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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여진 Feb 23. 2022

조앤 디디온의 초상

호기심 많은 방관자의 자세로



신부는 포드수아 작물로 지은 길고 흰 드레스를 입고 스테파노티스로 띠를 두른 스위트하트 로즈 샤워 부케를 들었다. 작은 진주가 알알이 박힌 왕관이 헛된 환상의 베일을 고정했다.” (pg.50)


미스 바에즈는,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아무리 진부하고 피상적이라 해도 그녀 자신이나 다른 누군가의 청소년기가 갖는 무구함과 격동과 외경의 능력을 잃지 않으려 애쓴다. … 아마도 이제는 나이가 들었기 때문이겠지만, 미스 바에즈는 자신이 무수한 추종자들에게 아름답고 진실도힌 모든 것을 표상한다는 사실에 간혹 심란해질 때가 있다.” (pg.89)


마이클 라스키라는 사람을 이해하려면 그런 류의 강박에 호감을 가져야 한다.” pg.94


나 역시 두려움이라면 제법 아는 사람이거니와, 어떤 사람들이 공허를 채우기 위해 애써 만들어내는 정교한 체제들의 가치를 안다. 알코올이나 헤로인이나 색정처럼 접근성이 좋은 것이든 신이나 역사에 대한 믿음처럼 얻기 힘든 것이든 그런 사람들의 아편이 얼마나 값진지 안다. … 마이클 라스키가 선택한 아편은 역사다.” (pg.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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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로 ‘조앤 디디온의 초상’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그 직후, 조앤 디디온의 “뉴저널리즘” 문체로 담긴 책들을 찾아봤다. 도서 ‘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는 그녀의 저널 여러 편들이 한데 묶여 있는 책이다. 제목의 뜻은 책 앞부분에 적힌 인용 시와 관련된 것 같았는데, 아쉽게도 해독에 실패했다. 책을 사기 전에 읽은 리뷰 중에 ‘엮은이가 어렵게 번역하여 잘 읽히지 않는다’는 문장이 급격하게 와닿았지만, 다행히 그녀가 직접쓴 저널들은 아주 위트있게, 무게감 또한 있게, 자연스럽게 이해되면서 읽혔다.


그런 문장들 중 괜시리 샤프로 밑줄 친 것들을 바로 위에 써놓았다. 저 위의 문장들로 조앤 디디온을 설명할 수 있을 듯하다. 조앤 디디온을 포털에 치면 ‘뉴저널리즘의 기수’, ‘뉴저널리즘을 이끈 몇 없는 여작가’ 등등으로 소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참고로, 뉴저널리즘은 전통적 보도 기법에 문학적 묘사와 일인칭 시점을 결합해 소설처럼 읽히는 새로운 형식의 저널리즘을 일컫는다. 출처는 서울신문, 조앤 디디온 타계 직후의 기사.) 그 말은 곧, 조앤 디디온이 취재할 대상과 개인적인 연관을 맺어, 그 대상의 행동을 글로 써내려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위의 문장들을 보면 ‘어떻게’ (소위 말하는 ‘어떤 스타일로’) 대상을 글에서 표현했는지 직접적으로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 책을 읽으며 느꼈던 바로는, 그녀가 꽤나 호기심 많고-, 세상에 애정이 많으며-, 객관적이지만 주관이 뚜렷한-, 그런 작가였다는 것이다. 비폭력주의자, 혁명가, 범죄자 등 상당히 스펙트럼 넓은 대상을 만나면서, 글 속에는 어떠한 비판이나 칭찬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의 글 속에서는 누구도 영웅이 아니었고, 누구도 사과문을 강요당하지 않았다.


조앤 디디온이라고 해서 선입견이 없진 않았을 것이다. 마이클 라스키(마르크스-레닌주의 노선 혁명가이다.)에 대해서 말할 때,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칭하면서 “두려움의 감각이 너무나 날카로워 극단과 실패가 예정된 헌신에 경도되는 사람들”이라고 덧붙인 걸 보면 말이다. 마이클 라스키가 공적으로 기재되기 시작할 무렵에 그가 두려움의 감각을 표출한 인터뷰 등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의 이데올로기적 의도를 어떠한 한 감각으로 치부할 수 있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비록 취재하면서 ‘라포’를 쌓아가면서 느꼈던 바를 표현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어찌됐든 내 말은 뉴저널리즘이라는 스타일의 불가피한 여파로, 조앤 디디온의 색깔이 생각보다 강하게 나타나는 문장들도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참 특이하게도, 조앤 디디온은 항상 자신의 선입견을 감추고 ‘세상에 대한 애정’을 문장으로 바로 뒤에 덧붙인다. 각각의 대상들이 여타 기사에서 다뤄지는 이미지와는 달리, 그들의 불안함이라든지- 혹은 인간다움이라든지- 를 단순한 행동 묘사로 표현한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시사점인데. 저널(기사)에서 통상적으로 다뤄지는 육하원칙의 기준은 객관성과 정확성을 위한 것이라고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그러한 일반적 상식과 달리, 우리에게 저널 속 대상들은 특정 이미지로서 대표되어 인식된다. 범죄자라면 죽일놈(당연한 얘기는 물론 맞다. 관련해서는 이후에 설명하겠다. 일단 신파적인 범죄 얘기가 아님을 먼저 밝힌다.), 사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극단적인 혁명가가 되곤 한다. 수식어 또한 아마 기자들이 제일 잘 만들어내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조앤 디디온은 단순히 그들의 일상적 면모를 캐치하여, 묘사만 한다. 압축되어 단편적 이미지가 되어버리는 대상들을 해독한다. 객관성과 정확성을 위한 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허구적 허상(이미지)을 만들어내며, 뉴저널리즘이라는 문학적 묘사는 왜 그 허상들을 다 일그러트려 놓는 것일까. 이렇게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이유는, 조앤 디디온이 어떠한 연민도 대상에게 불어넣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의 문장은 냉철해서 누군가의 ‘이미 만들어진 허상’을 깨려는 목적으로 적혀지지 않았다. 그녀가 세상에 대한 애정을 표출하는 방식은 정확히 개인주의적이었고, 호기심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조앤 디디온이 ‘글을 쓰는 행위’ 자체에 대해서도 많이 이야기했던 것으로 유추했을 때, 그냥 글을 쓰기 위한 그녀의 욕심을 호기심으로 표출한 것은 아닌가 싶다. 물론 쿨하게 개입이 아닌, 방관자의 자세로.)


그녀의 글이 가지는 또 하나의 시사점이라고 할 만한 점은, 가장 가까이에서 대상을 바라보면서 사건(대상이 연루된) 을 해체하여 멀리서 바라볼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이다. 루실 밀러 사건에 대해서 쓴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당연히 조앤 디디온은 단순히 루실 밀러가 남편을 죽였는지에 대해 취재만 하지 않았다. 캘리포니아에 희망을 가지고 몰려들어 온 사람들부터 해서, 그 시대상을 건조하게 표현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루실 밀러가 내연남이 있었단 사실도, 루실 밀러의 가정부가 끝까지 루실의 무죄를 강력히 주장했다는 사실도 모조리 적는다. 루실은 어찌됐든 교도소에 수감되고, 그 중간에도 다양한 일들이 일어났다.


조앤 디디온은 여기서 참 신기하게도, 이러한 사건이 수두룩 했던 시대에서 ‘루실 밀러’ 사건이 대서특필 되고, 관심 받는 현상에 대해서도 기술한다. 그리고 그녀의 불륜이 주목받았던 것도, 그 남자가 다시 재혼을 한 것도. 아마 이 저널로 인해 <엘르>에서 조앤 디디온의 수많은 수식어 중에서 ‘페미니스트 아이콘’을 덧붙였지 않을까 감히 예상해본다. 사실 그녀의 개인적인 행보는 모르겠지만, 루실 밀러 사건을 세세히 묘사만 해낸 글을 읽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특이점이 생기게 된다. 묘사에는 근거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루실 밀러가 왜 이렇게 관심을 받았으며, 왜 그녀의 사생활까지 모든 사람들이 왈가왈부 했는지는 그래서 의문이다. 물론 이를 강조하며 글이 끝나는 것은 아니고, 캘리포니아를 황금의 땅이라 여기며 환상을 가지는 시대상을 꼬집는 뭐 그런 내용이 주였다. (이 내용에 매몰되는 사람 없길 바란다. 물론 나야 조앤 디디온을 더 좋아하게 된 계기가 됐으면서도. 굳이 매몰되지 말라고 더 설명하자면, 마초의 상징, 서부 영화만 거의 했던 존 웨인을 글로 다루기도 했다.)


여하튼 캘리포니아에 한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앤 디디온은 이처럼 대상-사건-외부상황을 그녀의 입장에서 본 그대로 기술하며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는 대상에만 매몰되어 있던 시선들을 모두 환기시켜주는 역할을 하는데, 덕분에 우리는 상당히 멀리서 이를 지켜볼 수 있게 된다. 사건의 명백한 잘잘못을 가릴 수 있게 된다는 유치한 흑백논리 능력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훨씬 시니컬 하겠지만, 사건을 대하는 열기-, 태도-에 대한 질문부터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에 개인적인 서평을 쓰게 된 계기를 정리하자면, 조앤 디디온의 문체가 <정확성을 중요시 했던 글들조차도 이루지 못했던 일들을 이루어 내는 능력>에 기반한 천재형 스타일이라고 파악했기 때문이다. 나는 스테레오타입의 최전선이라고 할 수 있는 광고회사에서 잠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나도 참 호기심이 많은 사람으로서 모든 일들에 오픈 마인드를 가지고자 한다. 그래서 광고가 재밌으면서도 어렵다. 브랜드라는 것도, 광고라는 것도 일반적인 스테레오타입을 강화하거나 혹 만들어내는 일이라는 게 너무나 명확하기 때문이다. 창의가 모방이라고 하는 게 뭐 아마 그쯤에서 나온 말이려나 싶다. 그래서 어떻게 넓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 참 머리속 질문들이 많다.


조앤 디디온은 그 답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창작을 하면서도 이미지를 창출해내지 않았고, 주관을 담으면서도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었고, 한 사건을 심도 깊게 다루면서도 매몰되지 않았다. 그녀가 자기중심적으로 호기심이 많았던 성격과 함께 천부적인 글솜씨가 있었던 게 가장 큰 요인이었겠지만. 세상에 대한 애정을 이기는 무언가는 절대 존재하지 않는가 보다.


추가로, 세상에 누군가가 타인을 무조건적으로 비난하고, 신뢰할만한 권리는 전혀 없다(악질 범죄자는 제외한다.). 언젠가부터 현대사회에는 그게 천부인권처럼 부여되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는 듯하다. 그게 특히나, 우리가 모르더라도, 이미지가 만들어진 대상과 관련되었더라면 말이다. 사람이 아닌 이미지로 무언가를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경계해야 할 때이지 않나 싶다. 아, 그렇다고 해서 무죄추정의 원칙을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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