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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 산다고 유러피안이 되는 건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한 발짝

by 은달

브런치라는 플랫폼에 대해서는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모두가 작가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로 움직이는 이곳에서는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가진 사람들이 다양한 형태로 삶을 녹여내고 있었다. 꽤나 감성적인 글씨체와 사용자 인터페이스도 한몫하는 듯했다. 한국을 떠나기 전 잠시 회사를 다녔는데, 글쓰기를 시작해 볼까 하는 생각에 잠시 브런치 작가 신청을 고민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 직장 동료들에게 이야기했더니 좋은 생각이라고 하면서도 브런치 글은 좀 오글거리지 않냐며 키득거렸다. 결국 그때 브런치를 시작하지는 못했다.


시간이 흘러, 스위스에 유학을 오고 졸업 후 취업을 하게 되어 정착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그동안 거쳐온 낯선 땅에서의 삶은 때로는 뜨거운 여름 같고 때로는 시린 겨울 같았다. 오랫동안 그리던 해외 유학을 가게 되어 벅찼지만, 매일을 낯선 언어와 문화,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나를 끊임없이 시험했다. 이곳의 겨울은 길고도 길었다. 모두가 가족의 곁으로 돌아가는 크리스마스 당일, 아무도 없는 도서관에 남아 조용히 공부를 했던 그날을 잊을 수 없다. 쏟아지는 눈 사이를 걸으며 끝없이 밀려오는 외로움을 삼켰다.


처음부터 장기 거주를 생각하고 스위스로 온 것은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이곳에 살게 된 지 벌써 5년차다. 이제는 꽤 이곳의 삶이 익숙해졌지만, 가끔씩 나를 잃어버린 것 같은 혼란이 찾아올 때가 있다. 아무리 이곳 사람들과 비슷해지려 해도, 눈에 띌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을 마주할 때. 현지어를 열심히 배워 조금씩 차오르던 자신감이 사람들의 빠른 말 속도에 한없이 무너질 때. 이곳 사람들이 열광하는 문화와 동떨어진 듯한 느낌이 들 때. 그래서 일과 후 지친 마음에 한국 콘텐츠를 보며 마음을 달랠 때.


유럽에서 소수자로 살아가는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에 대해 쓰다 보면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브런치를 시작했다. 나를 찾고 싶어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한국인 여성인 나의 정체성에 대해 알고 싶어서. 유럽에서 살아가며 보고 느낀 나만의 시선을 기록하면 그 길에 다다를 수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의 경험과 생각에 대해 쓰다 보면 내가 이곳에서 살아가는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정한 나 자신을 대면하는 시간. 그 누구도 아닌 나에 대해 풀어내는 시간. 포장해야 할 필요가 없는 솔직한 글을 브런치에서라면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브런치에 글을 쓴 지 수 개월, 유럽에서의 경험이 담긴 브런치북을 하나 완성했다. 글을 완성하고 다시 찬찬히 들여다보면 나와 대화하는 기분이 든다. 몇몇 사람들이 공감의 표시도 해준다. '아, 누군가는 내 글을 읽어주는구나. 누군가는 나의 이야기에 관심이 있구나.' 이방인으로서의 삶이 조금은 따뜻하게 느껴진다. 내 삶을 글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누군가에게 기쁨이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삶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브런치를 통해 언젠가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모여 삶에 대한 통찰을 주고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글을 쓰며 연대하는 삶을 사는 꿈을 꿀 수 있지 않을까.


평생 유러피안이 될 수 없는 검은 머리 한국인이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며 하루를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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