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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민 Aug 06. 2019

1965년 한일협정의 불편한 진실

서울의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맨 위층, 창문밖으로 청와대가 보이는 작은 방이 있다. 이 방은 관람객들이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대통령 집무실처럼 꾸며져 있고, 역대 대통령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집무실 책상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다섯 사람이; 우측에는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다섯 대통령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최근 들어 박근혜 대통령의 초상화가 걸렸는지는 아직 확인해 보지 못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지만, 공교롭게도1987년 민주주의 체제 성립을 기준으로 좌우로 나뉘게 되었다. 


미국 국립 초상화 박물관의 웅장한 대통령관을 마구 부러워하던 사람으로서, 아직은 소박하지만 그래도 참 반가운 전시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직에 대해 가지는 오래된 불만을 떠올리게 하는 전시물이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1948년 (또는 관점에 따라서는 1919년)에 시작되었지만, 민주주의 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은 1987년부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1987년 이전의 대통령과 이후의 대통령을 다르게 취급하지 않는다. 난 이게 참 거북하다. 대통령은 그냥 아무 국가 원수한테 갖다 붙이는 단어가 아니다.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집권하고 민주주의 절차에 따라 퇴진해야만 얻을 수 있는, 그 이름만으로도 명예로울 수 있어야 하는 칭호다. 87년 이전의 존재감 없는 두 분은 논외로 하더라도, 적어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세 사람은 애초에 쿠데타나 부정선거로 집권했거나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퇴진하기를 거부한, 엄밀히 말하면 대한민국의 대통령직과는 조선의 왕들만큼이나 동떨어진 사람들이다. 이들의 국가 통치에 관한 공과는 논외로 해두고라도, 애초에 대통령으로서의 최소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 아무리 박근혜가 무능했어도 그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었고, 아무리 박정희가 유능했어도 그는 아니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몇번 내 글을 읽어주신 분이라면 내가 87년 이후의 지도자들에게는 가급적 빼먹지 않고 “대통령”이라는 존칭을 단다는 것을 알 것이다. 87년 이전은 그냥 이름으로 부른다. 내가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의 대통령실을 꾸몄다면, 초상화도 아마 여섯 개 밖에 걸려있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건 의미없는 나의 고집에 불과하고, 현실은 다르다. 1987년, 오랜 민주화 혁명이 드디어 결실을 맺고 민주 헌법이 공표된 순간, 우리는 이전 체제와의 단절은 커녕, 이전 구분조차 지으려 하지 않았다. 독재정권의 요인이 첫 대통령으로 덜컥 선출되버린 역사의 아이러니도 한몫 했을테고, 정치 엘리트들 사이에서는 독재 진영과 민주화 진영간의 벽이 지금 와서 생각하는 것 만큼 두텁지는 않았다는 것도 원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10년 이내로 민주화 진영의 두 기수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은 공히 정권을 잡기 위해 구 독재 진영의 유력자와 연대하는 선택을 한다.) 이유야 어찌됬건 우리는 민주화 이전의 독재자들을 모두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인정했고, 이로서 그들의 통치행위는 모두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행위가 되었다. 정부 수립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던 시절에 벌어졌던 제주 4.3사건에 대한 사과, 독재 정권의 군인들이 베트남에 가서 벌인 민간인 학살에 대한 사과를 모두 2000년대의 대한민국 대통령이 해야 하는 것은 이런 이유다. 군사독재 정권과 체제의 연속성을 인정한 이상, 잘한 일만 취하고 잘못한 일은 나몰라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1965년 한일협정의 불편한 진실”이라는 낚시하기 좋은 자극적인 제목으로 글을 시작했는데 네번째 문단에서야 일본 이야기가 나와서 대단히 송구스럽지만, 이쯤되면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건지 대충은 짐작하시리라 생각한다. 35년간 일본이 한반도에서 벌인 잔혹한 제국주의 통치와 강제징용, 위안부 등 반인륜적 행위는 모두 온전히 일본 정부의 잘못이다. 아베 총리를 비롯한 일본 우익이 과거 정부의 잘못을 끝끝내 인정하지 않고 현재 정부의 힘으로 역사를 왜곡하려 하며 스스로의 죄를 키우고 있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을 통해 “[대한민국] 및 그 국민에 대한 모든 청구권”을 제대로 된 사과도 없이 돈을 받고 일본에 넘긴 것은 대한민국 정부다. 그 돈을 받아 피해자들에게 전달하지 않고 국가 경제 발전을 위해 사용한 것 역시 대한민국 정부다. “일본이 한국에 잘못한 것처럼 한국도 일본에 잘못한게 있다”라는 정신나간 소리를 하려는게 아니다. 일본 정부가 한국 국민에게 잘못한 것처럼, 한국 정부도 한국 국민에게 잘못한 것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1965년 한일협정의 공범인 제3공화국과의 체제 연속성을 주장하고 있는 이상, 정부는 그 협정에 대한 국민에게 사과할 책임이 아직 본인들에게 남아있음 역시 인지해야 한다. 이도 결국은 제주 4.3사건이나 광주학살처럼, 국가가 국민에게 벌인 폭력의 일종인 것이다. 그 때의 독재국가 대한민국과의 단절을 거부한 이상, 지금의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에도 그 책임은 남아 있다. 


일제 피해자 청구권과 관련한 한국 정부의 한국 국민에 대한 책임을 직시한다면, 거기서 일본 정부와의 화해를 위한 열쇠도 나온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일본에게 결국 원하는 것은 결국 돈이 아니라 진정성 있는 사과다. “돈주고 유감 표명했으니 다시는 말도 꺼내지 마라” 이런 안 한 것 만도 못한 사과가 아니라, 20세기 초반 양국 사이의 비극을 직시하면서도 그걸 뛰어넘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진짜 사과 말이다. 일본에게 그런 사과를 할 의향만 있다면, 이런 방안은 어떨까: 일제피해자 개인에 대한 한국 사법부의 배상 판결은 존중하되, 그 배상액 자체는 한국 정부가 대납하는 것이다. 이러한 제안은 일본 정부에게도 “우리가 무엇인가 얻어냈다” 라는 체면치레를 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해 주는 것이고, 더불어 1965년 한일협정을 통해 국민의 권리를 부당하게 팔아먹은 한국 정부의 피할 수 없는 역사적 책임 역시 인정하는 것이다. 너무 오랜 시간동안 마음의 짐을 떠안고 살아온 피해자 분들에게 일본으로부터 진정성 있는 사과를 받을 수 있게 하고,  물질적 안위 역시 뒤늦게나마 조금이라도 보장해 드릴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일본과의 이 싸움이 외교의 문제, 현실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적 책임의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이 문제에 대한 우리 정부의 책임 역시 세탁하려 해서는 안된다. 아무리 전국민이 단결해서 항일 불매운동을 한다고 한들 그것만으로 일본 정치인들이 스스로의 잘못을 늬우치고 부끄러움에 바닷속에 뛰어드는 결말 따위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측의 작은 죄를 인정함으로서 저쪽이 스스로의 큰 죄를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명분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애초에 이 제안을 지금 우리 정부가 할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고, 지금의 일본 정부가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평생 일본과 각을 세우고 싸울 생각이 아니라면 쌍방이 모두 명분 하나씩은 챙겨갈수 있는 탈출구를 언젠가는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그 탈출구의 생김새를 고민해 볼 때 참고할 만한 하나의 방안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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