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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침 Sep 14. 2018

[영화] <너의이름은.> 리뷰

아름답기 때문에 기만적인 영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너의이름은>은 한국과 일본에서 흥행돌풍을 일으키며 화제를 모았다. 도대체 이 애니메이션의 무엇이 사람들을 매료시켰는지 궁금해하던 차, 얼마 전 뒤늦게 <너의이름은>을 관람했다. 그의 작화는 변함없이 아름다웠고, 예고편을 보고 예상한 것과는 꽤나 다른 스토리가 신선했다. 몸이 뒤바뀐 두 사람의 세계에는 3년이라는 시간차가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중반부까지는, 나는 이 영화에 꽤나 몰입해있었다. 그러나 몇몇 부분의 엉성한 개연성에서 솟아오른 의문점들은 영화가 클라이막스를 향해 갈수록 점점 늘어만 갔다.


두 사람은 어째서 3년의 시간차를 한번도 알아채지 못했는가? 미츠하의 선대부터 모르는 남자와 몸이 바뀌었다고 하는데 대체 왜 바뀐건가? 정말 그 날을 위해서라면 그냥 예지몽을 꾸는 편이 훨씬 간단하지 않은가? 몸이 바뀌고 나서 대체 왜 기억이 없어지는가? 그냥 아련함을 위한 1차원적인 장치 아닌가? 둘이 계속 다투다가 서로의 일상에 익숙해지긴 했는데 언제 저렇게 죽고 못 살 정도로 사랑하게 되었나? 왜 씹은 술을 마셨을 때는 갑자기 미츠하가 죽은 이전 시점으로 연결이 가능해졌나? 미츠하는 아빠를 어떻게 설득한 것이며 그 장면은 대체 왜 생략했나? 이토모리 사람들은 그냥 혜성 떨어지고 나서 다 도쿄로 이사하고 끝인가?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던 신사나 전통은? 등등등…


특히 가장 핵심소재인 ‘몸이 뒤바뀌고 후에 기억이 없어진다’는 설정이 꽤나 인위적으로 느껴졌고, 나중에 가서는 이러한 개연성 없는 요소들이 오직 ‘아련한 감정’을 전달하고자 과하게 설계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 스스로가 영화에서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바 있지만, 그야말로 그 ‘감정 전달’ 하나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이 뭉개져 ‘이렇게 하면 아련하고 슬프겠지?’라는 의도가 직접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자, 나는 역설적으로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감정을 온전히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미츠하와 타키가 (조금은 뜬금없이) 산 위에서 ‘잊으면 안되는 사람!’을 외치며 우는 장면, 미츠하가 울며 자전거를 타며 달리다가 넘어지는 장면, 몇년 후 전철에서 스쳐간 서로를 찾으러 죽어라 뛰는 두 사람의 모습, 너무 잦은 배경음악의 사용과 그 배경음악의 ‘조금만 더’라는 가사까지, 모두 다른 애니메이션에서 보았던 클리셰가 ‘아련함’을 위해 이식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른 리뷰들에서 계속해서 ‘세카이계’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것도, 세카이계의 다른 애니메이션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아련함의 감정이나 그것을 위해 사용되는 장면연출에서 이 영화가 크게 벗어나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장면장면을 묘사하며 특유의 감정을 전달하는 것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강점이다. <별의 목소리> 같은 단편 애니메이션에서는 짧은 러닝타임이라는 알리바이에 기대어, 많은 것들을 생략하며 이러한 감정의 전달에만 집중하는 것이 가능했다. <별의 목소리>에서 사람들은 미카코가 싸우는 외계인의 정체가 무엇인지, 왜 그들과의 전쟁이 일어났는지, 왜 미카코만 파일럿으로 선발되었는지에 대해 깊은 의문을 갖지 않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고 느낀다. 관객이 집중하는 것은 두 사람간의 거리가 벌어지며 생기는 시간축의 어긋남,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안타깝고 아련한 감정 그 자체이다. 30분이란 시간은 거기에만 집중해도 충분한 시간이니까. 그러나 호흡이 긴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들 때엔 당연히 스토리와 개연성에 조금 더 신경을 써야한다.


비슷한 소재의 장편 애니메이션인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경우에도 주인공의 타임리프가 어떤 원리로 이루어지는지, 남주인공이 있는 미래가 어떤 곳인지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주인공인 마코토가 타임리프 때문에 망쳐버린 것, 그래서 바로잡고자 애쓰는 것은 자신을 둘러싼 주변 세상의 질서이고, 이는 <너의이름은>에서 다루고자 하는 세계보다 훨씬 한정되어 있기에 책임지기도 쉽다. 가장 중요한 순간인 마코토의 타임리프 숫자 ‘1’이 다시 나타나게 되는 전개에선 치아키에 의해 시간이 한번 더 과거로 돌아간 상황이라는 적절한 개연성을 부여한다. 반면 <너의 이름은>에서 주인공이 막고자 애쓰는 사건은 <시달소>에서 다루는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심각한 자연재해로 심지어 실제로 존재했던 사고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설정이다. 그런데도 <너의이름은>의 스토리가 보여주는 개연성은 <시달소>보다도 떨어지고, 과하게 많은 것을 우연과 애니메적 클리셰에 기댄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많이 지적했듯이, <너의이름은.>은 성별이 다른 두 주인공의 몸이 뒤바뀌는 해프닝을 다루면서도 오래된 젠더역할에 대한 시선과 편견을 그대로 가져온다. (판치라 등 각 장면에 대한 지적은 이미 온라인상에서 여러 번 이루어졌으므로 본 글에서는 생략한다.) 영화에서 두 명의 주인공은 이분법적으로 대비를 이루는데, 미츠하가 여성-자연-피해자를 상징한다면 타키는 남성-도시-구원자를 상징한다. *


먼저 미츠하를 둘러싼 환경을 보자. 집안의 연장자인 미츠하의 할머니는 바보같을 정도로 신사의 전통을 지키려하며, 미츠하의 몸에 들어간 타키를 단번에 알아차린다. 그녀는 주술적인 혜안을 지닌 존재이며 사라져가는 전통의 가치를 수호하려는 인물이다. 미츠하의 집안에서는 오직 가문의 여성들만이 ‘무녀’로서 사춘기 시절 남성과 몸이 뒤바뀌는 신비한 체험을 대대로 공유한다. 반면 미츠하의 집에는 남성의 존재가 부재한다. 무녀로서의 책임과 초월적 가치를 중시하는 미츠하의 집안에 현실의 문제인 권력다툼을 끌어들이는 아버지가 있을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장 당선을 위해, 또 사업 확장을 위해 서로 결탁하는 정치인과 사업가 남성의 모습은 평화로운 시골의 모습과 대비되어 계속해서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또 미츠하는 사춘기임에도, 다음 생에는 도시의 이케맨으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소리를 지르면서도 자신에게 부여된 전통적 역할을 적극적으로 거부하지 않는다. 무릎을 꿇고 앉아 할머니와 함께 전통매듭을 만들면서도, 입으로 쌀을 씹어 뱉어내 술을 만드는 다소 부끄러울 수 있는 과정을 친구들 앞에서 보이면서도, 멀고 먼 신사에 가기 위해 산꼭대기를 오르면서도 단 한번도 반항하거나 제대로 불평하지 않는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이처럼 전통과 자연의 초월적 가치를 숭고한 것으로 미화하여 묘사하면서도,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무녀인 여성 개인에 대한 선택의 강요를 한번도 문제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무녀가 입으로 씹어만든 술이라면 잘 팔릴거야’라며 코미디의 요소로 가볍게 다루고 넘어갈 뿐이다. 이처럼 전통-자연-여성의 가치에 대한 숭앙은 도시-남성인 감독의 시점에서 철저히 타자화 된 채로 이루어진다. 인간과 자연을 다룬 애니메이션에서, 여성은 자연을 이해하며 조화를 추구하는 존재로 빈번하게 등장한다. 하지만 주인공이 세상을 구하는 내용의 애니메이션에서 주인공은 대부분 남성의 몫이다. <너의이름은>은 미츠하와 타키, 두 주인공에게 이 진부한 도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역할만을 주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두 사람의 성이 반전되어 시골소년-도시소녀의 구도로 나타났다면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신선하게 느껴졌을지, 얼마나 영화에 색다른 활기를 줄 수 있었을지 아쉬움이 남았다.


이번에는 타키를 둘러싼 환경을 보자. 자세히 묘사되지는 않지만, 집안에 아버지만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타키네 집안에는 여성-엄마의 존재가 부재한다. 또 무녀로서 다소 특이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미츠하와 달리 타키는 학교에 다니고, 적당히 아르바이트를 하는 그야말로 평범한 도시 고등학생의 삶을 살고 있다. 미츠하와 다른 타키의 ‘평범함’ 속성은 많은 애니메이션, 혹은 미소녀 게임물의 ‘평범한 남주인공 설정’과도 비슷하다. 이 설정의 기본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던 남자 고등학생 앞에 특이한 설정을 가진 여주인공(들)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남주인공의 평범함은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는, 혹은 게임을 플레이 하고 있는 (얼굴 없는) 다수의 남성들이 그에게 이입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한 장치 중의 하나다. 이러한 평범함은 누군가에 의해 낭만화, 혹은 타자화되지 않을 특권을 부여하기도 한다. 즉 이처럼 독특한-시골소녀의 삶과 평범한-도시소년의 삶의 대비에서 감독이 감정을 이입하는 대상, 그리고 감독이 관객에게 감정을 이입하기를 바라는 대상은 도시의 남성인 타키에 가깝다. 실제로 영화를 보면 작중의 시점이나 비중이 타키쪽에 많이 쏠려있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비중의 차이는 미츠하가 사고의 피해자를, 타키가 구원자 역할을 맡는다는 점에서 더더욱 문제적이다. 영화는 초중반부에 미츠하를 둘러싼 환경 — 시골마을의 아름다움, 신사를 지키는 무녀집안의 장녀로서 미츠하가 겪는 조금 다른 일상들에 대해 낭만의 필터를 끼운 채 묘사하는 데에 집중한다. 그러나 클라이막스로 다다를수록 영화는 타키의 시점에 무게를 두기 시작해, 결말 부분에는 미츠하의 존재감이 아주 옅어지고 ‘미츠하의 몸에 들어간 타키’의 고군분투에 초점을 맞춘다. 미래의 상황을 알고 있는 타키는 친구들을 모아 계획을 짜고, 지시를 내리고, 미츠하의 아버지를 찾아가 멱살을 잡는다. 그러다 둘의 영혼이 마침내 본래의 몸으로 돌아가고, 미츠하가 마침내 마을을 구하고자 나서는 순간 영화가 긴 시간동안 묘사하는 미츠하의 모습은? ‘자전거를 타고 죽어라 달리다가 크게 넘어져 다치는 모습’이다. (감독은 미츠하가 달리다가 나뒹구는 모습을 무서울정도로 디테일하게 묘사한다… 미츠하의 몸에 들어간 타키가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지지만 순발력을 발휘해 손으로 짚고 무사히 일어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리고 마침내 미츠하가 껄끄러워하던 아버지 앞에 두 발로 마주한 순간에…! 허무하게도 화면은 갑자기 미래의 시점으로 전환되어 버린다.




전환된 미래의 시점에서 뉴스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까스로 살아남았다는 보도가 나오고, 타키의 뒤로 보이는 미츠하의 학교 친구들은 도쿄로 올라와 새로운 삶을 시작한 듯 보인다. 미츠하 또한 도쿄로 올라와 지내고 있는 듯 하다. 문제는 이것이 감독이 생각한 ‘해피엔딩’이라는 것이다.


신카이 마코토는 인터뷰에서 <너의이름은>을 통해 3.11 도호쿠 대지진을 겪은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치유를 주고싶었다고, 또 한국의 세월호 사건을 보고도 영화와 관련된 모티브를 얻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감독이 주고자 한 치유의 방향은 실제의 피해자들에게 무례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본인의 시점에 국한되어 있다. 이토모리 마을 사람들은 마을 재건을 위해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도쿄라는 대도시로 흡수되어 룰루랄라 살았을까?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이 진정 이토모리 마을 사람들의 (어쨌든 살았으니) 행복한 결말인가? 미츠하 또래의 아이들이야 그렇다고 쳐도, 마을의 어르신들이 갑자기 대도시로 옮겨와 제대로 살 수 있었나? 이처럼 감독이 묘사하는 해피엔딩은 이미 일어난 사고를 막고자 하는 외부인 타키의 시선에 부합하는, 딱 그만큼만의 해피엔딩 — 즉 가슴 아픈 사고를 어떻게든 막아내고 싶어 막아내지만 그 이후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는 — 일 뿐이다. ‘위로의 메세지’라는 측면에서도 단순히 ‘너무 슬프니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 일을 막아내고 싶다!’는, 상당히 자기위로적이고 얄팍한 위로라는 소리다.


무엇을 묘사하고 생략할지 결정하는 것이 감독의 역할이라고들 한다. 그가 묘사하고자 선택한 것은 ‘이미 일어난 사고를 막고자 애쓰는 외부자-소년’과 보는 이들에게 가슴 찡한 감정을 전달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울면서 달리는 소녀’이다. 반면 그가 생략하고자 선택한 것은 ‘마침내 아버지 앞에 서서 자기 목소리로 그를 설득하는 당사자-소녀’와 ‘사고 이후 당사자들의 노력이나 삶의 모습’이다. 이것이 내가 영화를 보고나서 영화가 전달하는 ‘위로의 메세지’라는 것이 기만적이고 회피적이고 자기만족적으로 느껴졌던 이유이다. 신카이 마코토의 영화는 언제나처럼 아름답고 뭉클했다. 그러나 그 아름답고 수려한 작화는 바로 여기서 문제가 된다. 그것이 이 영화의 너무나도 많은 문제점들을 덮어버리기 때문이다.




<너의이름은>은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오타쿠와 대중 모두에게 대히트를 쳤고, 이를 ‘사건’이라고 칭할 정도로 놀란 일본의 전문가들도 이런저런 분석을 내놓고있다.** 개인적으로 한국의 젊은층은 오타쿠가 아니더라도 이미 대중적 일본 애니메의 문법을 체득한 상태라고 생각한다. 주변에 <시달소>를 보지 않는 친구가 거의 없고, 지브리 카페와 원피스 카페가 히트를 칠 정도로 10대-20대는 자신의 유년시절과 일본 애니메이션을 떼놓을 수 없을 정도로 가깝게 느끼고 있으니까. 또, 다른 극장 개봉 애니메이션인 <아이돌마스터>, <러브라이브>나 <걸스 온 판쳐>처럼 캐릭터 위주의 스토리도 아니고 덕력을 요구하지도 않기에, <너의이름은>의 흥행이 ‘오타쿠까진 아니지만 대중적 애니메이션에 친숙한 세대’에게 어필할 수 있는 적정선의 것들을 가져왔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기존의 오타쿠 소비자들을 염두에 두고 만든 <너의이름은>이 오히려 일본의 10대 소녀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았다는 기사를 보면서, 전형적인 오타쿠-남덕의 시선이 녹아있는 애니메이션이 대중적으로 흥행하는 시대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이러한 시골소녀, 도시소년의 대비와 이들의 우연한 만남을 소재로 사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크로스로드의 CM 애니메이션에서도 시골소녀, 도시소년의 설정을 활용한 바가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time_continue=116&v=MfuGMhUr2do


**“너의 이름은”의 대히트가 어째서 사건일까? 세카이계와 미소녀 게임의 문맥으로 읽어보자, 와타나베 다이스케(渡邉大輔), http://realsound.jp/movie/2016/09/post-2675.html


위의 글 번역: [너의 이름은] 오타쿠의 시대는 끝났다. 오타쿠 컨텐츠가 리얼충화되고 있다, 각시수련, http://waterlotus.egloos.com/355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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