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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케이 Jun 05. 2019

#1. 행복 총량의 법칙

우연한 마주침이 내게 남긴 흔적들.

 우리는 종종 뉴스 기사에서 주변인의 당첨된 로또 복권을 훔치거나 전 연인의 로또 당첨금을 나눠달라고 소송을 거는 일들을 심심치 않게 접한다. 그들은 주변의 행복(로또 당첨을 행복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면)이 얼마간 자신에게 올 수 있었던 행복을 가져갔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질투심을 이기지 못한 행동을 했으리라.

 나는 행복 총량의 법칙(일반적으로 한 사람이 평생에 걸쳐 겪는 행복, 불행은 총량이 정해져 있다는 법칙)이란 한 인간의 삶에 적용된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적용되어 있다는 생각에 빠져있던 날들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제로섬(zero-sum)게임을 하듯이 누군가가 높은 등수를 가져가면 누군가는 낮은 등수를 가져가야 했고 그것이 곧 행복으로 연결될 거라는 생각을 했으니까. 그렇게 경쟁 사회에 익숙한 우리들은 행복이란 재화를 두고 경합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시스템에서 벗어나기는 얼마간의 용기가 필요할지 나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었기에 나는 철저한 시스템의 순응자로 살아갔다. 누군가의 행복을 시기했고 누군가의 불행에 안도감을 느꼈다. 남들의 불행을 바란 것은 아니나 TV에 나오는 불우한 사람들을 보며 나의 상황에 안도감을 느꼈다. 의식 저변에는 저들이 가져간 불행만큼 나에게 불행이 찾아올 확률이 줄어들었을 것만 같았고 저들의 행복이 내가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나눠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면 조급함이 들었다.

 누군가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고 누군가의 슬픔이 나의 슬픔이 되는 그런 일에는 미숙했다. 항상 타인과의 경쟁만을 부추기던 사회는 타인과의 공생을 가르치지는 않았다. 타인을 이해하는 작업은 지루하고 불필요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세상에 행복의 총량은 정해져 있었으니 말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굉장히 지치는 일이다. 항상 남들과의 비교를 끊임없이 해야 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타인은 회색빛으로 엑스트라가 되었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의식하고 상대해야만 하는 대상으로 규정되어버렸다. 모두가 적이 되는 삶 속에서 피로감을 이겨내기가 힘이 들었다.

 지쳐가던 나의 마음에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이유는 타인을 이해하게 된다면 이 지난한 싸움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탈출구가 될 것 같았다. 부모, 형제, 친구, 연인 구분할 것 없이 나의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아픔을 이야기하는 친구를, 당신네 자식들에게 많은 걸 해주지 못한 미안함을, 자신이 얼마큼의 성취감을 맛보았는지 이야기하는 그들을 이해하고 싶었다. 나는 그들의 슬픔과 행복을 온전하게 이해하길 바랐다.

 하지만 너무 많은 감정의 형태들은 내가 가진 틀의 형태에 맞지 않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네모난 감정은 세모난 틀을 통과하지 못했다.

 나는 어떠한 표정으로 어떤 말을 꺼내야 했을까? 상대방의 행복을 나의 일처럼 기뻐하는 모습으로 축하해주면 혹시 가식적이라고 생각할까 걱정이 앞섰다. 상대의 아픔을 마주할 때면 나의 가식적인 말이 상대의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깊은 상처에 생채기를 낼까 두려웠다. 내가 내뱉는 말이 배설이 될까 두려웠기에 나는 어떤 말을 선택해야 할지를 고민했는데 이럴 때면

“죄송합니다. 제 마음에는 네모난 감정에 대한 출력 값이 등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상대는
“아… 실례했습니다. 네모난 틀을 가진 분을 찾아볼게요”
라는 어처구니없는 상상마저 했었다.

 그러다 정말 특별할 것 없는 마주침을 겪었다. 어느 날, 나는 부끄러움도 신경쓰지 않으며 눈물을 쏟아냈던 적이 있다. 눈물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흘러내렸다. 나는 혼자 앓던 이야기를 친구에게 얘기하면서 감정이 복받쳤던 것 같다. 입 밖으로 나오는 말들은 인간의 언어체계라기보다는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너무나 간절하게 위로받고 싶었고 나의 슬픔을 어루만져주길 원했다. 나에겐 다른 이의 체온이 필요했다. 친구는 내 이야기에 조용히 내 어깨를 토닥여주며 별말 아닌 이야기를 건넸던 거로 기억한다. 친구가 뭐라고 이야기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말주변이 화려하지 않은 그 친구는 아마 꾸미지 않은 말들을 담담하게 말했던 것 같다. 하지만 친구가 내 어깨에 올렸던 손의 온기는 아직도 또렷하다. 투박하고 서투르지만 따뜻한 떨림이, 그 온기가 나를 데워주었다.

 이제는 옅어진 상처는 그 자리가 잘 아물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 당시 나의 슬픔은 내 친구에게 나뉘었고 친구는 나와 함께 아파했다. 내 친구는 아마 정확하게 나의 아픔을 이해하진 못했을 것이다. 친구가 겪지 않은 일이었고 전적으로 당사자가 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분명 그는 같이 아파했다. 놀랍게도 우린 다른 감정의 틀을 가지고서 슬픔을 나눠 가졌다. 우연한 교감, 설령 그것이 오해에서 비롯된 이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서로를 온전하게 이해해야만 상대의 감정에 닿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공감할 수 있다. 상대의 감정이 나의 감정이 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만약 내가 네모난 감정에 대한 출력 값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치부하고 타인을 이해하길 거부했다면 아직도 어디선가 누군가의 행복을 시기하고 누군가의 불행에 안도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느끼는 행복이 내가 가져가야 했을 행복이라 생각했을 테니까.

 이제 나는 “내 일처럼 기뻐한다.”는 말의 실존을 알기에 타인의 행복에 혹여나 나의 반응이 가식적으로 보일까 하는 걱정은 하지 않게 되었다.

 만약 당신 주변 사람이 행복에 당첨된다면 그걸 시기하지 말고 내 일처럼 축하해주자. 신기하게도 그 당첨금이 나에게도 똑같이 전달될 것이다. 심지어 행복 당첨금은 공유해도 줄어들지 않는다. 모두가 1등에 당첨될 수 있다.

 반대로 당신이 불행에 당첨되거나 주변 사람이 불행에 당첨되어도 걱정할 것 없다. 서로의 온기가 닿을 수 있게 안아주자. 그럼 놀랍게도 불행은 잘게 나누어져 많은 사람이 함께 짊어질수록 0에 수렴할 것이다.


 나는 간절히 바란다. 당신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 되기를, 당신의 불행을 나눠 짊어질 수 있기를. 우리에겐 누군가를 안고 체온을 나눌 수 있는 팔이 있으니.

 다행이다. 행복의 총량은 무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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