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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리는 강선생 May 07. 2024

누구나 살고 싶은 곳이 있다!

추상적인 공간과 의미 있는 장소에 대한 이야기

도시는 하나의 장소이며 의미의 중심입니다. <공간과 장소, 이푸 투안>

여러분 혹시 공간과 장소의 차이점에 대해서 아시나요? 두 단어는 일상생활 속에서 비슷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어떠한 곳'을 의미하는 이 두 단어는 그러나 매우 다른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선 공간(Space)은 구체적인 숫자나 문자로 위치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국가의 수도를 경도와 위도로 표시하거나, 건물의 위치를 도로명 주소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공간은 누구나에게나 객관적이고 그래서 실체가 없이 추상적입니다. 반면 장소(place)는 주관적인 개인의 경험으로 기억되는 곳입니다. 똑같은 장소여도 그 장소를 받아들이는 감정은 각자의 추억에 따라 다릅니다. 예를 들어 정동진이라는 장소는 누군가에게는 사랑하는 연인과의 추억으로 기억될 수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쓰디쓴 이별의 기억일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설렘으로 다른 누군가에게는 이별로 기억될 수 있는 정동진


그런 의미에서 장소는 공간에 비해 개인의 주관적 감정이 드러납니다. 누구나 좋아하고 살고 싶은 곳이 있다는 의미가 되겠죠. 인문 지리학자 이 투안은 그의 책 '공간과 장소'에서 장소애(topophilia)를 언급하였습니다. 장소애는 특정한 장소에 대한 애착감을 의미합니다. 그는 '공간에 우리의 경험과 삶, 애착이 녹아들 때 장소가 된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는 공간이라는 추상적인 실체에 개인의 추억이 스며들면 비로소 의미 있는 장소가 된다는 말입니다. 결국 여기서 어딘가에 살고 싶다는 감정은 주관적이기 때문에 공간보다는 장소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장소로 대표적인 곳이 바로 고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향을 정의 내리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태어난 곳일 수도 있고, 인생 중 가장 오래 살았던 곳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인생의 중요한 시기를 보낸 곳일 수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곳을 들 수 있겠네요. 어찌 되었든 고향에는 어릴 적 함께 놀던 친구들과의 추억이 있고, 익숙한 동네 거리의 풍경이 살아 숨 쉽니다.

공간에 의미를 부여하면 그곳은 장소가 된다. - 이푸 투안


하지만 누군가는 여기에 반론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어딘가에 살고 싶은 이유가 단순히 그곳에 주관적인 감정이나 추억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곳에 살만한 구체적인 장점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죠. 예를 들어 교통이 편리하고, 일자리가 풍부하며, 다양한 문화 시설을 즐길 수 있는 대도시를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살고 싶은 곳은 주관적인 장소라기보다는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공간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도시에도 개인의 추억이 담장소성이 존재합니다. 누군가는 도시가 고향일 수도 있고, 다르 누군가는 이 도시에서 다양한 추억들을 쌓았을 수도 있으니까요. 여기서 말하는 도시는 의미 부여된 장소로서의 도시가 아니라 역세권, 지가, GDP와 같이 객관적 지표를 지니고 있는 공간으로서의 도시를 말합니다.

공간의 사전적 의미


이렇게 공간과 장소의 개념에 대해 자세히 언급한 이유는 ‘어디에 살고 싶다’라는 감정은 상황에 따라 주관적일 수도 있고 객관적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선호하는 여행지 역시 본질적으로 주관적이기 때문에 이를 객관적인 순위로 측정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여행지가 갖는 특징은 저마다 다르고 그것을 장점으로 받아들일지 단점으로 생각할지는 개인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또한 사람들은 여행을 반드시 추억을 곱씹거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만 떠나지는 않습니다. 누군가는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보기 위한 여행을 떠나고 다른 누군가는 혁신적인 경제 시스템을 경험하기 위해서 여행을 떠납니다. 또 다른 누군가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쉼을 목적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좋아하는 나라나 도시가 있습니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이유를 단 한 가지로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그 이유가 무엇인지 하나하나 생각해 보는 것도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각자 다른 이유로 여행을 떠납니다


도시를 걷는 시간 3부 '이곳에 살고 싶다'에서는 저마다 다른 이유로 살기 좋은 네 도시로 떠나봤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은 유럽과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이어주는 작지만 강한 도시입니다. 덴마크는 기본적으로는 사회복지제도가 잘 갖추고 있는 북유럽의 시스템을 공유하면서도 디자인과 낙농업에 특화된 산업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코펜하겐은 운하가 잘 발달되어 있고 대부분이 평지라서 자전거를 타기 매우 적합한 도시입니다. 그래서 자전거 운전자를 위한 교통 시스템이 매우 잘 갖춰져 있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코펜하겐에 살고 있는 현지인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곳은 물가가 높은 대신에 소득 또한 높고 실업급여, 교육 복지 등 사회보장제도가 촘촘하게 잘 갖추고 있어서 사회 안정망이 매우 잘 갖춰져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코펜하겐의 랜드마크 뉘하운


독일 남부 바이에른주의 중심도시 뮌헨은 세계적인 맥주 축제인 옥토버 페스트가 열리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수많은 양조장에서 자체 제조하는 특색 있는 풍미의 맥주와 그에 어울리는 다양한 음식들, 그리고 수천 명이 축제를 즐길 수 있는 비어 가르텐은 맥주의 도시 뮌헨을 상징하는 요소입니다. 뮌헨은 오랜 기간 바이에른 지역의 중심 도시로 성장했기 때문에 시청이 위치한 마리엔 프라츠 주변에는 아름다운 유럽풍 건물도 가득합니다. 도시 한가운데에는 영국의 영향을 받은 아름다운 공원이 시민들에게 휴식을 선물해 줍니다. 또한 뮌헨은 세계적인 명차로 손꼽히는 BMW의 본사와 공장이 위치하고 있는 독일 경제의 중심지이면서, 교통의 중심지로서 독일 남부 주요 도시들과 체코 프라하,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와 같은 주변국가의 주요 도시와의 접근성이 매우 뛰어나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맥주의 도시 뮌헨의 비어 가르텐


남부 프랑스 니스는 파아란 지중해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휴양 도시입니다. 니스 주변에는 매력적인 도시들이 다채롭게 모여있습니다.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에서 가장 큰 도시 마르세유와 국제 영화제로 유명한 칸이 기차로 30분 이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또한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작은 도시국가 모나코와 향수로 유명한 그라스도 근처에 위치하고 있어서 니스에 숙소를 잡으면 이 모든 도시를 효율적으로 여행할 수 있습니다. 휴양 도시의 매력은 누가 뭐라 해도 해변이죠. 니스 해변과 수평으로 마주하고 하고 있는 프롬나드 데 장글레를 걸으면서 지중해의 상쾌한 공기를 마실 수도 있고, 동글동글한 몽돌 자갈을 걸어서 파란 지중해 바다로 뛰어들 수도 있습니다. 니스는 많은 유럽인들이 바캉스를 즐기는 곳이기 때문에 해변가에는 다양한 음식점들이 즐비합니다. 이곳에서 오션뷰를 즐기면서 Nice한 여름밤의 여유를 즐길 수 있습니다.

남부 프랑스의 여유로운 휴양도시 니스


남반구의 거대한 대륙 오스트레일리아에는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손꼽히는 멜버른이 있습니다. 오랜 기간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았던 이 미지의 땅은 18세기부터 유럽의 문명과 함께 수많은 이민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초기에 정착한 유럽계 이민자들과 20세기 이후 유입된 아시아계 이민자들은 물과 기름처럼 서로 융합되지 못하며, 백호주의로 대표되는 인종차별주의를 겪었습니다. 하지만 점차 수많은 국가에서 다양한 인종의 이민자들이 정착하면서 이민 제도의 개선이 이루어졌고 현재는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다문화 국가가 되었습니다. 온화하고 쾌적한 기후 환경, 유럽을 그대로 옮긴듯한 거리, 도심과 조화를 이루는 공원과 정원 등 멜버른이 살기 좋은 외부 조건은 참 많습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멜버른이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손꼽히는 이유는 이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조화를 이루는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


저는 그동안 누군가 지금까지 여행했던 도시 중 어느 도시를 가장 좋냐고 묻는다면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런던'이라고 대답해 왔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하나같이 '런던 같은 노잼 도시를 왜 좋아하냐?' 혹은 악명 높은 영국 음식에 대해 이야기하며 저의 런던에 대한 장소애를 비판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저의 런던에 대한 사랑이 식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우선 런던은 제 첫 유럽 여행의 시작점이었습니다. 런던이라는 장소에서 여행의 설렘을 처음 느꼈고 다양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여행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템즈강, 빅벤, 타워 브리지와 같은 런던의 랜드마크들이 저에게는 전 세계 어느 랜드마크보다 사랑스럽습니다. 결과적으로 런던은 세계의 수많은 도시 중 제가 가장 많이 여행해 본 도시가 되었습니다. 많은 도시 중 가장 많이 여행해 본 도시이기도 합니다. 저에게 있어 런던은 영국의 수도, 세계 금융의 중심지와 같은 공간으로서의 런던이 아니라 노팅힐의 시끌벅적한 거리, 피카디리 서커스의 러시아워, 빨간 2층 버스와 블랙캡과 같은 주관적인 추억과 의미가 담겨있는 장소로서의 런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런던을 사랑하는 중요한 이유 빨간색 2층 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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