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가 빌드업 한 ‘개인적 서사’들의 함의에 대해서
1. 칸 영화제
‘브로커 영화 찍는다’ 했을 때부터 기대하고 있던 국내 팬으로서, 칸 영화제 입성은 더욱이 기대감을 부풀리는데 충분했다. 그런데, 칸에서 영화 ‘브로커’ 시사 후, 영국 가디언지에서 아이를 사고 파는 송강호의 역할을 미화한 것을 꽤나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것이 국내로 흘러들어 온 첫 소식이었다.
사실 고레에다 감독과 한국식 연출의 합이라면 어느 정도 예상 가능했던 소식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고레에다가 매 영화마다 보여주는 세계관에서는, 멀지 않은 개인들의 이야기에 개인적인 서사들이 묻어나 있는 게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가족이라는 가장 작은 사회를 해체하고 다양한 군상들을 다시 결합하여 보여주는 것이 고레에다의 특장점 아니던가. 그리고 그 해체와 재결합은 생각보다 흔한 일이라는 것도 시사점이라고 할 수 있고. 여기에 더불어, 한국 영화라 함은 개인 서사가 가끔은 도가 지나칠 만큼 흠뻑 들어가서 ‘재미없는 신파’와 ‘인생작’의 그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게 미학이다.
고로, 칸 영화제 수상은 어렵겠다고 생각했지만(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이 있었으니, 안심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래도 영화에 대한 감을 찾을 수 있었다. 영화제 수상과 별개로, 고레에다와 한국식 연출의 합 자체만으로 기대가 되었다. 아는 맛이 무섭다고 하니까.
2. 그 외 우려들
배두나는 일본어로 빼곡히 적힌 대본을 한국어 대본과 일일이 비교해 가며 분석했다고 한다. 이지은은 한국식 욕을 스스로 첨가했다고 하고. 타국 언어로 적혀 있는 대본을 한국어로 살리는 과정에서 놓치는 부분들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게 고레에다 감독이 실험하고 싶었던 것들이었을 테고, 배우들에게는 더욱이 책임감이 부여됐다.
이에 대한 엇갈린 평들도 있었다. 일본식 대사와 한국식 영화 스타일이 만나게 되면서 불협화음이 생겼다는 평들이 좀 있었다. 그런 면에서 영화를 봤을 때는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일부 대사들이 있으나, 그래도 전체적으로 우리 영화 색채가 잘 어우러지도록 배우들이 꼭꼭 씹어 소화시켰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신들의 시사평에도 불구하고, 송강호의 수상이 이를 증명한다. 개인적으로는, 배두나가 소름 돋을 정도로 멋졌다.
송강호, 이지은, 강동원이야 극을 이끌어 가는 주인공이라, 자신에게 부여되는 서사가 있었기 때문에 그를 잘 표현하는 게 제1의 책무였다. 강동원은 그런 면에서 아쉬운 면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래도 그 서사들이 부여됨에 따라 세 사람의 캐릭터가 어떻게 표현되든 어색함이 상쇄되는 게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들이 히어로물이 아닌, 우리 주변네들에서 생각보다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단 것에서 또 그들만의 엄청난 갈등이 있었겠지만서도. 원래 잘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배두나는 극 중 드러나는 서사가 있는 캐릭터가 아님에도, 입체적인 인물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감춰진 사연이 있는 사람처럼 행동했다는 게 절대 아니라, 그냥 주변에 있을 법한 사람이었다. 일본 영화(어쩌면 한국 영화도 일부) 특유의 ‘극 후반 영화 교훈 or 주인공의 반짝임을 깨닫고 인물이 변하게 된다’를 보여주는 캐릭터인데, 이를 우리 주변 사람처럼 잘 풀어나간 게 정말 멋졌다. 그 말인즉슨, 배두나 덕에, 과하게 보일 수 있었던 영화 설정들이 조금 더 영화의 본질을 살릴 수 있게 되었단 뜻이다. 고레에다가 담고 싶어 한 ‘특별한 가족의 형태’에 대해 마냥 수긍하지도 않지만, 담담히 이해할 수 있게 된 사람의 표상이었다. 어쩌면 관객들은 배두나에게 더 일반적으로 공감할 수 있었을 것이고, 개인적으로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3. 영화 속 세계
“태어나줘서 고마워.” 영화를 한 마디로 압축한 대사다. 모든 사람이 흔하게 수없이 들었을 테지만, 그 의미를 곱씹어 보면 눈물 나는 말이기도 하다. 이 대사는 일반적으로 부모에게서 잉태되고 난 후, 그들에게서 자녀들의 입장에서 많이 듣게 되는 말이다. 허나, 그 때의 의미를 곱씹어 보자는 말은 절대 아니다. 어떠한 계획을 거쳐 배를 빌려 태어나게 된 일련의 과정을 필수적으로 배제하고, 말 그대로 한 인간의 생존에 던질 수 있는 대사라고 할 수 있다.
어떠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태어나게 됐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고, 결국 인간이 태어나게 되어 그 백세인생인지 뭔지를 살아가야 함은 엄청난 동기부여 없이는 힘들다. 고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핏덩이들한테만 이야기를 해줄 것이 아니라, 현 세대를 살아가는 모든 연령대의 인간들에게는 ‘태어나줘서 고맙다’는 이야기가 필수적이다. 그리고 그 말을 내뱉어 줄 사람들은 부모가 아니기도 하다. 이런 케이스들은, 이제는, ‘생각보다’도 아니고 ‘정말로’ 흔하다.
그런 의미에서 고레에다 감독이 영화 속 세계에 부여한 서사들은 단순히 드라마 메이킹을 위한 장치는 아니었다. 오히려 흔한 케이스들을 뻔하지 않게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좋은 포장지였다. 물론, 고레에다 감독의 전작들을 보지 않고는 단순 신파로 보일 수 있음이 아쉽긴 하지만, 그가 탄탄하게 쌓아왔던 영화 속 ‘가족에 대한 의미’는 한국식 영화로 유연하게 풀어져 숨김없이 보여졌다.
영화에서 ‘버려진 아이, 지켜진 아이’, ‘그래도 버린 건 버린 거다’, ‘버린 거보다 태어나기 전 죽이는 게 죄가 가볍냐’, ‘내가 대신 용서한다’, ‘그래도 아이는 절대 나를 용서하지 않을 거다’ 등등 자기 역사를 가진 어른들이 이를 논했다. 아이들의 이야기이기도 했지만, 그 논점 없이 마냥 크기 바빴던 어른들에게 적용되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이 남겨진 어른들은 다양한 관점을 가지고 날카로워지기도, 부드러워지기도 하며 합의점을 찾아가지만, 결국 그 합의점이 아이를 위한 것임은 새삼 숭고함이 느껴진다.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남겨진 어른들에게 미래라는 건 참 한 치 앞도 꿈꾸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며, 그를 대물림 하기 싫었던 그 개개인의 이야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지은의 아이를, 보육원 출신 강동원이-, 부모가 돼본 적 있던 송강호가-, 수사하던 배두나가-, 신경쓴다. 남겨진 어른들은 이렇게 자신의 서사를 갖고, 선택한 가족과 함께 미래를 꿈꾸게 된다. 이건 자발적인 희생이고, 숭고한 의미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천륜적인 무언가보다 더욱 멋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건 영화라서 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실이 더 영화 같다고, 그런 공동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더욱이 많아지고 있다. 그래서 고레에다의 작품이,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캐릭터들의 개인적인 서사가 더욱 더 의미를 갖게 된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