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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리 Mar 11. 2023

빛바래 흐릿하게 남은 흔적이라도

월간 옥이네 2022년 10월호(VOL.64) 여는 글

‘일하는 여성’이라는 단어에 바로 연상되는 모습은 어떤 것인가요? 적당히 단정한 옷차림에 책상에 앉아 사무 업무를 보는 모습을 떠올리지는 않으신가요? 혹은 남들이 하지 않으려는 궂은일을 도맡는 여성의 모습을 떠올리지는 않는지요? ‘일하는 여성’을 가까이 두지 않은 한 대부분은 이런, 다소 극단적인 모습이 먼저 그려지실 거 같습니다. 실제로 그 모습은 여성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데도 말입니다.


인구 5만이 되지 않는 옥천의 ‘일하는 여성’ 역시 그렇습니다. ‘농촌’이라고 하면 흔히 농업에 종사하는 것 정도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 우리네 관념일 텐데요. 여성 농민들이 그간 ‘보이지 않는 손’으로 농촌 사회를 지탱해온 것처럼, 구석구석 또 다른 모습으로 공동체를 만들고 꾸려온 여성들이 있습니다.


월간 옥이네 이번 호에서는 바로 그런 여성들 중 일부를 만났습니다. 옥천읍을 걸어 다니다 보면 종종 눈에 띄곤 하는 ‘잔치방’을 운영했던 여성들입니다. 지금처럼 외식 문화가 발달하지 않았던 때에, 지금보다 주민 간 교류가 활발하던 때에 우리 이웃의 경조사 현장을 지켰던 이들이죠. 같은 골목, 같은 마을에 사는 이웃과 얼굴을 마주하고 잔치를 벌이는 일이 지금으로썬 썩 익숙지 않지만, 어울렁 더울렁 살던 문화가 아직은 남아있던 풍경을 이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조금이나마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더불어 당시 ‘일하던 여성’의 모습을 조금 더 다채롭게 그려볼 수도 있겠지요. 빛바랜 간판처럼 흐릿하게 남은 이야기이지만 당시 잔치방을 운영했던 여성들이 가졌을 자부심, 이들이 일을 통해 만들어 간 지역사회 안의 관계를 지금의 우리가 함께 떠올려 본다면 그건 그것대로 남다른 의미가 있을 듯합니다. 대단한 역사의 기록으로 남지는 않았어도,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살고 있는 우리가 역사를 만들고 있는 것 아니겠냐는 다독임을 전하면서요. 이어서, 과거의 잔치방 같은 형태는 아니지만 그와 유사한 역할을 고민하고 있는 오늘의 지역 여성들 이야기도 함께 응원해주십시오.


지난 호 옥천말 구술생애사를 통해 만난 군북면 추소리 김봉순 씨와 그의 고민을 들어주고 해법을 나눠준 동이면 평산리 이한순·이영순 씨, 지역의 큰 축제 현장부터 마을 대소사 전반을 묵묵히 책임져나가는 청성면 새마을부녀회장 이상숙 씨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뭉클하고 먹먹해지는 역사의 한 줄기에 이런 여성들이 있었음을 또 떠올려봅니다.


또 다른 ‘보이지 않는 손’ 청소노동자, 쌀값 하락과 각종 수출 주도 정책에 시름이 깊어지다 못해 붕괴 직전에 와있는 우리 농민 이야기도 있습니다. 늘상 말해왔지만, 현장에 있지 않는 한 잊기도 쉬운 이야기들입니다. 기사를 읽다 보면 ‘우리가 무엇을 함께 할 수 있을까’ 조금 막막해지기도 합니다만, 모든 문제 해결은 ‘이야기를 제대로 듣고 아는 것’부터 시작된다는 것임을 상기해주십시오.


이번 달 옥천에서는 농림축산식품부가 주최하는 ‘시골언니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옥천에서는 월간 옥이네를 만드는 고래실이 ‘여성 로컬미디어 주간’이라는 이름으로 2030 도시 여성의 농촌 사회 이해 활동을 열어가고 있는데요. 부족하지만 지면 안팎에서 다양한 이들이 만나고 연결되는 데 힘쓰겠습니다. 월간 옥이네 10월호가 독자 여러분에게 그런 연결고리가 될 수 있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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