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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y Jan 02. 2019

영화 소공녀를 보고

행복의 방정식은 유효한가

 엄마와 함께 집에서 영화 소공녀를 보았다. 부모님이 두 분 다 돌아가셔서 누구의 지원도 없이 홀로 서울에서 살아가는 미소라는 여성의 이야기다. 미소는 가사도우미로 일하며 생계를 꾸려나간다. 많은 욕구를 가진 보통의 영화 주인공과는 달리, 미소는 단지 세 가지만 있으면 만족하고 살아간다. 바로 담배와 술, 그리고  남자친구다. 이 세 가지는 미소에게 있어 의식주보다도 우선해서, 미소는 월세가 5만원 오르자 짐을  싸서 방을 빼고 추운 세상으로 나온다. 갈 곳 없는 미소는 대학 시절 함께 밴드부 활동을 했던 멤버들에게 차례로 연락해서 재워줄 것을 청한다. 멤버들은 미소에게 크게 세 부류의 반응을 보인다. 세상에 적응하지 않은 미소를 경멸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아픔을 드러내거나, 미소를 이용하려 하거나. 미소는 자신을 경멸한 이들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쏘아붙히지는 않지만 자신의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의연히 대처한다. 자신에게 숨겨왔던 아픔을 드러내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아픔을 덮어두고 그들을 보듬어준다. 자신을 이용하려한 사람들에게도 미소는 감사를 표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미소에게 자신이 그렇듯이, 미소가 삶의 이유인 남자친구는 학자금 대출 상환금과 미소와 살 집을 마련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난다. 미소는 남자친구에 대한 서운함에 그를 배신자라고 원망하지만, 그는 배신자가 아니다. 사회에 적응한 것일뿐. 그들은 이제 상상력을 발휘해 서로를 느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언젠가 학교 선배로부터 '행복의 방정식'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행복의 크기는 성취의 크기를 욕망의 크기로 나눈 것이라고 했다. 난 이 방정식이 추상적인 개념인 행복을 꽤 잘 설명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 방정식은 미소와 그녀의 남자친구 앞에서 무력해진다. 미소의 욕망은 크지 않다. 한 잔의 위스키와 담배, 사랑하는 사람과 그의 체온만 있다면, 미소에게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행복해지기 어렵다. 담배와 위스키 값은 올라가고, 최소한의 삶의 기반인 집의 월세도 오르며 남자친구는 저 멀리 떠나간다.                                                                                          나는 행복의 방정식은 주어진 것이고, 욕망과 성취라는 두 변수를 개인이 조절함으로써 행복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이 방정식이 개인의 인생에 있어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소와 남자친구, 아니 그 둘이 상징하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의 방정식은 적용되지 않는듯 하다. 사회는 똑같은 노력을 기울여도 같은 성취를 주지 않는다. 가사도우미라는 직업은 사회적인 인식이라는 기준하에서는 분명 천한 직업이다. 그 일에서 유능한 미소는 사회적으로 인정받기는커녕, 일자리가 항상 위태로운 불안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성취뿐이 아니다. 욕망이라는 변수도 미소의 통제하에서 벗어나 있는 것 같다.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욕망을 추구하는데도, 그 욕망이 미소의 의지와는 달리 자꾸만 커진다. 그것은 욕망이 크기가, 경제학적으로는 욕망의 수량과 가격을 곱한 것이기 때문이다. 욕망의 크기를 다르게 정의할 수도 있겠지만, 이미 벗어날 수 없는 굴레가 되어버린 자본주의 하에서 이것이 욕망의 크기를 가장 효과적으로 정의하는 방법이다. 미소가 가진 욕망의 수량은 3가지에 불과하지만, 그 가격이 상승하면서 미소의 욕망은 그 개인의 의지와는 달리 불어난다. 담배는 국민의 건강을 생각해준다는 온정적 간섭주의를 표방한 정부에 의해 가격이 올랐다. 술은 가게의 임대료가 상승하며 덩달아 비싸졌다. 이 둘의 변화 중 미소의 선택이나 의지가 개입된 변화는 없었다.

 미소는 대학 시절 함께 즐겁게 담배를 피우고 술을 처먹으며, 작은 자취방에서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던 친구들의 변화, 그들의 적응을 부러워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최소한 잘 곳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진정 미소보다 행복한가? 매일 잘 하지도 못하는 요리를 하며 속 앓이를 하고, 잘 먹지도 못해 스스로 링거를 놓고, 본래의 모습을 마치 중국의 전족 속에 눌러 담은 발처럼 변형시켜야 하는 이들은 자유롭지 않고, 따라서 진정으로 행복할 수 없다. 이 영화에서 나는 자유롭지만 궁핍하거나, 부자유스럽지만 조금 덜 궁핍하거나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강요당하는 이들의 비극을 본다.

 오이디푸스의 비극이 오이디푸스의 개인적인 악보다는 신탁에 의해 주어진 운명에 따른 것이어서 그 이야기를 보고 듣는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듯, 소공녀의 비극도 익히 알려진 행복의 방정식이 무력해지는 부조리를 통해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알 수 없는 공허함을 느끼게 한다. 과연 지금도 서울 시내 어딘가에서 부유하고 있을 미소들은 자유로우면서도 행복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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