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박카이브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정 Jul 11. 2024

악의

애쓰는밤 240628

1. 아빠와 친해 보인다는 오해를 종종 받는다. 아마도 내가 글이나 말로 풀어낸 아빠와의 대화에서 친밀감이 느껴져서겠지. 하지만 나는 아빠와 대화라는 걸 하지 않는 사람에 가깝다. 대화라는 건 소통이 되는 관계여야만 가능한 거니까. 아빠는 내게 주로 잔소리를 하고 나는 아빠에게 주로 농담을 한다. 예컨대 아빠가 "너는 도대체 언제 시집 갈래? 아빠 뿌린 거 거둘 수는 있게 해줘야 할 거 아냐"라고 말하면, 나는 "아빠가 뿌린 걸 왜 내 결혼식에서 거둬. 아빠가 장가 한 번 더 가면 되겠네."라고 답하는 식. 나는 아빠의 말에 진심으로 응할 생각이 없다. 그러려면 나는 아빠에게 "아빠가 나한테 보여준 결혼 생활을 한번 떠올려봐. 내가 결혼이 하고 싶겠어?"라고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 농담에는 악의가 있다.


2. 그럼에도 나는 아빠와 친한 것처럼 보이고 싶다. 아빠가 늘 말하는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란 사람인 척을 하고 싶은 것 같기도 하다. 사랑받고 자란 사람 코스프레. 그게 내가 하고 싶은 거다. 내가 자꾸만 아빠와의 일화를 포장하여 꺼내놓는 것은 사실 나의 악의다. 내 글에는, 내 모든 글에는 악의가 있다.


3. 아빠가 네 번째 수술을 받는 동안 나는 간병인을 자처해 동반 입원했다. 8일의 무급휴가를 사용했고 월급의 3분의 1이 날아갔다. 급여가 입금되었다. 거지 같다. 금액도 거지 같고, 기분도 거지 같다. 아빠가 종용한 일이 아님에도 나는 아빠에게 화풀이를 했다. 수술한 눈 좀 만지지 말라고, 유튜브 좀 그만 보라고, 또 담배 피우러 가냐고. 내 잔소리에도 악의가 있다.


4. 나는 아빠를 모른 체할 수 있었다. 엄마에게 그랬던 것처럼 차단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 내 몸 어딘가가 조금씩 썩어 들어가는 기분을 감내해야 하겠지만, 한번 해봤으니 두 번이라고 안될 리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지 않은 건 내가 꽤 괜찮은 어른으로 자랐음을 전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부모가 나를 방치한 것과 다르게 나는 그들을 책임질 줄 아는 성인이 되었다고, 내게는 희생을 감당할 수 있을만한 여유가 있다고 외치고 싶었다. 내가 기꺼이 아빠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는 이유는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다. 이런 거지 같은 집안에서 꽤 괜찮은 사람으로 성장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다는 걸 나만은 알아주기 위해서다. 그러려면 나는 죽을 때까지 꽤 괜찮은 사람이어야 한다. 그 부모의 그 자식이라는 말이,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는 말이 내게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려면 그래야 한다. 그래야 내 부모는 더 나쁜 사람이, 나는 더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다. 내 노력에도 악의가 있다.


5. 간병인 모드에서 빠져나오면 어김없이 생활 리듬이 와장창 깨져버린다. 이번에는 건강히 이겨내 봐야지 굳게 마음을 먹고 부단히 준비를 해두었는데도 그 모든 노력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부서졌다. 병원에 있는 내내 심한 몸살을 앓았다. 나보다 더 아픈 아빠 옆에서 오한과 고열의 새벽을 번갈아 보냈다. 퇴원 후에야 찾은 이비인후과에서는 목이 다 망가졌다고, 원래 말을 많이 하는 일을 하시냐고 물었다. 근래에 한 말이라곤 아빠 숨 크게 쉬어, 선생님 아빠 진통제 좀 놔주세요, 안약 넣을 시간이다, 밥 먹기 전에 이것부터 먹어, 혈압이 안 떨어지네, 혈당 오르니까 믹스커피는 먹지 마, 교수님 시력이 돌아올까요, 산재처리해야 해서 진료계획서 좀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실손 처리에 필요해서요, 우선 6개월 할부로 해주세요, 가 전부인데. 잠이 안 온다. 곧 다시 직장인이 되어야 하는데. 허공에 대고 화를 낸다. 천장에 부딪힌 한숨이 다시 돌아온다. 이번 선택도 나였다는 걸 알고 있다. 나는 지금 나를 학대하고 싶은가 보다. 내가 학대할 수 있는 건 나뿐이니까. 내 불면에도 악의가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명랑한 계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