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캐슬욱 Feb 06. 2021

즐거운 시간

    아버지와 동생이 생각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대전에 내려간 뒤 우리 집에 남은 건 나, 그리고 그녀가 남기고 간 유품뿐이었다. 그녀의 수많은 흔적들에 둘러싸여 거실에 덩그러니 혼자 서있는 내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스스로도 무척 측은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몇 달간,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억지로 흘려보냈다. 그러다 문득 지나간 일은 어찌 되었든 되돌릴 수 없고, 이렇게 슬픔에 잠긴 채 아무 일도 안 하고 있는다고 해서 알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이제 그만 넘어진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비로소 어머니의 죽음을 인생사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고인의 유품을 정리하게 되면, 어머니의 이른 죽음이라는 가혹한 운명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꼴이 되는 것 같아 유품 정리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는데 새 출발을 스스로 다짐하는 의미로 고인의 유품 정리를 시작하기로 했다. 요즘처럼 어디 밖에 나갈 수도 없어 집에만 있어야 하는 상황에서 참으로 안성맞춤인 작업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래도 감성적으로 변하는 밤보다는 하루 중 가장 이성적인 시간대라고 할 수 있는 이른 아침이 작업하기 가장 좋은 시간이라고 생각했고, 매일 아침을 조금씩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는 데 쓰기로 계획했다. 주인 잃은 강아지처럼 생기를 잃어버린 유품은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아직 어머니의 체취를 미세하게 풍기고 있었는데, 만질 때마다 조금씩 올라와 코끝을 미세하게 자극하는 이 체취를 견뎌내는 게 이 작업의 가장 힘든 점이었다. 이 체취는 어머니의 생전 모습뿐만 아니라, 췌장암 증상으로 풍선처럼 부푼 배 때문에 허리에 쏠리는 하중을 몸이 버텨낼 수 있도록 착용하던 복대에서 나는 꼬릿한 냄새 또한 생각나게 했고, 이로 인해 고통스럽게 현생과 작별인사를 하던 병실에 있는 어머니의 모습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약물, 땀, 알코올, 체취 등 각종 냄새가 복합적으로 섞여 나던 그 냄새는 인간 존재의 나약함을 단번에 깨닫게 해주는 냄새였고, 그 나약함의 끝단에 걸터앉아 인생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어머니였다는 생각에 또다시 슬픔의 나락으로 빠질 위기가 찾아왔다.

             그런데 나는 이번에는 의식적으로, 나에게 불현듯 다가와 유품 정리를 시작하도록 도와준 깨달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죽음은 인생사의 일부라는 사실 말이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마주해야 할 운명이고, 단지 그 운명이 어머니에게 조금 빨리 찾아온 것이라고 생각하니 상기되었던 낯빛은 안정을 되찾았고, 마음도 놓이기 시작했다. 그 이상하고도 꼬릿한 냄새도 어머니가 살아 숨 쉬며 세상에 남길 수 있었던 흔적 중 하나였고, 어찌 됐던 나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것이니 냄새 때문에 또 슬픔에 빠져 허우적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의 체취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옷과 생전에 즐겨 만들던 쿠션 커버를 집어 들어 얼굴을 파묻고 숨을 크게 들이쉬며 어머니의 체취를 만끽했다. 이 체취는 기억은 나지 않지만 우리가 당신의 뱃속에서 하나였을 시절부터 네다섯 살까지의 추억, 그리고 그 후 키가 더 크고, 겨드랑이에 털이 나고, 공부를 하고, 대학을 입학하고, 같이 여행을 떠나고, 단골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겨울에 함께 눈을 구경하고, 함께 가발을 맞추고, 손잡고 산책을 하며 희망을 놓지 않았던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그 순간 이후, 매일 아침은 고통의 시간이 아닌, 어머니와의 추억과 마주하는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

생전 직접 만드신 장식품은 문에 걸어놓았다
십자수는 액자에 넣어 인테리어 소품으로 사용했다
퀄트는 부엌 벽에 걸어놓았다


작가의 이전글 엄마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