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터면 지리도 모르고 세계여행할 뻔했다' 북콘서트
안녕하세요. 춘천여고 지리교사 강이석입니다. 전남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는 1년 5개월 만입니다. 작년 5월 강원도 춘천에서부터 무려 왕복 12시간이나 차를 몰고 이곳 전사부고까지 온 이유는 오직 한 가지입니다. 바로 여러분들의 서태동 선생님 때문입니다. 매번 다른 곳에서도 하는 이야기지만 서태동 선생님은 지금의 제가 있게 만들어주신 정말 고마운 분이시거든요. 여러분들은 맨날 보는 분이어서 잘 못 느끼실 수도 있지만 서태동 선생님은 전국의 지리 선생님들 중 가장 유명하시면서, 가장 유능하시고, 또한 정말 열심히 하시는 지리에 진심인 분입니다. 무엇보다 학생들을 정말 진심으로 대하시는 분입니다.
서태동 선생님은 학생들 뿐만 아니라 저와 같은 지리교사에게도 마치 멘토와 같은 분이십니다. 언젠가 제가 태동쌤에게 ‘선생님은 지리교육계의 대부’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랬더니 선생님은 그건 너무 부담스럽고 지리교육계의 삼촌 정도로 하자고 하셨습니다. 삼촌이든 대부든 어쨌든 선생님은 제가 처음 책을 쓸 때 결정적인 용기를 주셨고, 처음 유튜브를 시작할 때도 많은 응원과 구독을 주셨습니다. 또한 이렇게 학교 밖에서 특강을 할 기회도 많이 제공해 주셨습니다. 그런 감사한 마음에 올해는 외부 강의를 한동안 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춘천에서 광주까지 한걸음에 오게 된 겁니다.
그런데 제가 올해 이곳 광주 전사부고에 오게 된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건 바로 작년 이곳에서의 특강이 너무 인상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작년에는 ‘음악과 함께하는 북콘서트, 여행이 부르는 노래’라는 제목의 북콘서트를 했습니다. 저의 첫 여행 에세이에 대한 내용을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풀어내는 특강이었습니다. 금요일 오후 7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100명이 넘는 학생들이 가득 채워줬고, 반응도 무척이나 뜨거웠습니다. 무려 6시간이 넘게 운전을 하고 나서 도착하자마자 하는 특강이어서 피곤과 긴장이 한꺼번에 밀려왔지만 여러분들의 뜨거운 열기 덕분에 2시간 넘는 강의를 정말 즐겁게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올해도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작년 강의 주제가 북콘서트여서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저도 그런 딱딱하고 지루해 보이는 강의 듣는 걸 싫어하거든요. 그나마 저를 유튜버로 알고 있는 학생들이 당시에는 꽤 많아서 사실상 그 유명세로 특강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구독자가 약 8만 5천 명, 작년에는 5만 명이 채 되지 않았지만, 당시에는 핫한 영상도 있었고, 그 전년도 학교에서 찍은 쇼츠 영상들 덕분에 ‘지리는 강선생’이라는 네임벨류가 있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작년부터 학교에서 유튜브 촬영을 못 하게 되었고, 새로운 영상들이 굉장히 적습니다. 그런 만큼 구독자 상승도 정체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저를 모를 학생들도 다수겠네요.
이번 특강은 유튜버 지리는 강선생이 아닌, 저자 강이석에 조금 더 무게중심을 두고 진행해 보겠습니다. 특강은 지난달에 출간한 ‘하마터면 지리도 모르고 세계여행할 뻔했다’를 출간하게 된 계기와 책의 구성, 그리고 책에 등장하는 도시들을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특강 제목으로도 나와있듯이 우리가 왜 AI 시대에도 구닥다리처럼 보이는 글쓰기를 해야 하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물론 딱딱하게 도시에 대해서 알려드리기보다는, 그건 책에 다 나와있으니까 그 도시를 여행할 때의 비하인드 스토리와 같은 썰 중심으로 평소 제가 수업하는 것처럼 진행해 볼까 합니다. 그리고 질의응답 시간에 적극적으로 질문하는 친구들에게 제 책의 사인본을 선물로 증정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2019년 말, 갑작스러운 계기로 책을 써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제가 그나마 쓸 수 있는 내용은 20대를 온전히 바친 여행기였고, 다행히 10년 가까이 수업 시간에 썰들로 풀면서 나름대로 체계화가 되었습니다. 2019년 12월부터 매일 한편씩 글을 남겼고, 2020년 초 37개의 에피소드가 완성되었습니다. 그렇게 저의 이름이 적힌 여행기를 출판해 보겠다는 목표가 생겼습니다.
그렇게 한 달 반동안 매일 글을 쓰며 책 한 권 분량의 원고가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글을 잘 쓰지도 않을 뿐 아니라 유명세도 없던 당시 저의 원고를 출판해 줄 출판사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무작정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봤지만 답장이 올리가 없었죠.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우선 브런치라고 하는 글쓰기 플랫폼에 가입하고 작가로 선정되었습니다. 그리고 겨우내 몰입해서 썼던 저의 소중한 글들을 하나씩 업로드했습니다. 그러면서 저의 초고들은 한층 더 가다듬어졌습니다.
그렇게 1년이 지났습니다. 브런치에서의 반응은 생각보다 꽤 괜찮았습니다. 특히 저의 글을 읽고 제가 쓴 문장에서 제가 의도한 느낌을 정확히 파악하고 공감하는 댓글을 볼 때, ‘아 이 맛에 작가를 하는구나!’라는 쾌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점점 데이터가 쌓이면 이제는 정말 이 글들로 책을 내봐도 되겠다는 자신감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이 글들로 책을 내봐도 좋겠다는 자신감이 들었습니다. 여기서 저에게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대형 출판사는 아니지만 저의 원고를 출판해 줄 수 있는 출판사를 찾아서 우선 이 글들을 출판하는 것, 둘째는 조금 더 유명해질 때까지 기다려서 대형 출판사에서 저의 원고를 출판하는 것.
고민 끝에 2022년 초, 저의 책을 출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비록 이름난 대형 출판사는 아니었지만 저는 원고를 보냈고 다행히 그 출판사는 저의 원고를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그렇게 저의 첫 번째 책을 출판하기로 했습니다. 6개월 넘게 1차, 2차, 3차에 걸친 교정 작업이 이어졌고, 결국 저의 첫 번째 책 '여행이 부르는 노래'는 2022년 9월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렇게 책이 출판되고 한 달 후, 제 영상 중 가장 유명한 '남고의 수학여행' 촬영 첫날, 모르는 번호로 연락이 왔습니다. 중고등학생 전문 출판사에서 저에게 1년 간 연재 요청이 들어온 것입니다. 실제로 이 잡지는 제가 중학교 때부터 오랫동안 구독했던 잡지입니다. 저의 책 '여행이 부르는 노래'를 출판사에서 봤고 그 덕분에 저에게 연락이 온 것입니다. 저는 흔쾌히 그 요청을 수락했고, 그 이후 꼬박 1년 동안 매달 원고를 집필했습니다.
의식의 흐름대로 써 내려간 '여행이 부르는 노래' 원고는 비교적 쉽고 빠르게 쓸 수 있었지만, 독서평설에서 의뢰한 '도시를 걷는 시간'은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세계 도시에 대한 역사, 문화, 경제 등의 지식을 체계적으로 담아야 했기 때문에 집필하는데 굉장히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했습니다. 더군다나 출판사에서 요구하는 정제된 문체나 학생의 시선에 맞춘 내용도 꽤 많았습니다. 그 덕분에 저는 필자 입장이 아닌 독자 입장에서 글을 쓰는 연습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달에 한 번씩 한 도시에 대해 원고를 작업해야 했기 때문에 2023년은 매 순간 그 도시에 온종일 매몰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제가 스스로 자랑스러운 점은 1년 간 한 번도 원고 마감일을 어기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연재 경험을 통해 글쓰기 능력을 단순히 당시 느낌과 추억을 되살리는 것에서 이를 바탕으로 글을 지식의 형태로 변환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12개월 간의 노력은 또 다른 출판사에서 새로운 책 출판 의뢰가 오면서 결실을 맺었습니다. 이번에는 대형 출판사였습니다. 제가 출판사에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출판사에서 저에게 책을 집필하고 싶다고 연락이 온 것이죠. 인세도 처음 계약할 때보다 거의 2배 인상되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처음 책을 쓰기로 용기를 낸 덕분에 1년간 연재도 할 수 있었고, 새로운 책을 쓸 수 있었습니다.
처음 이 책의 제목은 '도시를 걷는 시간'이었습니다. 연재했던 글의 제목이기도 했고, 이전 책 '여행이 부르는 노래'와도 어감상 맥을 같이 하는 느낌이 들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세계의 도시들의 역사, 문화, 경제 등 다양한 요소들을 직접 여행한 경험을 바탕으로 풀어내는 내용이다 보니까 이보다 더 괜찮은 제목은 없다!라고 생각했었죠. 그렇게 올해 초 출판사와 계약을 하고 본격적으로 집필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불과 출간을 한 달 남은 시점에서 출판사에게서 뜻밖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책 이름을 바꾸겠다는 내용이었어요. 저는 기존의 '도시를 걷는 시간'을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이 책의 집필을 준비하고 있던 작년 가을부터 전국 지리교육과 교수님들과 지리 선생님들에게 내년부터 새로 나올 교과서 '도시의 미래 탐구'와 저의 책 '도시를 걷는 시간'의 콜라보레이션을 적극적으로 홍보했었거든요.
출판사에서는 '하마터면 지리도 모르고 세계여행할 뻔했다'를 제안했습니다. 몇 년 전 '하마터면 열심히 살뻔했다'라는 책이 인기를 끌면서 출판 업계에서는 '하마터면' 시리즈 책의 우후죽순 등장했습니다. 아무래도 출판사는 눈에 잘 띄고 잘 팔리는 책 제목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며칠 동안 출판사 편집자에게 기존의 제목을 유지하고 싶다는 저의 강력한 의사를 전달하였지만, 끝내 제목은 지금의 제목으로 바뀌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혹시 나중에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책을 출판하고 싶은 학생들이 있을 거예요. 그럴 때 작은 작은 출판사는 작가인 여러분의 의도와 생각, 예를 들어 제목이나 표지 디자인, 색깔 등을 거의 그대로 반영해 줄 거예요. 하지만 그런 세세한 부분들을 작가인 여러분들이 직접 다 챙겨야 하는 불편함이 있죠. 하지만 대형 출판사와 계약을 하면 비록 작가의 의도는 잘 반영되지 않을 수 있지만, 그 대신 출판사의 체계적인 편집과 퀄리티 높은 디자인, 그리고 그에 따라오는 적극적인 홍보 활동이 진행됩니다. 당연히 같은 원고라면 후자의 책이 더 잘 팔릴 가능성이 높겠죠.
그렇게 '도시를 걷는 시간'은 '하마터면 지리도 모르고 세계여행할 뻔했다'로 바뀌었습니다. 어떤가요? 여러분은 둘 중에 어떤 책을 선택할 것 같나요? 책이 나오고 2주가 지나고 많은 사람들의 반응들을 보니까 역시나 출판사에서 바꾼 제목이 괜찮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물론 원래의 제목이 조금 아쉽긴 하지만, 역시 책은 잘 팔려서 많은 사람들이 읽는 것이 가장 중요하겠죠? 무언가 고민될 때는 그 분야의 전문가의 의견을 듣는 것이 결과적으로 좋을 때도 많은 것 같습니다.
'하마터면 지리도 모르고 세계여행할 뻔했다'는 총 16개의 세계 도시를 4개의 주제로 나누어 구성해 봤습니다. 주제는 주변 도시, 중심 도시, 살기 좋은 도시, 변화하는 도시입니다. 그리고 각각의 도시 마지막에는 '영화에서 바르셀로나 찾기', '로마에서 게임 찾기'와 같이 영화나 게임, 애니메이션과 같은 친숙한 주제에서 찾아볼 수 있는 도시의 이야기를 담아봤습니다. 또한 각 부가 끝나면 '여행지 곱씹기'로 4개의 도시를 관통하는 주제를 정리해 봤습니다. '장소애', '장기파동곡선'처럼 어쩌면 형이상학적이고, 조금은 어려울 수도 있지만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 본 적절한 지식과 이야기를 담았어요.
특히, 'ㅇㅇ에서 도시 찾기' 코너는 '여행지리', '세계 시민과 지리' 수업에서 학생들의 흥미를 유발하는 도구로 사용하면 좋을 것 같아요. 도시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음악이나 뉴스, 영화 등을 함께 찾고, 이를 수업에서 활용한다면 흥미로운 지리 수업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1부 같은 나라인데 달라!_편입의 역사가 빚어낸 도시'의 여행지 곱씹기는 합병 및 편입의 역사와 문화적 고유성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1부에서는 주변의 도시들에 대해 다룹니다. 1등이 아닌 2등 도시도 어쩌면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고, 고유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중심으로 풀어나갑니다. 또한 그 지역성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유럽이 아프리카에 그은 국경(전횡적 경계)에 대해서도 언급해 봤고, 중심 도시와 주변 도시의 끝없는 긴장과 전쟁, 그로 인한 갈등과 발전에 대해서 다채롭게 나누어보았습니다.
'2부 여긴 근본이지~_오랜 중심 도시가 품은 이야기'의 여행지 곱씹기는 '가운데만 중심이 아니다'를 주제로 정해봤습니다. 지리적 중심과 현상적 중심이라는 개념을 설정하고, 2부에서 소개된 도시들과 그 외에 다양한 지리적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봤습니다. 경제적 중심을 현상적 중심이라고 가정하고, 그 대표적 사례로 최고차 세계도시 뉴욕, 런던, 도쿄를 들었습니다. 또한 중심이라는 것은 시간이 지나며 변화할 수 있다는 사례를 세계 문화의 중심으로 거듭나고 있는 대한민국 서울로 들어봤습니다.
'3부 진짜 여기서 살고 싶다_살기 좋은 도시의 비밀'의 여행지 곱씹기는 추상적인 공간과 의미 있는 장소에 대한 이야기로 정해봤습니다. 여기에서는 공간과 장소, 그리고 장소애를 키워드로 잡아 봤는데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인문지리학자 이푸 투안이 공간과 장소에서 언급한 문장들을 소개하며 경험과 삶, 애착이 녹아든 공간을 장소로 언급하였습니다. 또한 제가 책에서 소개한 살기 좋은 도시들을 사례로 들와봤고, 그중 제가 가장 사랑하는 런던에 대해서도 언급했습니다.
'4부 오히려 좋을지도?_흥하고 망하는 변화하는 도시'의 여행지 곱씹기는 도시가 변화하는 여러 요인을 주제로 삼았습니다. 특히 도시를 주제로 하는 책의 마무리인 만큼 '도시란 무엇인가?'라는 추상적인 질문으로 접근해 봤습니다. 도시성, 발전 전략, 흥망성쇠를 키워드로 잡고, 도시가 변화하는 여러 요인들에 대해 소개했습니다. 도시의 탄생부터 의미와 특징에 대해 설명하고, 발전하는 도시와 쇠퇴하는 도시들을 각각 콘트라티예프 장기 파동 곡선에 적용해 봤습니다. 도시가 변화하는 다양한 요인을 집적 이익, 파급 효과 등의 개념을 활용하여 설명하였고, 도시의 미래라는 화두로 마무리했습니다. '여행지 곱씹기'는 여행지리보다 '세계시민과 지리' '도시의 미래탐구' 수업에 보다 적합할 것 같습니다.
사실 오늘 특강은 도시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주는 그런 내용은 아니에요. 그런 것은 나무위키나 챗GPT가 다 알려주니까요. 지금부터는 도시에 대한 지식보다는 제가 직접 도시를 여행하면서 느꼈던 경험, 왜 도시를 갈 수밖에 없었는지를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이야기해 볼게요. 시간 관계상 책에 소개된 16개 도시 전부를 이야기할 수는 없으니까 변화하는 도시, 주변 도시, 살기 좋은 도시, 중심 도시의 주제 당 1개의 도시를 꼽아서 이야기할게요. 자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1. 하마터면 축구 보고 500만 원도 벌 뻔했다!
: Jisung Park is my friend!
첫 번째 걸어볼 도시는 맨체스터입니다. 영국 북부 노스웨스트 지역에 위치한 맨체스터는 과거 산업 혁명 시기 면직물 생산 중심지로 발전했지만, 현재는 탈공업화로 경제적으로 낙후된 도시입니다. 인구는 약 50만 명으로 광주광역시의 1/3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이 맨체스터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엇인가요? 그렇죠! 홀란드와 데브라이너의 우주 최강 맨체스터시티, 그리고 지금은 맹구 소리를 듣지만 과거 역시 우주 최강이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떠오를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손차박 논쟁에 대해 들어보셨나요? 우리나라 축구 레전드 3인방인 손흥민, 차범근, 박지성 중 누가 더 대단한가에 대한 이야기죠. 저는 아쉽게도 차범근 선수의 활약을 실시간으로 본 세대는 아닙니다. 감독이나 해설로 기억하죠. 춘천의 자랑 손흥민 선수는 10대 때 독일에서 이제 막 활약을 시작할 때부터 봤습니다. 특히 손흥민 존에서 차는 감차, 일명 ZD가 환상적이죠. 우리나라 선수가 언제 프리미어 리그 득점왕을 하겠어죠? 하지만 저에게 있어서 최고의 선수는 해버지, 박지성 선수입니다. 제가 한참 유럽 축구에 빠져있던 20대 시절 지성이 형은 영웅이었습니다.
2006년 겨울, 막 제대를 하고 첫 유럽 여행을 준비할 때 제가 가장 먼저 구입한 것이 바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06/07 유니폼입니다. 당시 돈도 많이 없었는데 왼쪽에 프리미어리그 사자 패치와 13 J. S. Park 프린팅도 했습니다. 여행 루트도 런던에서 시작해서 유럽을 한 바퀴 돌아 다시 런던으로 돌아오는 다소 비효율적으로 세웠습니다. 그 이유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직관을 하기 위해서였죠. 당시 박지성 선수가 맨유에서 활약하던 시기였거든요. 저는 첫 유럽 여행에서 파리에서의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그곳에서 며칠 동안 맨유 경기 티켓을 구하느라 시간을 거의 다 썼거든요. 그렇게 겨우겨우 2007년 1월 13일 맨유 대 아스톤 빌라 경기 티켓을 구했습니다.
런던 유스턴 역에서 맨체스터 행 기차를 탔습니다. 기차 차창 밖 풍경은 한겨울인데도 녹색 물결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영국은 서안해양성 기후가 나타나서 겨울에도 10도 정도의 비교적 따뜻한 기온을 유지하고, 비고 적절하게 오거든요. 그래서 겨울에도 따로 관리하지 않아도 경기장에 잔디가 잘 유지되고요. '아 그래서 영국이 축구 종주국이고, 세계에서 가장 큰 축구리그가 발전했구나!'
기차는 3시간 정도 달려 맨체스터 라임 스트리트 역에 도착했습니다.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트램을 타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홈구장이 있는 트래포트로 향했습니다. 축구의 도시답게 거리에는 각종 축구 관련 물품을 파는 가게가 즐비합니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었던 곳은 축구 전문 복권 방입니다. 일종의 스포츠 토토 같은 것인데, 예를 들어 강팀과 약팀이 경기를 한다면 강팀에는 배당률이 낮고 약팀은 배당률이 높습니다. 경기의 승패뿐만 아니라 선수의 골에도 베팅할 수 있더라고요. '호날두가 첫 골을 넣는다'는 1:2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그런데 '박지성이 첫 골을 넣는다'는 무려 1:500인 거 아니겠어요? 하긴 최근 5경기에서 선발로 출장하지도 않았거든요. 저는 그저 '제발 선발로만 나와라'하고 기도했습니다.
맨유의 홈구장 올드 트래포트에 도착했습니다. 경기장 앞에는 맨유를 상징하는 버스비 경의 동상이 있고, 당시 최고 선수인 호날두와 루니의 사진이 경기장 정면에 큼지막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수많은 맨유 팬들이 빨간색 유니폼을 입고 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저도 13 J. S. Park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어? 그러고 보니 런던에서부터 나와 함께 기차를 타고 온 존도 뒤에 지성이 형 이름을 프린팅 했네요. 반가운 마음에 함께 셀피도 찍어봅니다.
드디어 올드 트래포드 경기장 안에 입성하였습니다. 꿈의 구장이라는 별명답게 그 규모와 시설이 어마어마합니다. 흥분과 설렘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파리에서 정말 어렵게 구한 경기를 관람하기 가장 좋은 좌석에 앉아서 선수 입장을 기다립니다. 장내 아나운서가 골키퍼 반데사르부터 한 명씩 선수 이름을 외칩니다. 그리고... 넘버 13 지! 성! 박!! 와 대박... 박지성 선수가 오늘 선발 출장입니다!! 이미 저는 소원을 이뤘습니다. 너무 행복합니다.
좌석이 선수들이 뛰는 경기장에서 불과 10미터도 안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선수들이 외침과 격렬한 몸싸움 소리가 다 들립니다. 경기는 숨 가쁘게 진행됩니다. 그러던 중 전반 13분, 박지성 선수가 골대 오른쪽에서 선제골을 터뜨립니다!! 골!!!!! 와 내가 직접 보러 온 경기에서 시즌 첫 선발 출장을 한 것도 모자라서, 첫 골을 넣다니!!! 저는 너무 기쁘고 흥분한 나머지 주변에서 내 유니폼의 이름을 보고 축하해 주는 주변의 맨유팬들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Jisung Park is my friend!!!"
그렇게 첫 번째 골을 넣은 박지성 선수는 두 번째 골을 어시스트했고, 세 번째 골도 스틸을 하며 직접적으로 관여했습니다. 경기 결과는 3대 1로 맨유 승! 그리고 최우수 선수 MOM에 무려 박지성이 선정되었습니다.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습니다. 경기가 끝났는데도 관중들은 경기장을 바로 퇴장하지 않고 맨유 응원가를 부릅니다. 7만 명의 관중이 함께 외치는 응원가를 들으니 전율이 느껴집니다.
경기 후 비가 쏟아졌지만 그 열기는 식지 않았습니다. 트램을 타고 다시 맨체스터 시내로 돌아오는 길, 트램 안에서도 맨유 팬들은 펄쩍펄쩍 뛰면서 '글로리 글로리 유나이티드'를 부릅니다. 덩달아 트램도 들썩거립니다. 시내에 들어오니 트래포트에서 경기를 보고 온 수만 명의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펍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발 디딜 틈도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숙소에서 맥주 한잔 하려고 마트에 들렀습니다. 계산하시는 할머니도 내 유니폼을 보고 오늘 맨유 경기 스코어를 물어봅니다. 역시 축구의 나라답습니다.
그때 저는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이 떠올랐습니다. 당시 고3이었는데,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그 짜릿함은 2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문득 이곳 맨체스터의 사람들은 매주 이런 승리의 기쁨과 축구의 열기를 느낄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들이 매우 부럽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맥주를 사서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마침 홍콩, 일본, 중국에서 축구를 보러 맨체스터까지 온 룸메이트들도 이제 막 도착했습니다. 저는 국뽕에 차올라 그들에게 우리 지성이 형의 활약을 자랑했습니다. 그들은 나의 13 J. S. Park이 프린팅 된 맨유 져지를 보고 정말 부러워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축배를 들며 웃고 떠들다가 문득 무언가 떠올랐습니다. 경기 시작 전 복권방에서 봤던 문구였습니다. '박지성이 첫 골을 넣는다, 배당률 1:500' 갑자기 후회가 밀려옵니다. 아 그냥 애국하는 마음으로 만원만 베팅해 볼걸. 그럼 500만 원인데. 거기다 복권은 세금도 없다는데...
2. 하마터면 티베트 갔다가 두 번이나 죽을 뻔했다!
: 외국인이 티베트 여행하면 사형이라고?!
제목이 좀 자극적인가요? 그런데 어그로 아니고 찐입니다. 정말 저는 티베트에 가서 두 번이나 죽을 뻔했습니다. 혹시 티베트가 어디인 줄 아시나요? 티베트는 중국 서부의 시짱 자치구의 다른 말입니다. 1970년대 동부 해안가를 개방하면서 미국에 이어 G2로 성장한 중국은 미 개척지인 서부로 눈을 돌렸습니다. 중국은 수도 베이징과 티베트의 중심도시 라싸를 연결하는 철도를 건설하였고, 이를 통해 많은 한족들이 이곳으로 이동하면서 빠르게 개발되었습니다. 과거 토번으로 불렸던 티베트는 1959년 이후 중국에 병합되었고, 이후에는 시짱 자치구로 불립니다. 그런데 갑자기 왜 티베트냐고요? 누군가 저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지가 어디냐고 물어보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저는 티베트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티베트는 외국인이 갈 수 없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지리교육과 2학년이었던 저는 논문을 쓰고 있었습니다. 주제는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과 그로 인한 라싸의 경관 변화' 이 논문을 완성시키려면 실제로 티베트 라싸를 가봐야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답사를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에 찾아봐도 티베트 자유 여행에 대한 정보는 없습니다. 티베트를 가려면 중국 정부의 허가증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 허가증을 받기 위해서는 비싼 가이드 투어비를 내고 심지어 자유로운 여행을 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시기라서 외국인 여행은 특히 강하게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외국인들이 티베트 분리 독립을 지지하는 시위를 자주 했거든요. 혹시 허가증이 티베트를 여행하다가 공안에게 걸리면 사형을 당할 수도 있다는 무서운 이야기도 떠돕니다.
원래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법! 저는 비싸고 자유가 없는 여행을 할 바에야 허가증이 없이 무작정 티베트로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그래도 혹시 추방당하거나 감옥에 갇힐 것을 대비해서 춘천 지역 마트인 벨몽드에서 컵라면과 햇반과 같은 비상식량도 잔뜩 챙겼습니다. 베이징에 도착하자마자 조선족 아저씨가 운영하는 민박집에서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이 없는) 허가증과 티베트 라싸까지 가는 칭짱철도 티켓도 구했습니다. 걱정만 하고 아무런 실행도 하지 않았더라면 이룰 수 없는 작은 성과였습니다. 짙은 안갯속처럼 불확실했던 티베트 여행이 점점 확실해져 갑니다. 그렇게 저는 베이징 서역에서 라싸행 기차에 탑승했습니다.
막상 기차에 탔지만 그래도 공안에게 내가 외국인인걸 걸리면 사형을 당할 수도 있다는 소문에 긴장됐습니다. 기차에 공안과 비슷한 복장을 입은 사람만 보면 흠칫 놀랐습니다. 당연히 한국말은 사용하지 않았고, 저는 중국말도 못 하니까 마치 홍콩 사람인 것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이키를 입고 영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저와 같은 방(쿠셋)을 사용하는 한족 친구가 말을 겁니다. "너 한국인이지?" 그 친구는 베이징에 있는 대학을 다니고 있는데 방학이라서 집으로 가는 길이라고 합니다. 그 친구도 지리 전공자입니다. 우리는 금세 친구가 됐습니다. 그리고 같은 방을 쓰는 다른 소수민족 친구들과도 친구가 되었습니다.
저는 점점 긴장이 풀어지고 이제는 공안인지 승무원인지 모를 사람과도 함께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 다음날 저녁 저는 친구들을 위해서 저의 비장의 무기 소주를 꺼내기로 했습니다. 함께 식사를 하면서 '이건 한국의 전통 술인데 나의 보물이야. 하지만 너희들에게 줄게. 우리는 친구니까!'라고 말하며 한잔씩 따라줬습니다. 한족 친구는 자기의 전통주를 꺼냈고, 소수민족 친구들도 각자 자기가 가져온 음식들을 꺼내서 나누어 줍니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베프가 되었습니다. 그다음 날에는 한국에서 가져간 또 다른 비장의 무기 고스톱을 꺼냈습니다. 저는 중국어를 못 하고, 소수 민족 친구는 영어를 못 했지만, 중간에서 영어를 할 줄 아는 한족 친구가 통역을 하며 저의 코리안 포커 교실이 열렸습니다. 반복된 설명과 연습을 거듭하며 결국 한족이 광을 팔고 좡족이 고를 외치는 진풍경이 펼쳐졌습니다.
칭짱 철도를 타고 가다 보면 커다란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이 압도적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워낙 중국이 넓다 보니 움직이면서 파노라마 같은 풍경은 계속 바뀝니다. 베이징의 빌딩숲에서 시작된 풍경은 어느새 황토 고원으로 바뀌고, 점점 드넓은 초원과 사막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목적지인 라싸에 가까이 갈수록 고도는 점점 높아지며 어느새 해발 5500m에 다다릅니다. 기차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역을 지나 티베트 고원의 수많은 야크 떼와 저 멀리 보이는 설산을 지납니다. 여기서는 그냥 아무 카메라로 찍어도 사진작가가 찍은 사진처럼 나오는 마법이 펼쳐집니다.
그렇게 2박 3일에 걸쳐서 드디어 라싸에 도착했습니다. 그 유명한 포탈라궁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하지만 라싸에 도착했다 하더라도 긴장을 늦출 수는 없습니다. 거리에는 총을 멘 중국 공안들이 골목마다 서있습니다. 저는 얼른 미리 찾아뒀던 숙소로 향했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양손에 비닐봉지 두 개를 양손에 들고 방에 들어갔습니다. 커다란 방에는 침대가 20개 넘게 놓여있고, 방의 온도는 밖과 다르지 않습니다. 방 가운데 난로에 네다섯 명이 둘러앉아 있습니다.
조심스럽게 내 침대에 짐을 놓으려는 순간, 그중 한 명이 나에게 큰 소리로 외칩니다. "혹시 춘천 사람이세요?" '한국사람이세요?'도 아닌 '춘천사람이세요?'라니. 알고 보니 그 남자는 춘천에서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었고, 제가 들고 온 춘천 지역 마트 '벨몽드 봉투'를 보고 그렇게 말한 것이었어요. 그렇게 외국인 여행이 금지된 티베트 라싸에서 춘천 사람 둘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춘천 형 옆에는 일본 사람과 또 다른 한국 사람, 그리고 심지어 독일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제는 좀 안심이 됩니다.
처음에는 티베트 라싸에 도착해서 파란 하늘과 포탈라궁만 보면 너무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욕심이 생십니다. 라싸 밖으로도 여행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라싸에서 차로 5시간 거리에 있는 빙하 호수, 암드록쵸로 떠날 계획을 세웠습니다. 저는 외국인이고 중국말도 전혀 하지 못 하니까 혹시 도중에 공안 검열에 걸리면 정말 큰일 납니다. 그러다 정말 사형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함께 갈 중국인 친구를 섭외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춘천 형과 일본인, 그리고 우리를 안내해 줄 중국인 이렇게 넷이서 파티를 결성하였고, 함께 택시를 타고 암드록쵸에 가기로 했습니다. 중국인 친구는 티베트인 택시 드라이버도 섭외했습니다. 그렇게 라싸를 벗어나 빙하가 녹아 에메랄드 빛이 나는 하늘 호수로 떠납니다. 가는 길은 길기도 길었지만, 엄청나게 꼬불꼬불하고 좁았습니다. 그런데 티베트인 택시 아저씨는 부산 택시보다 58,000배 더 난폭하게 운전합니다. 마치 치킨 게임을 하듯이. 반대 차선으로 역주행을 하다가 반대편 차가 겁나서 비키면 껄껄 웃으면서 지난주 동료 드라이버가 이 길을 가다 죽었다고 말합니다. 통역을 전해 듣고 우리는 모두 사색이 되었습니다. 택시에서는 평화로운 음악이 흐릅니다.
그렇게 죽음의 레이스 끝에 암드록쵸에 도착했습니다. 가까이서 바라본 암드록쵸의 색은 비유가 아니라 그냥 에메랄드 빛입니다. 호수가에는 블랙야크가 웅장한 자태를 뽐내며 서있습니다. 낯선 여행자들이 오니까 새끼 야크들은 반갑게 꼬리를 치면서 다가옵니다. 그 모습이 송아지처럼 귀여워서 머리를 쓰다듬었는데 커다란 수컷 블랙야크가 무시무시한 뿔을 흔들며 위협합니다. 얼른 송아지에게서 손을 떼고 서서히 뒷걸음질 쳤고, 블랙야크는 몇 번 뿔을 흔들고 앞발로 땅을 몇 번 위협적으로 긁은 후에야 잠잠해졌습니다. 다시금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3. 하마터면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에서 안 행복할 뻔했다!
: 3분 만에 끊은 코펜하겐 왕복 티켓
세 번째로 걸어볼 도시는 세계에서 가장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입니다. 모두의 마블 좀 해본 학생들은 알 수도 있는 도시겠네요. 덴마크는 흔히 북유럽이라고도 하는 스칸디나비아 반도 바로 아래 위치하고 있는 나라로 면적이 작고 (4만 2934㎢, 한반도의 약 1/5) 인구 또한 작습니다. 빙하의 영향을 받아서 토양도 척박하고, 기후도 좋지 않아서 농업도 불리합니다. 그럼에도 1인당 국민소득은 세계 5위 안에 들 정도로 매우 부유한 나라입니다. 저는 이 덴마크 코펜하겐을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 여행을 했는데요. 제가 이 덴마크게 가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썸녀 J가 보낸 단 하나의 메시지 때문이었습니다.
2013년 12월 크리스마스 즈음 저는 대학교 후배 J와 썸을 타고 있었습니다. 뭐 정확히 말하면 저 혼자 썸을 탔다고도 볼 수 있겠네요. J와는 같은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수업도 같이 들었습니다. 저는 J에게 여행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고, 그녀는 이야기를 듣고 저처럼 여행을 다니고 싶어 했습니다. 당시 저는 대학 졸업 후 잠시 사업을 하다 그만두고 저는 기간제 교사를 하고 있었고, 그녀는 대학교 졸업을 1년 남긴 시점이었습니다. 그해 겨울 방학 동안 서로 자주 연락하고 만나면서 저는 그녀가 점점 좋아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갑자기 J가 곧 덴마크로 1년 간 워킹홀리데이를 떠난다고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들었습니다. 이유를 물으니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에서 한번 직접 살아보고 싶다는 것이었죠. 저는 겉으로는 '대학교 때의 목표를 진짜로 이뤄서 멋있다!'라고 말했지만, 속으로는 이제 1년 동안 J를 못 만난다는 것이 너무도 아쉬웠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녀의 출국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최악의 행동을 합니다. 그게 뭘까요? 바로 고백입니다. 결과는 거절당했죠. 그녀는 자기는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라면서 1년이나 롱디로 만나면 힘들 것 같다면서, 1년 후에도 서로의 마음이 지금과 같다면 그때 사귀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그렇게 J는 덴마크로 떠났습니다.
그 이후에도 우리는 계속 SNS 메신저를 통해 연락했습니다. 2014년 5월 새벽,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J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J는 무슨 심리 테스트 같은 이미지를 보내며 "원탁에 내가 앉아있는데 오빠는 어디에 앉을 거야?"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저는 그녀와 마주 볼 수 있는 정면을 골랐고, J는 왜 자기 옆에 안 앉았냐며 자기라면 오빠 옆에 앉았을 거라고 귀엽게 삐쭉거리며 서운해합니다. 저는 '이건 그린 라이트다!'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J에게 오는 메시지, "오빠 이번 여름방학에 덴마크 안 올래? 내가 가이드해줄게" 바로 그 순간, 저는 바로 코펜하겐 왕복 티켓을 끊었습니다.
그 사건 일주일 후, 평소처럼 점심시간에 급식 지도를 하고 있는데 페이스북 알림이 뜹니다. 내용은 J가 연애 중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너무도 갑작스러워서 '어? 누구지? 설마 난가?'라는 생각을 하며 열어봤는데, 글쎄 J가 나 아닌 다른 남자와 연애 중이라는 것입니다. 그 순간 저의 표정은 흙빛이 되었고, 그 표정을 본 공감 잘해주는 우리 반 여학생들이 다가와서 무슨 일이냐고 위로를 해줬습니다. 저는 바로 제 자리로 와서 비행기 티켓을 취소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환불 불가! 3분 만에 급하게 예매하느라 관련 규정을 자세히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쩔 수 없이 무려 한 달 동안이나 코펜하겐 in 코펜하겐 out의 너무도 비효율적인 스칸디나비아 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사실 원래 계획은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J와 함께 있을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된 마당에 그동안 한 번도 못 가봤고, 앞으로도 한동안은 못 가볼 스칸디나비아 여행이나 제대로 해보자라는 생각으로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스코틀랜드, 잉글랜드로 이어지는 스펙터클한 여행을 계획했습니다. 핀란드 헬싱키 공항을 경유해서 코펜하겐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J가 공항에 마중 나와 있었고, 얼굴을 보니 그래도 마음이 조금 누그러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조금 어색했지만 J와 함께 코펜하겐을 둘러보면서 점차 여행의 맛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약속대로 코펜하겐을 가이드해줬습니다. 함께 자전거를 타고 코펜하겐의 유명한 관광지와 숨겨진 여러 장소를 소개해줬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반년동안 워킹홀리데이를 하면서 만난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을 소개해줬습니다. 그들과 함께 술도 마시고 맛있는 것도 먹으면서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저의 갑작스러운 고백 공격과 신중하지 못했던 비행기 티켓 예매로 어쩔 수 없이 떠나게 된 덴마크 여행, 그리고 스칸디나비아 여행이었지만 이런 와중에도 꽤나 즐겁게 여행하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순간을 최대한 즐기기로 하였습니다. 당시 그렇게 큰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작은 돈도 아닌 은행 계좌에 있던 돈 전부인 1000만 원을 한 달 동안 탕진하며, 세계에서 가장 물가가 비싼 스칸디나비아에서 호사스러운 여행을 마무리하였습니다.
4. 하마터면 첫 유럽 여행에서 로마도 못 갈 뻔했다!
: Roma with love
마지막으로 걸어볼 도시는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입니다. 로마는 유럽의 역사적, 문화적 중심지이면서 정신적 고향이기도 한 로마 제국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루비콘 강을 건넜다', 그리고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와 같이 지금까지도 사용되는 수많은 문장들이 로마 제국을 배경으로 합니다. 로마제국 시절의 로마는 세계의 중심이었고, 현재까지도 유럽의 역사적, 문화적, 정신적 중심지라고 할 수 있죠. 또한 종교적으로도 가톨릭의 총본산 바티칸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 역시 유럽 배낭여행을 계획할 때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를 우선순위로 배치했는데요. 그런데 저는 그 '로마'를 첫 번째 유럽 여행에서 하마터면 못 갈뻔했습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체코 프라하부터입니다. 제대를 앞두고 있던 겨울, 유럽 여행을 준비했습니다. 처음 떠나는 유럽 여행이었지만 패키지여행 말고 스스로 계획해서 준비하고 싶었습니다. 지금도 있는 유럽 여행 전문 네이버 카페 '유랑'을 통해서 다양한 정보를 얻었습니다. 그렇게 차근차근 유럽 여행을 준비하던 중, 게시판에서 한 글을 봅니다. ‘혹시 크리스마스에 프라하에 계신 분?’ 저의 일정이 마침 크리스마스이브에 체코 프라하로 들어가는 일정입니다. 그렇게 저는 야경이 그렇게 아름답다는 프라하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게 됩니다.
2006년 12월 24일, 체코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 기마상 앞에 약 30명의 사람들이 모여있습니다. 설레는 표정으로 근처 펍으로 들어가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벌였습니다. 그리고 그때 같은 테이블에 앉았던 6명과 친해졌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남자 셋, 여자 셋이었던 우리는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금세 친해졌고, 서로의 일정을 변경해 가면서 나머지 여행을 함께 하기로 합니다. 저는 잘츠부르크 일정을 취소했고, 계획에도 없던 알프스에서 스키를 인생 처음 타기로 했습니다. 물론 제가 이렇게 무리해서 일정을 바꾼 이유는 그 멤버 중 한 명 H에게 첫눈에 반했기 때문이에요.
저는 그 멤버들, 그리고 H와 함께 프라하에서부터 음악의 도시 빈, 스키장 밖에 기억에 남지 않는 바드가스타인, 그리고 이탈리아 베네치아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H를 향한 저의 마음은 커져갔습니다. 하지만 저는 고백도 해보지 못하고 H와 헤어져야 했습니다. 저는 일정 상 이탈리아 로마로 가야 했고, 그녀는 밀라노를 거쳐 스위스로 가야 했거든요. 아무리 그래도 제가 유럽에 온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로마에서 콜로세움, 바티칸을 보는 것이었는데, 이걸 다 포기하는 것은 너무 어려웠죠.
그래서 저는 그때 둘 다 포기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저의 계획은 이렇습니다. 저는 우선 다음날 아침 일찍 출발하는 로마행 기차표를 취소했습니다. 그리고 아침 일찍 밀라노로 갔다가 역에서 잠시 있다가 다시 베네치아로 돌아와서 저녁 늦게 로마행 야간열차를 타는 것입니다. 일정 상으로나 비용적으로 너무도 비효율적인 미친 계획이었습니다. 제가 왕복 여섯 시간이나 걸려가며 밀라노를 간 이유는 단 하나! 바로 H와 조금이라도 함께 있고 싶었거든요. 그렇게 밀라노 역에서 H를 배웅하고 저는 혼자 베네치아로 돌아왔습니다. 로마로 가는 야간열차 안에서 그토록 기다리던 로마이었건만 기쁘기는커녕 슬픈 기분이 가득했습니다.
그래도 3일 후에는 피렌체에서 그녀를 볼 수 있다는 생각으로 로마에서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3일 후 새벽, 첫 번째 기차를 타고 피렌체로 향했어요. 약속 시간은 12시였지만 조금이라도 일찍 피렌체에 가고 싶었거든요. 피렌체 골목길을 걷다가 아침 햇살을 반사하며 반짝거리는 유리 공예품도 H를 만나면 주려고 하나 샀어요. 그렇게 12시가 됐고 약속 장소인 우피치 미술관에 도착했는데, 아뿔싸! 사람이 너무 많은 거예요. 거기다가 우피치 미술관의 입구는 무려 네 곳이나 있어서 연락처도 서로 없던 우리가 만날 수 없겠다는 불안한 기분이 들기 시작합니다. 하루 종일 우피치 미술관을 몇 바퀴나 돌며, 아르노강을 서성이며, 다리를 몇 번이나 건너면서 미켈란젤로 언덕도 가봤지만 우리는 만날 수 없었어요. 해가 지고 나서야 우리가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로마로 가는 마지막 기차를 타고 돌아왔어요.
다음 날, 바티칸 투어가 예약되어 있었지만 전혀 감흥이 없었어요. 그냥 대충 둘러보다가 얼른 로마를 떠나야겠다는 생각이었어요. 베드로 대성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줄을 서있는데, 그 순간 뒤에서 누가 저를 부를 거예요! “어? 오빠 여기서 뭐 해?” H였어요! 어제 피렌체에서 약속을 정하고도 못 만났는데, 훨씬 더 큰 로마에서 우연한 장소에서 우연히 만난 거죠! 저는 티는 안 냈지만 너무도 기뻐서 만약 제가 강아지였다면 꼬리를 마구 흔들었을 거예요. 그렇게 저는 그날 저녁 스위스 베른으로 떠다는 기차표를 다시 한번 취소하고 로마에 하루 더 있기로 합니다. 그래도 내가 3일 동안 먼저 로마에 있었으니까 로마를 가이드해 주기로 했거든요. 로마의 명소를 돌아다니면서 사진도 찍고, 맛있는 것도 먹으며 추억을 쌓았어요. 그리고 해가 질 무렵, 과거 로마의 흔적인 포로 로마노가 한눈에 보이는 로마 시청 건물 옥상 카페에서 그녀에게 어제 피렌체에서 산 선물을 전해줬습니다.
로마를 떠나 저는 스위스, 프랑스, 영국 런던으로 왔습니다. 저도 이제 여행이 막바지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유럽 여행에 대한 내공이 쌓인 상황이었어요. 게스트 하우스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에게 마치 제가 유럽 여행을 준비하던 당시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이제 막 유럽 여행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줬어요. 그들에게 제가 한 달 동안 찍었던 사진들을 보여주면서 도시별로 갈만한 곳을 추천해 줬어요. 그때 게스트 하우스에는 저와 비슷한 일정을 다녔던 일본 사람이 있는데 그도 자신의 사진을 공유하면서 함께 여행을 이야기했어요. 그때 주변 사람들이 그가 로마에서 사진 한 장을 보면서 저에게 이야기했어요. “야 이거 혹시 너 아니야?” 그 사진은 바로 제가 로마 시청 옥상 카페에서 H에게 선물을 주고 수줍게 웃고 있는 순간을 담고 있었어요.
지금은 바야흐로 영상의 시대입니다. 1인 미디어가 레거시 미디어의 대안이 아닌 주류 매체가 되면서 영상은 글쓰기에 비해 훨씬 가치 있고 많은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또한 AI 시대는 이제 먼 미래가 아닌 곧 다가올 미래 혹은 이미 현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2024년 현재 다양한 AI 도구들이 등장하며 20년 전 IT 버블 시대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시대의 패권을 얻기 위해 무한 경쟁 중입니다. 이런 상황 속, AI 도구들의 제작과 관기를 위해 필수적인 GPU 생산 기업인 엔비디아는 1년 넘게 끝없이 주가가 오르며 어느덧 애플에 이어 세계 시총 2위 기업이 되었습니다. 이는 마치 골드러시가 한창이던 미국 서부 개척 시기 금 채굴 기업들보다 채굴에 필요한 곡괭이 회사가 더욱 성장한 것과 매우 흡사한 상황입니다.
자 그럼 여기서 의문이 들 것입니다. 영상의 시대, 그리고 다가오는 AI 시대에 우리는 왜 글쓰기를 해야 할까요? 텍스트는 너무 구닥다리 아닌가요? 그리고 한때 전국 교사 중 구독자 수가 가장 많았던 유튜버인 제가 지금도 왜 글을 쓰고 있을까요?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의 본질은 글이 아니라 고유성(Originality)에 있습니다.
AI는 인간이 수천 년 동안 축적해 놓은 글, 그림, 생각, 논리 구조와 같은 빅데이터들을 재료로 학습(M.L)하고 이를 바탕으로 인간이 원하는 방식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과물이 텍스트일 수도 있고, 이미지, 영상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AI로봇, 자율주행과 같은 물리적 움직임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은 AI가 내놓는 최종 결과물의 퀄리티는 인간이 그동안 쌓아놓은 그리고 앞으로 쌓아놓을 진짜 경험, 진짜 지식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최근 저는 Chat GPT, FLUX, 미드저니와 같은 다양한 AI 도구들로 글, 그림, 영상들을 제작해 보았습니다. '지리는 강선생'이 아닌 다른 채널의 새로운 콘텐츠를 기획 중이거든요. 그런데 작업을 하면 할수록 느끼는 점이 바로 오리지널 콘텐츠의 중요성이었습니다. 또한 최종 결과물을 구체적이고 창의적으로 상상하여 표현하는 명령어, 즉 프롬프트를 제대로 입력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만약 제가 '영화 라라랜드의 배경을 대한민국 서울로 바꿔서 유튜브 웹드라마 형식의 시나리오를 써줘. 상황과 대사의 비율은 3대 7로 해줘'라는 프롬프트를 작성했다면, 첫째 영화 라라랜드에 대한 전체적인 내용과 상황을 알아야 하고, 둘째 이 영화 시나리오의 배경이 서울로 바뀐다면 매력적일 것이라는 감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유튜브 웹드라마의 형식이 어떠한지 배경지식도 알아야 하고, 결과물을 어떻게 각색할지 판단하는 것 역시 AI를 활용하는 인간의 몫입니다.
가치라는 것은 희소성에서 나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모방하고 재구성하는 AI시대가 될수록 진짜 지식, 고유성의 가치는 더욱 증가할 것입니다. 저는 약 3년 전 모 대학 특강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AI 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은 AI가 모방할 수 없는 개인의 이야기, 스토리가 될 것'이라고. 이는 단지 디지털 시대의 변화 속에서 맹목적으로 아날로그를 추구하는 돈키호테적 발상이 아닙니다. AI는 인간과 달리 육체가 없기 때문에 실제의 경험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모방할 뿐입니다. 즉 진짜 경험은 AI가 갖기 못 하는 인간 고유의 특성이고, 글쓰기는 그러한 인간의 진짜 경험이 담긴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AI 시대에는 우리가 더욱더 남들과 다른 진짜 경험을 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남겨야 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글로 쓰고 영상으로 남겨야 합니다. 미래에 인공육의 시대가 온다면 진짜 고기의 가치는 천정부지로 높아질 것을 누구나 예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런 자본주의적 시선에서만 글쓰기가 중요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글쓰기는 현재 자신의 마음 상태를 차분하게 정리할 수도 있고, 그동안 쌓은 지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며 기록을 남길 수 있는 강력하면서도 효율적 도구입니다. 역발상이 필요합니다. 지금이 스마트폰의 시대, 영상의 시대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의 글쓰기, 읽기, 문해력이 퇴화되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제대로 읽고, 쓰는 능력의 가치는 더욱 올라갈 것입니다. AI 시대에는 결국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말하고, 표현하는 인간 고유의 능력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 외에 나머지는 대부분 AI가 해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