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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하태평 Dec 29. 2022

딸에게쓰는편지83미드<브레이킹배드> 나쁜나'를돌파하라!


 

한 남자가 있다. 중년이고, 고등학교 화학 교사이고, 부인과 고등학생 아들과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이다. ‘수소 2과 산소 1이 합쳐지면 물이 생긴다.’는 것을 믿는, 원칙에 충실하고 주어진 삶에 열심인, 조금이라도 가계에 보탬이 되려고 퇴근 후 세차장에서 알바까지 하는 고지식한 사람...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이 폐암에 걸렸다는 걸 알게 된다. 얼마 남지 않은 인생, 문제는 남겨진 가족이다. 새로 태어날 아이까지 하면 셋, 그들의 생계는 누가 책임질 것인가?

그리하여 그는 오래된 껍질을 벗고 ‘나쁜 나’의 폭주를 시작한다. 돈을 벌기 위해서, 남은 가족들이 빈곤의 나락에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2008년 시즌1을 시작으로 2013년 시즌5로 끝을 맺은 미드로, 현재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브레이킹 배드(Breaking Bad)>는 이렇게 시작되지.

어떻게 보면 뻔한 범죄 스릴러 드라마라고 할 수 있는데,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예사롭지 않아. 단순히 ‘재미있다’고 말하면 오히려 그 표현이 민망스러울 정도로 멋진 드라마야.


나는 항상 미드 <소프라노스(Sopranos)>를 ‘최고의 드라마’라고 말하는데, 그것과 미견할 정도로 ‘굉장하다’고 감탄하면서 봤어. 지난번 시리즈를 보는 중간에 너에게 추천한 바 있지만, 끝까지 다 본 지금 다시 한 번 강추해. 시간을 내서 꼭 보기를!

(그런데 딸아. 아빠가 추천하는 것들 찾아보기는 하니? 아빠가 가끔 ‘이과는 무식해서...’라고 말하며 이런저런 작품들을 추천하는데, 그 말 때문에 반항심에서 일부러 안보는 건 아니겠지? 지구인의 반이 문과이고, 더구나 예술은 문 이과를 뛰어넘어 공통의 영역 아닌가? 인류 문화유산을 즐기는 것은 우리의 신성한 권리잖아.)  

  

한 남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월터 화이트. 대체 그는 왜 화이트(White)라는 자신의 성처럼 밝은 세계를 걷어차고 어두운 범죄의 세계로 폭풍의 질주를 한 것일까? 그의 말대로 가족을 위해서 돈을 벌려고? 정글 같은 자본주의 미국에서 남겨진 가족이 생존할 유일한 방법은 ‘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그게 그의 폭주를 출발시킨 방아쇠로 작용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토록 집요하고 완벽하게 ‘악행을 깨부숴 완성한(브레이킹 배드)’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날아갈 것 같았다.”     


고 하는 그의 마지막 고백이 훨씬 더 설득력 있는 설명처럼 들린다. 평범한 삶이라는 두꺼운 껍질을 벗고 기분 좋게 악행의 날개를 달고 날아올랐다가, 자신의 동력을 모두 태워버리고 사라져간 월터 화이트...     

‘기분이 좋다’는 게 행동의 기본이 될 수가 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반박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럼 기분대로 사람을 죽여도 되느냐?’고 따질지도 모르지.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 무엇을 기초로 하는 게 올바른 것일까?

도덕? 사회적 관례? 보편적 시선? 법의 테두리? 개인적 양심?     


그러한 것들은 사회를 유지하게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관습에 불과하다. 우리의 내면에는 그런 후천적 사양들보다 근본적인, 원초적인 에너지가 들끓고 있다. 지구의 중심부에 엄청난 온도와 밀도의 내핵 외핵이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가 타고나는 그 고유한 에너지는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다. 밝을 수도 있고 어두울 수도 있다. 가벼울 수도 무거울 수도 있다. 우리의 의지와 선택에 상관없이 부유하게, 또는 가난하게 태어나는 것과 같다. 누구는 멋진 외모를 가지고, 누구는 불편한 육체를 견디고 살아야 하는 것과 같다. 운명이라는 말이다.   

  

“네 운명을 사랑하라.”     


무수히 들어온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이 ‘악한 나’를 사랑하라는 말이라면 어떠한가? 나의 어둡고 파괴적인 에너지를 사랑하라는 말이라면 그것은 정당한가?     

여기서 머뭇거리지 말자. 좌고우면 눈치 보지 말고 우리의 논리를 따라가 보자. 나의 본성이 무엇이건, 우리는 그 ‘나’를, 나의 전정한 내적 에너지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나의 본질에 조복해야 한다.    

 

“기분이 좋았다. 날아갈 것 같았다.”     


월터 화이트의 고백은 그런 점에서 설득력이 있다. 자신의 에너지에 충실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비로소,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에너지를 올곧게 분출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중꺾마.(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요즘 유행하는 이 말처럼, 중요한 것은 순결한 내 마음이 훼손당하지 않고 끝까지 불타오르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났고, 우주 속 태양계라는 작은 공간에서 살고 있다.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공전해야 하는 게 운명인 것처럼, 우리 역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주어진 운명을 살아야 한다. 운명이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정해져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얘기하자.)     


태양이 주위를 도는 지구가 춘하추동 계절의 변화와 밤낮의 구분을 만드는 것처럼, 우리의 운명도 변화를 만든다. 각자의 태양을 얼마나 정직하게 대면하느냐에 따라서 각기 다른 그림자를 만든다. 내가 내 운명의 에너지를 온전히 받아들일수록 그림자는 짧아진다. 중요한 것은 내 행동이 옳고 그르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행동이 얼마나 그림자를 남기지 않느냐 하는 점이다.     


<브레이킹 배드>라는 드라마가 훌륭한 것은 월터 화이트라는 주인공을 통해서 그림자 없이 완전히 산화하는 삶을 그려냈기 때문이다. 드라마로 그려진 그 삶을 추체험함으로써, 우리는 실제 생활과 상관없이 마음의 정화를 경험하게 된다. 일상생활에서 만들어진 내 마음의 그림자가 지워지는 시간을 갖게 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사회라는 공동체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규범의 중력에서 자유롭기는 힘들다. 사회적 실패보다는 성공이 낫고, 선함이 악함보다 살기에 편하다. 그러나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선함이나 성공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과연 운명이라는 나의 태양을 똑바로 보고 나아가느냐 하는 점이다.     


성공하기 위해서, 착하게 살기 위해서 나의 본성을 억압하고 훼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않은가? 나의 태양을 외면하고 길게 그림자의 삶을 살거나, 심지어 태양이 없는 어둠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브레이킹 배드>는 지금이라도 내 안의 태양을 꺼내어 내 운명을 비추게 하라고 권하는 드라마이다. 월터 화이트라는 인물을 통해, 그림자 길게 드리워진 삶에서 벗어나, 미련 없이 후회없이, 완전연소되는 삶을 보여주고 있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다. 내 운명을 사랑하는 마음이 꺾이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림자 없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브레이킹 배드! 브레이킹 섀도우! 나쁜 나를 돌파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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