년생으로 돌아간 것처럼 뭐 하나 할 때마다 용기가 필요하다.


원래 변화는 처음이 어렵다. 마음의 문을 열어놓고 자꾸 나를 밖으로 떠밀어야지. 내년 여름 즈음엔 내 세계가 얼마나 커져 있을지 궁금하다. 노력했는데도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지. 나는 그런 사람인 거고, 그 나름의 즐거움도 좋아하니까.


어쨌든 금요일엔 10km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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