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싸움을 잘하는사람이 되고 싶다.
"삶의 곡절이 없이 무난히 잘 살아오셨나 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러 문장이 모여 문단이 되고, 문장들이 가진 각각의 의도가 쌓여 의미가 되고, 글이 되고. 그 안에는 머리나 가슴을 때리는 펀치 라인이 있기 마련이다. 음. 어떤 때는 진짜로 가격을 당하기도 하는 것 같고..
학점은행제로 듣던 수업이 기말고사를 치른 어제부로 완전히 끝났다. 더 전에 과제도 끝냈다. 평가도 이미 나온 상태고. 두 과목이 생각보다 점수가 낮았다. 하나는 교수의 평가가 납득이 갔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컴플레인에 약한 사람이다. 잘 못하기도 하고, 별로 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래서 어떤 일이든 불만을 제기하는 일이 좀처럼 없다. 면대면은 더 그렇고, 그나마 온라인이나 전화에 기대서는 가뭄에 콩 나듯, 무척이나 억울할 때 마음을 좀 먹어야 다소곳이 실행을 하는 편인데, 비겁하게 보자면 그게 맞고, 살을 붙이자면 전화는 걸기 전에 내용을 정리할 수 있고, 글로 쓰면 정제가 되기 때문에 간접적 상황에서의 행동 빈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것이다.
어쨌든, 내가 낸 과제를 교묘한 요행쯤으로, 내 이의제기를 유아적 핑계쯤으로 여기는 인상을 숨김없이 풍기는 교수의 답변을 읽으면서.. 뭐랄까, 뚜껑이 날아갔다고나 할까. 교수의 답변에서 내게 남은 문장은 ‘삶의 곡절 없이 무난히 잘 살아오셨나 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였다. 참으로 우아한 빈정거림이었다. 앞뒤로 차근차근 쌓은 비아냥이 저 문장으로 말미암아 내 머리통을 제대로 후려쳤다. 내 이의제기에서 어떤 문장이 교수의 어떤 부분에 꽂혔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무례한 문장들을 새겨 넣은 걸 보면 약이 좀 올랐나 싶긴 하다. 물론 나 또한 약이 아주 많이 올랐고.
뚜껑이 날아가면서 점수에 대한 미련도 함께 날아갔다. 내 전투력은 교수를 향해 집중됐다. 핵을 날리고 싶었다. 내 문장이 논리적 각도로 날아가 교수의 가슴팍에서 꽝꽝 터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적어 넣은 모든 문장들이 교수에게 비껴감 없이 상흔을 남겼으면 좋겠다고. 안타깝게도 다시 날아온 답변을 보고 나니, 장황설을 늘어놓은 내 그 수많은 문장들은 샤프심 정도나 됐을까 싶었다. ‘제 입장은 일전에 평가글에서 담은 그대로입니다.’ 구절에서 자폭의 참담함을 느꼈다.
할 수 있는 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학생의 입장에서 교수에게 할 수 있는 말을, 오해하지 말라고 열심히 했다고, 이러 이런 점을 보면 알 수 있지 않냐는 말을 하려고 한 것이었다. 간단하고 성의 없는 평가를 보며 내 시간과 수고, 진심 같은 것들이 모조리 평가절하 당한 기분이었다. 납득이 안 돼서 억울했고, 속이 많이 상했다. 점수도 점수지만, 누군가가 얼굴도 모르는 나를 그런 식으로 취급하게 두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또, 저어기 저변에는 그런 마음도 조금 있었다. 온라인 수업인데, 다들 알 만한 사람들끼리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냐고, 이 정도 했으면 된 거지 너무 빡빡한 거 아니냐고, 얼마나 받는지는 몰라도 나 같은 수강생 덕분에 부수입 챙기는 거 아니냐고. 그런 천한 갑의 마음이. 애초 이 마음이 없었으면 이의제기 글을 쓸 생각을 안 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한번 간 성적은 돌아올 수 없으므로 이의제기를 하기는 했겠지만, 더 나은 표현을 찾았을지 모른다. 그래서 악의 없는 의도로 쓰인 글을 보내, 적어도 교수가 내 과제를 폄하했던 것을 조금은 미안하게 느끼도록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글이, 말이 가진 함유의 치를 다시금 생각해본다. 감추는 척한 악의와 감췄다고 착각한 저 뒤의 의도가 결국 눈 가리고 아웅 만도 못하게 되어 버린 걸 보면서. 나는 꿩이고, 교수는 포수다........ 머리를 쳐 박고 있으면 산 채로 잡을 일이지, 총까지 쏘다니. 어리석음을 깨달은 건 깨달은 건데 원망까지 안 할 만큼 맘이 넓지는 않음도 느낀다.
말싸움을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무논리 쌈닭이 되고 싶다는 건 아니고. 논리적, 합리적 설득력으로 완전 무장된 사람이 돼서 꼭 필요한 때, 꼭 필요한 말을, 잘하고 싶은 것이다. 주눅 들지 않고 맞다고 생각하는 말을 하려면, 정말 맞는 말을 해야 할 테니까. 그러려면 우선은 좀 더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겠지. 마음이 더 넓고 깊고 그래서 사고와 말의 깊이도 더 넓고 깊은.
참내, 그러나 저러나 아직도 분한 마음은 분한 마음대로 있는데, 평생에 그렇게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