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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텔라 Nov 17. 2023

운전 가르쳐준 여자

여백서원을 다녀와서

갈망은 꽤 많은 얼굴로 나타나더니 이윽고 현실이 되어 돌아온다.


구하면 찾아진다고 했다.

두드리면 열린다고도 했다.

모르던 그녀에서 아는 그녀가 되더니

만나고 싶던 그녀에서 만났던 그녀가 되었다.

생각하지 못했던 것에서 생각하게 된 그것으로 넘어가게 되었으니

많은 것이 찾아졌고 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야기가 되었다.


인생 통틀어 어느 순간으로 돌아갈 건가 물으면 지금이라 말할 확률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앞으로 이 생각들이 갱신되길 바라나 지금까지는 그렇다. 오감을 들어 썼던 그간의 경험은 어설프나마 육감을 만들고 그 육감은 점점 믿을 만한 것이 되어가고 있다.


차곡 내 지향의 밥들이 쌓인다.

밥을 짓는 시간과 수고가 밥 안에 있고 그 밥을 먹고 힘을 낸다. 힘을 내서 또 지향이 있는 길을 걷고, 걷는 시간들이 쌓이고 있다.

이 힘은 연속되고 지속될 것으로 믿게 되었다.






그녀를 만난 것은 우연히 tv에 방영된 다큐멘터리를 통해서였다. 그때는 그녀가 독일 바이마르 괴테학회 괴테 금메달 수상자였는지, 서울대 독어 독문과 교수님이었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정원에서 허리 구부정하게 풀을 매고 꽃을 심는 정감 어린 모습에 매료되었을 뿐이었다.


"인간 모든 실족의 이유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서게 하는 힘은 사랑"이라고 말하는 그녀를 tv 너머로 바라보며 울먹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두고두고 밭 매는 모습을 보기만 하여도 큰 위로를 받지 싶어 이 할머니를 인터넷에서 찾기 시작하였고 밭 매는 일을 능가하는 그녀의 화려한 이력을 알아버리고 말았다.


괴테 할머니 tv 그리고 그녀.

그녀는 무서울 만큼 숱한 시련을 이겨낸 노학자였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많은 번역서와 저서를 삶의 흔적으로 말하는 그녀였다. 사람들에게 무엇을 전하고 싶은지 알면 알수록 깊이 들어와 버리는 특별한 할머니였다.


그렇게 좋아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헤르만 헤세. 몇 번이고 읽었던 민음사판 데미안이 그녀의 번역이었던 것도 그제야 알아차렸다. 모르고 지나간 것 투성이었다. 모르고 지나간 것 중에 내가 정말 사랑하던 것이 함께였다는 것도 기적적인 기쁨을 선사했고 말이다.


주최 측의 농간이든 엿장수 마음대로든 어떤 평가에서도 자유롭고 싶은, 나는 책방지기다.

우리 책 모임 다섯 개 중 성격에 맞는 세 개 모임에서 그녀의 책과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기 시작했다. 그녀를 안 이상 읽지 않을 수 없었고 혼자 읽을 수 없었고 혼자 느낄 수 없어 작정한 일이다. 


내가 느낀 것을 함께 할 수 있도록 하는 일! 나의 작정이 다 옳지는 않겠지만 옳다 그르다를 떠나 저마다 관계 속에 "원칙적인 힘"은 분명 있는 것!

내 삶을 통해 그것을 그리는 유일한 방법은 함께 책을 읽는 일, 함께이지만 개별의 지향을 찾아들어가는 일, 그리고 그것을 충분히 느끼는 일이 아닐까.

책방에서 파우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어려운 책에 대한 거부감을 가진 많은 회원을 포기하는 일이기도 하다.

나 딴에는 작은 모험이기도 했으나 그녀를 비롯하여 얻어낸 물음!

'무엇이 옳은가?'

 어떤 소명으로 일해야 하는가?



그렇게 노학자 할머니가 놔주신 다리를 건너 노학자 파우스트의 고뇌를 받아 들고 그 고뇌의 끝에 나의 고뇌와 사람들의 고뇌를 함께 연결하기에 이르렀다.

예전에 읽었던 파우스트는 순 겉핥기였다. 이번에 책모임 샘들과 읽었던 파우스트는 한참 달랐다. 내 삶에 국한된 임시적 해답이 내 삶을 넘어버리기도 했다. 나의 지향과 더불어 인류가 바라보아야 할 지향이라는 것 즉 "어른의 언어"를 알게 되었다고 하면 너무 추상적인가. 타인도 읽기에 가능한 언어를 만들기 위해 그녀는 얼마나 고통스러워야 했을까.


목표, 선호, 노력과 구별된 "지향"


내게 그 말을 가르쳐준 어른.


지향이 있는 방황은 기꺼이 껴안아라! 끊임없이 말하는 할머니.

궁극의 사랑을 물개 박수와 사람을 껴안는 품으로 가르쳐준 이.

계산하거나 비교하지 않고 낸 "길"이 옳았다고 말해 준 선생님.

노력 외에 무엇이 필요하냐는 질문에 "꾸준함"을 답하는 여자

내가 살아있는 것은 어떤 것인지 설명해 내도록 한 사람


올바른 목적에 이르는 길은 그 어느 구간에서든 바르다


나는 꿈처럼 소망했다.

이 책을 다 읽고 열심히 생각한 후에 만나지는 그녀와의 그날을 상상했다.

책방을 하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함께하여 배가할 기쁨을 그리는 것이었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지향에 "함께"를 새겨 넣는 일.

나는 더욱 그녀의 언어를 열심히 해독하기에 힘썼다. 턱없이 부족하겠으나 공부하지 않고 수고하지 않은 채 그녀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인생 수고값 백만분 천만분의 1이라도 내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난 다음, 그런 후에 그녀의 눈을 쳐다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다시 주춤한 생각들로 흔들릴 때 나를 잡아준 것은 파우스트의 입을 빌려 끊임없이 말한 괴테의 언어였고 그 언어를 다시 내게 체험하도록 만든 이, 바로 그녀, 할머니 교수님, 아니 아픈 나무를 돌보는 정원 할머니, 사람을 섬기는 자칭 7인분 노비였다.






삶 가운데 자신에게 유독 독보적이고 유일하게 다가오는 것만 같은 에너지가 있다.

그 기회는 우연으로 오고 우연은 필연으로 만들어진다.

더욱 절절한 필연으로 만들지에 대한 선택은 자신의 몫이다.






내 인생길을 달릴 자동차 기계장치가 오작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때마침 그녀가 와서 고장 난 자동차의 기계장치를 고쳐주더니 핸들은 어느 각도로 돌려 꺾을지를 면밀히 가르쳐 주었다.


브레이크는 어떨 때 밟는 건지, 엘셀레이터는 어떤 세기로 밟을지도 다정하고 눈물겹게 가르쳐 주었다.



2023년 10월 28일 토요일 책방에서 함께 출발한 33명의 인연들과 여백서원을 다녀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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