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들어준다는 건 듣는 게 아니라, 이해하는 일이다
들어준다는 건 듣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일이다.
필자도 정신과 상담을 받았던 적이 있다. 단순히 마음이 힘들어서라기보다는, 한편으로는 오래된 호기심 때문이었다. 의사들은 사람의 마음을 어떤 방식으로 들어줄까? 그들이 쓰는 언어, 그들의 태도, 그들의 호흡이 궁금했다.
진료실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끔 짧게 되물었다. “그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왜 그렇게 생각하셨나요?” 그 말들에는 꾸밈도, 위로나 조언도 없었다. 그저 내가 꺼낸 감정을 나보다 더 천천히 살펴보는 듯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대화가 이어질수록 마음이 풀렸다. 처음엔 머뭇거리며 시작했던 이야기들이 점점 속도를 얻었고, 나도 모르게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털어놓게 되었다. 그 순간, 마음이 환기되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막혀 있던 창문이 살짝 열리듯이.
그때 들었던 말 중 하나가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다.
이겨내야죠.
그 말은 단호했지만 이상하게 따뜻했다. 당시 나는 성격에 맞지 않는 일을 하며 스트레스를 견디고 있었다. 그만두자니 불안했고, 계속하자니 힘들었다. 그 상황에서 의사는 나를 위로하지 않았다. 대신 내 이야기를 충분히 들은 뒤, 짧게 말했다.
그 말이 진료실을 나서는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단순한 조언이 아니라, 내 안의 어딘가를 일깨우는 말이었다. 나는 그날 이후로 생각했다. 스트레스를 피하기 위해 도망치는 건 극복이 아니라고. 결국 현실을 살아내야 한다면, 언젠가는 마주 보고 버텨야 한다고.
그때부터 나의 태도가 조금씩 달라졌다. 힘든 일이 닥칠 때마다 “이겨내야지”라고 스스로 중얼거렸다. 이상하게도 그 말 한마디가 나를 버티게 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누군가가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스스로를 이겨낼 힘을 되찾는다는 걸. 듣는다는 행위가 단순히 귀로 하는 일이 아니라, 마음의 근육을 단련시키는 과정이라는 걸.
‘우울해서 빵 샀어’라고 말했을 때, 대부분은 ‘왜 우울해?’라고 묻는다. 이 질문은 맞는 말처럼 들리지만, 어쩌면 그 순간엔 가장 필요 없는 말일지도 모른다. 질문이 상대의 상처를 다시 들추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만약 ‘무슨 빵을 샀어?’라고 물었다면 이야기는 전혀 다르게 흐른다. ‘단팥빵 샀어’라는 답이 돌아오면, ‘너 그 빵 좋아하잖아. 먹고 나니까 기분 좀 나아졌어?’라고 되물을 수 있다. 이 대화는 단순하지만, 그 안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전자는 ‘우울한 이유’에 집중하지만, 후자는 ‘현재의 상태’에 집중한다. 전자는 원인을 묻지만, 후자는 존재를 본다. 그리고 후자의 질문은 상대가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 주는 방식이다.
공감이란 상대의 감정을 흉내 내는 게 아니라, 상대의 현실을 인정해 주는 일이다. MBTI가 T든 F든, 그런 구분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내 앞의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이 이야기를 꺼냈는지를 이해하려는 태도다. 그래서 때로는 말없이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위로가 된다. 듣는다는 것은 그 사람을 존재하게 만드는 일이다.
이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시가 있다. 바로 개그맨 장동민과 유재석의 일화다.
무명시절, 아무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느낀 장동민은 어느 날 갑자기 유재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뵙고 싶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그러자 유재석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그래, 나도 네 이야기가 듣고 싶다.”
그렇게 두 사람은 만났다. 장동민은 자신이 겪은 좌절과 불안을 쏟아냈고, 유재석은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들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장동민의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대화가 끝난 뒤 장동민은 신기하게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고 했다. 유재석은 그를 택시에 태워 보내며 현금을 쥐여줬다. “택시비 하고 남은 건 어머니 용돈 드려.”
그 짧은 장면 속에는 수많은 감정이 담겨 있다. 유재석은 조언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는 공감과 이해가 스며 있었다. 그는 장동민의 상황을 말없이 ‘이해’했고, 말보다 깊은 위로를 건넸다. ‘어머니 용돈’이라는 말에는 자신이 겪어온 무명시절의 기억, 그리고 가족에 대한 마음이 함께 담겨 있었을 것이다.
유재석은 말로 위로하지 않았다. 대신 듣는 사람의 품이 되어주었다. 그 침묵이 장동민을 살렸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잘 들어준다는 것은 단순한 배려가 아니라, 이해와 공감의 총합이라는 사실을.
결국, 잘 들어준다는 건 상대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듣는다는 건 귀의 일이지만, 들어준다는 건 마음의 일이다.
그리고 그 마음의 일은, 때로는 말보다 훨씬 큰 힘을 가진다. 듣는다는 것은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는 일이고, 그 순간 우리는 서로의 세계를 잠시나마 공유하게 된다. 그것이 진짜 위로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