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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le Apr 16. 2023

바다처럼 이어진 사적인 공간

사적인 서점  

나는 배우는 것을 좋아한다. 물론 빠르게 습득하고 항상 잘 해내지는 못해도 사고의 접촉면을 넓힌다는 것에 의미를 두는 편이다.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접하며 생각의 저변을 넓히고 인식을 확장되는 과정이 내면을 풍요롭게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언제나 관심분야의 교육이 어디서 열리나 안테나를 바짝 세우고 있다. 특히 자체 방학 중인 요즘엔 연차를 내지 않아도 어디든 자유롭게 참석할 수 있으니 그저 행복할 따름이다.


그동안 관심은 있었지만 하고 있는 사업에 어떻게 접목해야 할지 몰라 미지로 남겨두었던 분야의 교육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현장 전문가들의 살아있는 목소리, 허를 찌르는 일침이 담긴 깊이 있는 수업이 일주일간 이어졌다. 몇 달 쉬었다고 하루 종일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워크숍을 들으려니 쉽지가 않다. 두 손 가득 새로운 숙제들을 들고 가는 길. 어쩐지 지적 갈증을 채운 뿌듯함 보다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 가득 찬다.


 ‘도대체 피상적이 시선이 아닌 진정한 사업의 본질에 다가서려면 나는 아직도 몇 걸음을 올라서야 하는 걸까?’

싱숭생숭한 마음에 바로 집에 갈 수가 없어 근처 서점을 찾기 시작했다. 나는 마음에 위로를 얻고 싶을 때면 일차 응급처치로 책방을 찾는다. 답을 주는 책을 찾기 위해서 일수도 있겠고 어쩌면 가장 편안한 장소를 찾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시끌벅적한 대형서점보다 고요 속에 밀려드는 질문들을 가라앉힐 수 있는 개인적인 공간이면 좋겠다 싶었다. 평소 가고 싶었던 위시리스트 장소 중 한 곳이 눈길이 머문다. 사적인 서점  부제는 내 맘대로 책방지기님의 책제목인 '사적인 서점이지만 공공연하게- 한 사람만을 위한 서점'이라 해둔다.


망원동은 워낙 평소에 좋아하는 동네라 지리에 빠삭한데도 이곳은 처음이었다. 신기한 건  골목길 구석에 있지 않은데도 지도를 보고 가다 그냥 스쳐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발견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점이다. 마치 같은 시공간 속에 벽하나를 두고 공간이 숨어있는 느낌이랄까. 우선 지도앱에 영업 중이라 떠 있어도 닫혀있는 서점들이 워낙 많은지라 누가 있는지 빼꼼 안쪽을 들여다본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규모가 크지 않아 책방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서점의 중심에 놓인 널따란 테이블이다.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엔 다른 책방과는 달리 책방지기의 손길이 가득 묻어있는 책들이 가득하다. 신기하게도 대부분의 책들은 저자들의 글씨가 남아 있는 귀한 책들인데 책방지기가 연필로 써 내려간 밑줄과 주석들이 남겨져 있다. 그동안 방문한 독립서점에선 새책은 표지와 내부만 훑어보고 구매 후 읽어야 하는 암묵적인 약속들이 있었다. 워낙 적은 수의 책들이 들어오기도 하고 책방 수입을 위한 배려의 일환인데 여긴 판매용 책이 아니니 마음 졸이지 않고 편하게 읽어 내려갈 수 있다.

마치 누군가의 서재에 초대받은 것처럼 낯설지만 반갑게 이어지는 내적 대화가 이어진다. 그동안 책 추천 문구는 많이 봐왔지만 이렇게 같은 취향의 책을 읽으며 같은 생각의 지점에 머무는 경험은 흔치 않았다. 특히 책방 한편에 특별히 큐레이션 되어있는 '읽는 약국'엔 삶의 질문들에 대한 처방전으로 의미를 묻는 이에게 책 속의 답을 찾아주고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한 번쯤 가질법한 질문들에 맞춰 준비된 책을 가져가 읽을 수 있는데 여기선 누구나 자유롭게 나의 생각을 더할 수 있다.


연필을 들고 저자의 지혜에 같은 고민을 가진 사람들이 덧칠한 생각들에 무언가를 더한다. '좀 더 나은 내가 되고 싶은 당신에게'라는 라는 질문을 뽑아 들었던 한 권의 책은 저자와 제목도 없이 그렇게 나에게 다가와 울림 있는 통찰을 선사한다. 결제를 요청하니 계산대 옆에 따로 준비된 새 책을 찾아 준비해 주신다. 마침내 알게 된 책의 제목은 참으로 직관적이다.

 ‘배움에 관하여- 비판적 성찰의 일상화/ 강남순 지음'


서점이 닫을 때까지 아직 시간이 남아 그 자리에 앉아 더 가까이 책과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나에게 있어 그동안 배움은 정보 축적을 통한 지식충족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새로운 지식을 채웠다는 단편적인 기쁨에서 벗어나 스스로 인식의 한계를 깨달으며 진정한 배움이란 무엇인지 고민하는 지점까지 와있다는 것만으로도 불안은 어느새 작은 희망이 된다. 어느 오후 작은 책방으로의 초대속에 비판적 성찰로 또 하나의 내적성장을 만들어 나가는 나를 발견한다.

생명의 태어남은 그 반복성에도 불구하고 매번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한 사건이다. '나무 생명'만이 아니라 '나 생명'도 이렇듯 반복성과 고유성을 지닌 새로운 태어남을 매번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p.33

 

여러 책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다른 손님들이 찾아오지 않아 정말 오롯이 사적인 공간을 누릴 수 있었다. 책방지기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곧 서점을 파주로 이전할 계획이라고 알려주신다. 왜 이렇게 멋진 곳을 늦게야 알았을까 싶었지만 이 서점의 놀라운 공간성과 잠재력을 공감했기에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장소(Place)'는 고정되어 있지만 '공간(Space)'는 언제나 새롭게 창출되고 의미 부여가 이루어지면서 형성된다. 그렇기에 동일한 장소에 있다 해도 사람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p.67

고정된 성산동을 벗어나도 서점은 매일 새로운 이야기를 창출하고 형성할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 발걸음을 남기고 책방에 남겨진 타인의 흔적에 감응하며 저마다 다른 공간을 만들어 내리라 믿는다. 파주에서 시작되는 시즌4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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