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t in peace
나는 학생 시절에 신기하게도 선생님들에게 늘 신뢰와 예쁨 받던 쪽에 가까웠는데 솔직히 아직도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왜인지 궁금하기는 하다. 그런 학창 시절을 보내며 소위 말하는 선생님에게 찍히는 것과는 거리가 매우 멀었는데 그런 내가 처음으로 선생님한테 찍힐 뻔한 일이 발생한다.
때는 중학생이 되고 1학년 첫 기말고사였는데 영어 시험 문제 중 하나가 답이 중복으로 처리되어야 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중 하나만 정답으로 처리가 되었는데 왜 다른 하나는 정답이 안 되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고 왜 답으로 처리가 안 되는지 순전하게 궁금하던 마음에 그 설명을 듣고 싶었다.
학교 선생님께 시험 문제의 답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건 나름 큰 사안이라고 생각되었던지라 여쭤보기 전에 혹시라도 내가 문제를 잘못 이해했나 싶어서 영문학을 가르치시는 아는 미국인 교수님께 먼저 문제에 관해서 여쭤봤는데 문제가 잘못 나왔으며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중복이어야 하고 만약 하나만 답으로 처리가 된다면 둘 중 내가 고른 답이 정답에 더 가깝다고 하셨다.
그렇게 질문을 하기 전에 나름의 확인을 받고 확신을 가지고 문제에 대해서 질문을 하러 교무실을 찾았는데 우리 반 담당 영어 선생님이 자리에 안 계셔서 나중에 여쭤볼 생각으로 교무실을 나서려는 내게 영어 시험지를 들고 있는 걸 본 다른 반을 담당하는 남자 영어 선생님이 교무실에 왜 왔냐고 시험지에 무슨 문제가 있냐고 여쭤보셨다.
그래서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가 잠시 당황하시더니 그렇게 잘 알면 네가 선생 하라는 말과 함께 교무실의 선생님들이 모두 다 쳐다보고 그만하라고 선생님을 말리실 정도로 정말 호되게 혼이 났다.
교무실 복도 밖까지 쩌렁쩌렁 들릴 정도로 크게 혼나는 와중 내 담당 영어 선생님이 마침 교무실에 들르셨다가 상황도 모르는 채로 왜 얘한테 화를 내시냐고 나를 무조건 감싸주셨던 기억이 있다.
우리 반 담당 영어 선생님은 키도 덩치도 작고 또 목소리도 작으신 중년의 여자 선생님이었는데 순해 보이는 인상이라 남녀 할 거 없이 많은 학생들이 꽤나 무례하게 굴고 무시하는 분이었는데 아마 내가 선생님께 단 한 번도 무례하게 굴지 않았던 게 컸던 거 같다.
내 담당 영어 선생님이 그만하시라고 하고 나에게는 교실로 돌아가라고 하셔서 그렇게 수확 없이 교실로 돌아온 그날 점심시간이 시작될 때쯤 남자 선생님네 반 학생에게서 점심 다 먹고 선생님이 교무실로 오라고 했다는.. 그렇게 말로만 듣던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무시무시한 교무실 호출을 받았다.
공포의 교무실 호출에 점심 따위 목에 넘어갈 리가 없다.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는 마음으로 바로 교무실로 갔으나 점심시간이 막 시작된 후라 그런지 선생님은 교무실에 안 계시고..
그렇게 긴장되고 체할 거 같은 기분으로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다가 교무실 앞에 갔는데 막상 선생님이 보이니 들어가기가 어찌나 무서운지.. 몇 번이나 고민하며 쭈뼛쭈뼛하다가 교무실 문을 두드리고 선생님께 갔다.
이전에 너무 호되게 혼난지라 무서웠던 마음에 또 어떤 불호령이 떨어질까 싶어서 잔뜩 긴장하고 있던 차에 갑자기 선생님은 아까 소리 지른 거에 대해 내게 사과를 하시고 답은 같이 알아보자는 식의 생각도 못한 대답에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있다.
선생님의 사과를 받아본 게 아마 난생처음이었던 거 같고 아마도 마지막이었던 거 같다.
내 담당 영어 선생님이 말씀을 드려서 사과를 하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심하게 화내신 것에 대한 사과를 받았고 답은 결국 중복 처리 되지 않아서 내 1학년 첫 기말고사 영어 시험은 1개 틀린 걸로 처리가 되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이후의 설명도 없었는데 아마 나중에 답이 중복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셨으나 의문을 제기하는 다른 학생들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당시에는 만점 나올 수 있었던 걸 하나 틀려서 좀 억울한 마음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이미 나온 성적이 다시 중복 처리가 되면 일이 복잡해지고 나 혼자 질문을 했으니 이해가 가는 바이다.
그러고 나서 1달쯤 후에 엄마가 학부모 모임에 나가셨는데 1학년 ㅇㅇㅇ 엄마라고 소개하니 선생님께서 멀리서 반대편에 계시다가 갑자기 한걸음에 달려오셔서 ㅇ반 ㅇㅇㅇ 어머니 맞으시냐고 너무 만나 뵙고 싶었다고 하시며 나를 너무 좋게 보고 있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너무 의문스러운 마음에 엄마한테 선생님의 생김새와 이름을 여러 번이나 확인을 받았는데도 선생님이 맞으셨다.
학교에는 세 분의 영어 선생님 중 두 분은 여자분이시고 키 크고 안경 끼고 늘씬하시고 실크 양복 정장에 넥타이 차림의 서른 중반의 남자 영어 선생님은 그분밖에 안 계셨으니
엄마도 내가 시험 문제 때문에 교무실에 갔다가 다른 반 담당 남자 영어선생님께 혼난 사실에 대해서 알고 계셨던지라 선생님의 인사에 얼떨떨하셨고 왜 그 선생님이 너를 좋게 봤다고 하시는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1학년 동안 그 선생님과 직접적으로 마주친 건 그게 전부였고 첫 만남부터 호되게 혼이 났는지라 인사치레였는지는 몰라도 아직도 나를 왜 좋게 보셨다고 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한 해가 지나고 2학년이 되었다. 좋게 보셨든 어쨌든 첫 만남부터 혼이 났으니 내 입장에서는 혹시라도 찍혔을까 싶어서 불편했던지라 그 선생님이 내 영어 선생님이 되지 않기를 바랐지만 그런 바람은 원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선생님이 나의 2학년 영어 선생님이 되신다는 얘기에 걱정도 했고 날 기억하지 못하시기를 바랐으나 2학년 첫날 나를 보자마자 ㅇㅇㅇ이 내 반이네?라고 하시며 그날의 길을 기억하고 계심을 확인시켜 주셨다.
그래서 꽤나 피곤한 1년이 될 거라고 생각했으나 이상하게도 선생님의 신뢰를 받았고 학년에서 5명 뽑히는 영어 경시대회반에 내 이름을 집어넣은 것도 선생님이셨다.
수업 중에는 늘 열정이 넘치셨으며 시험이 끝난 후 수업 시간에는 이제 중학생 정도 됐으면 팝송 하나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냐며 팝송 하나를 뽑아서 틀어주시며 가사를 프린트해서 반 학생들에게 알려주시고 가사 해석을 시키셨는데 그 노래가 바로 스티비 원더의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였다.
그렇게 선생님과 함께 기억된 그 노래를 가끔씩 우연히 듣게 될 때마다 선생님 생각이 났었다.
하지만 담임 선생님도 아니셨던지라 찾아뵙기도 그렇고 그저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한 번 뵙고 싶다는 정도의 마음을 가지고 누구나 그렇듯 가끔 생각 정도하며 잊고 지내던 와중 오랜만에 만난 중학교 동창이자 아직도 연락하고 지내고 부모님 두 분 모두 교직에 계시는 친구에게서 선생님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약 11년 전쯤 당시 뉴스에 꽤 크게 나왔던 사건이었는데 시험 문제 유출 의혹으로 선생님이 수사선상에 올랐다가 억울하다 결백하다는 등의 메모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고 한다.
내가 가끔 생각하는 선생님들 중 한 분이고 늘 밝고 열정이 넘쳤던 분이 그런 선택을 하셨다는 사실이 너무 충격적이었던지라 동창 친구들에게 부고 소식을 전했는데 우리가 기억하는 선생님은 절대 그러실 거 같은 분이 아니시기에 다들 놀랐던 기억이 있다.
내가 살면서 만난 사람들 중 본인 직업에 대한 열정과 자부심이 가장 엄청나던 분이신지라 억울하게 가신 거 같아서 안타까우면서도 선생님 성격 생각하면 아마 그런 일에 휘말린 자체가 못 견디게 힘드셨을 거 같아서 한편으로는 그런 선택이 이해가 되면서도 너무 안타깝다.
아직도 종종 마지막 가시는 길이 너무 힘들지 않으셨기를 바라는 마음인데 오랜만에 우연히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 노래를 듣고 써 보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