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밑에 닭강정집이 하나 생겼다. 원체 닭강정을 좋아하는 지라 닭강정 가게가 생긴다는 소식을 듣고는 엄마에게 자랑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고대하던 개업날이 오고 드디어 닭강정 맛을 보게 되자 크게 실망하게 되었다. 긴 기다림이 민망해질 정도였다. 닭강정이란 바삭하게 튀겨냈지만 양념에 절어 적당히 눅진해진 튀김옷이 생명인데, 이건 튀긴 게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축축해서 젓가락을 갖다대면 힘없이 벗겨졌다. 게다가 양념은 점도가 지나쳐 골고루 묻지 않고 여기저기 끈적하게 뭉쳐 있었다. 고명으로 올려준 해바라기씨는 비린맛만 더했다. 두어 개 먹고는 젓가락을 놓아버린 친구와 함께 이 닭강정이 얼마나 맛 없는지를 논하면서, 웃기게도 나는 맛없는 닭강정을 열심히 먹었다. 그리고는 결국 2인분을 혼자 다 먹어내고 말았다. 더욱 황당한 것은 이후로도 집 가는 길이면 그 가게를 들를지 종종 고민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욕해놓고 말이다.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고기를 좋아하는 친구의 손에 끌려 간 스테이크집에서였다. 나는 평소 고기를 썩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멀리서 온 친구가 가고싶다 하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성의 없는 가니쉬나 부족한 풍미 같은 건 뒤로하고서라도, 육질이 생각보다 질겨 씹는 내내 아랫턱이 뻐근해져 왔다. 고작 이걸 먹기 위해 피로한 저작활동을 계속해야 하는가하는 생각이 들어 결국 고기의 절반을 친구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친구는 그래도 먹을만은 한데 그렇게 별로냐며 내 것까지 깨끗하게 먹었다. 물론 못 먹을 맛은 절대 아니었다. 다만 내가 참지 못한 것은 그것의 맛없음라기보다는 그것이 스테이크였다는 사실 그 자체였으리라. 또한 내가 매일 저녁 닭강정집 앞에서 서성이는 것도 그 집 닭강정의 맛이 좋아서가 아니라 단지 그것이 닭강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 전 새로운 친구와 만나기 시작했다. 누구나 그렇듯 그는 내 상상과 다른 사람이다. 내가 혼자 그려놓은 완벽한 모습과 정반대의 면모를 자꾸만 보여준다. 하지만 내 예상이 빗나갈 때의 당황이 불쾌하지 않다. 오히려 즐겁다. 생각건대 이유는 딱 하나, 내게 있어 그가 반전을 용서해주고 싶은 사람이라는 것 뿐이다. 그래서 몇몇을 되돌아보자면 내가 누군가를 이해하지 못한 것은 역시 그들이 유난히 이상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들을 이해할 의지가 없었기(정확히는 이해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나의 넓은 포용력에 흐뭇해할 일은 아니다. 내가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닭강정과 이 친구뿐이니까. 그저 닭강정이 얼마나 훌륭한 음식인지, 이 친구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에 감사할 일이다.
다시 한번 닭강정과 그에게 감사하면서. 언젠가 그의 자는 모습마저 미워보이고 우리가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는 날이 오게 되더라도 그 이유가 나의 옹졸함 때문만은 아니기를. 나는 또 그 친구의 관대함에 기대어 너무 맛 없는 닭강정을 권하거나 너무 못난 모습을 보이지 않기를 마음에 새겨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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