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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okie Run Aug 16. 2020

회사의 기대치는 알겠는데, 제 기대치는요?

이것은 노동과 노력의 착취. 노오오오력의 배신이다.

좋은 대학 나왔으니 이제 남은 인생은 잘 풀리는 거죠? 

좋은 대학만 나오면 남은 인생은 탄탄대로 일 줄 알았다. 집안 모든 어른이 ‘SKY서성한’ 중 한 곳은 나온 집안. 대학에 가는 건 당연한 거였고, 집안의 이야깃거리는 '상위권 대학 중 어디를 가느냐'였다. 이 정도로 좋은 대학을 노래 부르는 걸 보면 좋은 대학만 나오면 나의 남은 인생은 탄탄대로일 것이 확실했다. 다른 걱정, 잡생각 말고 열심히 공부만 하면 인생은 저절로 풀리리라! 비록 나는 집안의 돌연변이여서 공부가 적성에 안 맞았지만, 눈물 콧물 흘리면서 열심히 공부했고, 결국 좋은 대학을 나왔다. 


그런데 지난날들의 노력이 나를 계속 배신하는 것만 같다.


좋은 대학을 나왔는데 직장 하나 구하기가 어려웠다.

분명 좋은 대학을 졸업했는데 해마다 '역대 최악' 기록을 찍는 청년 실업자 통계에 포함되었다. 이곳저곳에 지원하는데도 서류 광탈부터 시작해 겨우 서류를 통과했다 싶으면 면접에서 떨어졌다. 졸업 후 인턴 자리 하나를 구하는 데까지만 장장 1년이 걸렸다. 인턴으로 6개월 간 일한 후, 몇 개월 뒤 정규직 자리를 제안받았다.


직장을 구했으니 이제 열심히 하면 되겠다 싶었는데 1.5년 만에 정리 해고당했다.

첫 번째 직장은 빠른 성장을 요구하는 곳이었고, 기대에 부응하려 빨리 성장하기 위해 노력했다. 퇴근 후에도 업무 관련 서적을 읽고, 보고서 작성 연습도 하고, 업무를 더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엑셀도 더 공부했다. 그 결과, 회사에서 한국 사업을 접기로 결정했다는 통보와 함께 정규직으로 일한 지 1.5년 만에 정리 해고당했다...?


총 2년의 경력일지라도 난 분명 더 성장하고 발전했는데, 이직할 때 연봉은 제자리걸음을 했다.

동종업계 두 번째 회사에 육아휴직을 대체하는 계약직 자리가 나와 이직을 했는데, 연봉이 조금 깎였다. 어쩔 수 없다고, 경력 끊김 없이 1년 더 일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며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 회사에서는 일을 잘 해내도 대우받기는 커녕 쓰다 버릴 기계부품 취급을 받았지만, '위기를 기회로! 실력을 쌓아 네놈들 보다 더 좋은 직장에 대우받으며 가겠다'며 이를 악물고 일하며 퇴근 후에도 업무 관련 추가 학습을 했다. 그렇게 계약직으로 1년을 근무한 후, 동종업계의 세 번째 회사에 연봉을 높여 갔다.


연봉은 높여갔지만, 회사가 헬이었다. 

세 번째 회사는 그야말로 지옥 같았다. 전문성과 인간미를 겸비한 이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알려졌던 세 번째 회사. 하지만 이는 모두 과거의 일이었을 뿐, 몇 년 전 회사가 M&A를 하며 많은 변화가 생겼고, 전문성과 인간미를 겸비한 이들은 이미 퇴사했다. 이제 더는 전문성도, 인간미도 안 남은 회사였다. 두 달 만에 도망치듯 나왔다.


네 번째 회사로의 이직, 29살에 과장 직급을 달았다. 

이제야 지난날의 노력을 보상받고 인생이 술술 풀리는 건가? 회사 내에서 내 나이 또래는 이제 막 대리를 달았지만, 나는 회사 내 최연소로 과장 직급을 달았다. 


하지만 밥 사달라고 하지 마세요..ㅠ 애석하게도 내게 과장 직급은 의미가 없다. 연봉이 두 번째 회사에 그대로 맞춰졌으니. 어느 대학, OO 업계 출신이라고 좋아하면서, '막 굴려도 되겠네'라고 농담 섞인 진담을 하면서, 연봉을 단 한 푼도 높여주지 않았다. 아니, 최소한 물가상승률 정도라도 인상해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 


처음에는 그저 회사의 연봉 테이블이 낮고 지급 능력이 낮아 나의 이전 연봉 수준에 맞춰주었고, 그게 이 회사의 최선이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들어와서 보니 그게 아니었다. 회사에는 제대로 된 연봉 테이블이 없고, 내게 더 높은 연봉을 줄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과거 수준에 맞춰 동일하게 책정한 거였다.


너무하다 생각하며 매니저와의 면담 시 얘기를 꺼냈더니 매니저 왈, 연봉 책정 시 연차와 나이를 봤다고 한다. (아니, 그럼 직급 책정 시에도 연차와 나이를 보시지 왜..?) 이야기를 더 해보니 매니저는 직급은 능력과 연계시키는 신세대 기준을, 연봉은 연차 및 나이와 연계시키는 구세대 기준을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아... 그건 잘못된 조합의 결정체입니다만. ㅠ 애석하게도 매니저는 여기에서 무엇이 문제인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좋은 대학 나왔으니, 빡센 업계 출신이니, 과장 직급을 달아줬으니 열심히, 잘해주기를 바라는 기대치만을 내게 전달할 뿐이다. 업무 기대 수준 및 책임은 이~~~ 만큼인데 연봉은 요따만큼이라니요..ㅠ


그러면 제 기대치에는 관심 없으신 거죠연봉만큼의 노력과 열정을 보여드리면 될까요? 

내게 연봉의 비교 기준은 회사 내 형평성 외에도 나의 과거 연봉 수준, 그리고 나와 같은 대학을 나왔거나 동종 업계에 있던 주변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다. 5년 차임에도 연봉은 신입사원 시절에 맞춰진 수준이고, 내 주변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도 연봉이 낮은 편이다. 첫 회사에서 갑작스럽게 나오게 되었어도 당시 다른 동료들은 이직 시 연봉을 높여서 갔다. 하지만 내가 면접 본 회사들은 내 연봉을 그저 맞춰주거나 깎으려고만 해왔다. 연봉은 비단 능력뿐만이 아니라 운도 따라야 하는데, 나는 운이 지지리 없던 거다.


사기업이어도 과장 직급을 달아봤자 연봉이 연차와 나이에 맞게 책정된다면, 매해 성과와 관계없이 모두에게 동일한 연봉 인상률이 적용되고 인센티브마저도 없다면, 일을 설렁설렁 해도 평가 때 좀 쓴소리 듣고 털어내면 그만 아닌가? (라고 생각하지만 떨쳐버릴 수 없는 노예근성을 갖고 있다. 이런 내가 싫다.) 회사에서 일을 잘한다고 인정받아도 내 나이가 연봉의 발목을 잡는데, 더 이상의 노력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고, 점점 일할 맛을 잃어간다. 


이건 노오오오력의 연이은 배신이다.

좋은 대학을 나와봤자, 일을 더 잘하고 성장하려 발버둥 쳐봤자, 4년 넘게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작고 귀여운 내 연봉. 일자리 하나 구하기도 쉽지 않았고, 막상 일자리를 구해도 회사에서 정리해고되기도 했고, 이상한 회사에 갔다가 도망치듯 나오는 등 온갖 풍파를 맞은 지난 5년. 


경력 2년 차에 정리해고되었던 것부터 시작해 연이어 풀리지 않던 회사들과의 인연이 나의 책임이라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직 시 연봉을 높이는 데 적극적으로 임하지 못했던 것도 있다. 


내 주변 친구들과 과거 회사 동료들은 계속 앞으로 달려 나아가고 있는데 나만 거북이걸음으로 더디게 기어가는 것만 같다. 연봉이 전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예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노력과 실력에 운이 더해져야 하는데 그놈의 운은 대체 언제 따라올까? 


이직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지난 5년 간은 고용안정성이 보장되지 않아 매번 회사에 들어갈 기회가 있다면 무너지는 징검다리를 재빠르게 건너가듯 선택권 없이 얼른 가야만 했다. 하지만 이제 이직의 선택은 온전히 내게 있다고 느껴진다.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에 대한 불평불만을 늘어놓았지만, 사실 '나이에 맞춘' 낮은 연봉을 빼면 괜찮은 회사다. 연봉과 커리어에 대한 욕심만 없다면 평생직장으로 고려했을 회사일만큼. 코로나 19 사태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회사임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직원들을 내보낸다는 논의조차 없는, 직원들을 중시하는 회사다. 직원들의 교육/개발에도 신경 쓰고, 비록 이곳저곳 크고 작은 구멍이 있지만 더 나은 회사를 만들기 위한 고민을 하는 곳이다. 게다가 이 정도면 워라밸도 잘 지켜진다 (갑작스럽게 누군가의 업무를 도와주게 될 때면 간간히 저녁 10시 넘어 퇴근하고, 분기별로 한 번씩 새벽 2시에서 6시 사이에 퇴근하기도 했으나... 내 과거 회사들을 보면 이 정도의 야근이면 양호한 편이다). 나이로 기싸움을 하려는 팀원들의 모습이 간간히 보이긴 해도 그 정도면 넘길 수 있는 수준이고, 성과에 대해 잘했다고 인정해줄 줄 아는 상사가 있는, 이 정도면 크게 모나지 않은, 착하고 무난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하지만 나는 이직을 준비할테다. 워라밸도 잘 지켜지고 여러모로 편하게 다닐 수 있는 회사지만, 아직은 바쁘게 일하며 성장과 연봉에 대한 욕심을 더 부려도 될만한 나이라고 생각한다. 업무에 대해 더 치열하게 고민해보며, 때로는 부딪히기도 하며, 적합한 대우를 받으며.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노동시장이 얼어붙었다고는 하지만, 간간히 이직 기회 관련 연락을 받고 있다. 최근까지만 해도 이번 회사에서 경력 1년은 채워야 하지 않겠냐며 연봉, 조직문화, 안정성 중 그 무엇 하나 아쉬운 게 없을 정말 괜찮은 회사마저도 거절했는데, 이제는 거절하지 않으려 한다. 좋은 기회가 들어온다면 잡을테다. 이직 제안을 받으면 내가 원하는 커리어를 쌓아갈 수 있는 곳인지, 조직문화가 나와 맞는 곳인지, 연봉을 바겐세일에서 할인이라도 하려듯 깎으려는 게 아니라, 대우를 해주는 곳인지 등을 여유롭게, 종합적으로 판단을 한 후 알맞는 회사를 찾았다 싶을 때 이직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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