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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슬욱 Sep 04. 2020

홍콩 도심에서 떠나 느끼는 잠깐의 여유

라마섬 (南丫島)

    홍콩섬 센트럴 피어에서 배를 타면 약 30분 만에 라마섬(南丫島)에 다다른다. 홍콩섬 남서쪽에 있는 이 섬은 홍콩 배우 주윤발의 고향으로 유명하지만 거주민들은 그 사실을 별로 자랑으로 생각하지 않는지, 아니면 무심한 홍콩 사람의 특성이 여기서도 발현되는 건지, 섬 안에서 주윤발의 흔적이나 홍보 물품 같은 건 거의 찾아볼 수 없어 누가 이야기해주지 않으면 주윤발의 고향이라는 사실을 모를 정도다. 오히려 센트럴 피어 입구에 대문짝만 하게 붙어있는 주윤발의 젊었을 때 사진이 인쇄되어 있는 라마섬 홍보 포스터가 가장 대놓고(?) "주윤발의 고향 라마섬"을 알리는 홍보물이었다.

라마섬으로 가는 센트럴 피어의 선착장

    

선상에서 바라본 홍콩섬 풍경

    비비안과 2월의 어느 일요일에 라마섬을 방문했다. 출발 전 날이 흐려 비가 올까 불안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라마섬에 발을 내딛자마자 조그만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이 하늘엔 검은 먹구름이 가득 들어차 있었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바람까지 세차게 불고 있었다. 집에서 아침만 조금 먹고 떠나 둘 다 허기져 있었기 때문에 비도 피할 겸 일단 뭐라도 먹기 위해 음식점을 찾았지만, 마땅한 음식점이 없었다. 중심 거리를 한 바퀴 둘러본 뒤, 섬에 유일하게 있는 듯한 홍콩식 음식점에 들어갔다.

    날씨 탓인지 아니면 내가 곧 한국에 돌아가야 하는 상황 탓인지 비비안과 나 사이의 분위기가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썩 좋지도 않았다. 말은 하지 않지만 곧 다가올 이별을 준비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주문한 음료가 먼저 나왔다. 비비안은 따뜻한 밀크티, 나는 차가운 밀크티를 주문했다. 일상처럼 마시던 밀크티가 별안간 특별하게 느껴졌다. 

'홍콩에서 다시 밀크티를 일상처럼 마실 날이 올까?'

당연하게 여겼던 일상을 떠나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음료를 마시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홍콩식 토스트 한 접시와 샌드위치 한 접시가 나왔다. 갑자기 샌드위치마저도 이질적으로 느껴지면서 나 자신이 홍콩에서 서서히 벗어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일단 접어두기로 했다.

일상을 떠나보낼 준비

    날이 좋으면 홍콩섬이나 구룡반도에서도 바다 너머로 보이는 세 개의 발전소 굴뚝은 언제나 라마섬을 지키고 있다. 라마섬은 홍콩 국제공항이 있는 란타우섬과 홍콩섬에 이어 세 번째로 크지만, 거주민이 7,000명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인구 밀도가 낮다. 3층 이상의 건물 건축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어 높은 건물이 하나도 없으며, 개인 차량 소유도 금지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이동한다. 라마섬의 집값은 여전히 비싸긴 하지만, 홍콩의 다른 지역보다는 훨씬 저렴하다. 홍콩섬에서 출발하는 배의 출항 간격은 1시간 내지 2시간으로 꽤 긴 편이지만, 30분 정도면 홍콩섬에 다다를 수 있기 때문에 홍콩섬으로 출퇴근하는 직장인들이 꽤 많이 거주하고 있다. 또한, 라마섬과 비슷한 느낌의 청자우, 펭자우 섬과는 달리 외국인 커뮤니티도 있어 길을 걷다 보면 꽤 많은 외국인들과 마주친다.

    홍콩의 작은 섬들의 특징은 서양 문화가 곳곳에 녹아있는 홍콩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서양 문화를 많이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좁은 도로 양 옆으로 들어서 있는 낮은 층수의 건물들 대문에는 빨간색 바탕에 노란색으로 복(福)이라는 글자가 적힌 종이가 붙어있기도 하며, 거리 곳곳에서는 경쾌한 광둥어와 함께 마작 패 돌리는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또, 전통 시장에서는 홍콩 사람들이 즐겨먹는 야채, 구운 오리고기, 중약재 등을 거래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홍콩섬 중심가와 다른 모습인 라마섬(좌), 라마섬의 랜드마크인 세 개의 발전소 굴뚝(우)

    주문한 음식을 다 먹었는데도 비가 그치지 않았다. 라마섬 가운데에 있는 산 정상에 가볼만한 풍력발전소가 있어 방문할 계획이었지만, 쏟아지는 비에 속수무책으로 계획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여행 시 최대한 많은 장소에 들르는 것을 좋아하는 비비안은 매우 아쉬워했는데 나는 다음이 존재할 지에 대한 확신도 없으면서 "다음에 또 가면 되지"라고 말하며 어쭙잖게 위로를 건넸다. 비를 피하고 커피도 한잔 마실 겸 중심가 끝에 있는 카페에 들어왔다. 8~9평 남짓 되어 보이는 작은 빵집이었는데, 오후 늦은 시각이라 이미 많은 빵이 팔려 있었고 마감 준비를 하는 것 같아 보였다. 비비안이 잠시 커피를 마시고 가도 되냐고 물었더니, 가게 주인은 대수롭지 않아 하며 천천히 마시고 가라고 말했고 우리는 커피 두 잔과 도넛 하나, 그리고 마카오식 우유 디저트를 하나 주문했다. 창밖의 빗소리가 가게 안으로 새어 들어왔고, 향긋한 커피 향이 코를 감쌌다. 가게 주인은 남편으로 보이는 사람 한 명과, 이웃으로 보이는 머리가 살짝 까지고 크고 네모난 금테 안경을 쓴 아저씨 한 명과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홍콩과 중국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라고, 짧은 광둥어 실력으로 이야기 내용을 추측해 보았는데 비비안이 맞다고 했다.

    커피를 마시면서 지난 일 년 동안의 홍콩 생활을 돌아봤다. 다사다난했던 일 년이었다. 앞으로 다가올 일 년은 어떤 모습일까 고민해 보았는데, 구체적인 모습이 그려지지는 않았다. 일단은 한국에 돌아간다는 사실에 집중하기로 했다. 한국에 가서, 찬찬히 생각을 정리하다 보면, 가야 할 방향이 명확해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관광명소를 방문한 기억보다 상대적으로 사소해보이는 기억이 더 뇌리에 깊게 박혀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카페에서 보낸 시간은 기억에 박제되어 있다고 해도 될 정도로 생생하다. 이 날의 카페에서 보낸 시간이 기억 속에 뚜렷이 남아있는 이유는 떠나기 전의 묘한 긴장감과 아쉬움 사이에서 느꼈던 잠깐의 여유와 일상이 더이상 일상으로 다가오지 않기 시작한 이질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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