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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민 Nov 20. 2019

당신은 왜 정치를 하려고 하는가

이유가 정확하게 떠오르지 않는다면, 안하는게 낫지 않을까?

총선이 코앞이다.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라면 열띤 경선 대결에 관심이 쏠릴 때지만, 우리 나라는 유의미한 경선 없이 정당 마음대로 공천권을 나눠주는 곳이다 보니 경선이 아닌 인재 영입이라는 기이한 현상을 보고 있어야 한다. 아마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미 정당들은 조금이라도 관심을 끌어모을 수 있는 유명한 사람들에게 삼고초려를 다니고 있을 것이고, 러브콜이 올만큼 유명하지는 않은 야심가들은 반대로 어떻게든 정당에 줄을 대보려고 발버둥치고 있을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수많은 사람들이 정치권의 문앞을 맴돌며 들어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을 때다. 지금 그 문고리를 잡은 분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왜 정치를 하려 하는가?


나는 스무살 정도까지도 장래희망을 물으면 대통령이라고 대답하는 해맑은(?) 소년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강박적으로 하루종일 뉴스를 보고 또 역사를 읽는게 취미라 막연히 정치에 관심이 있어서 그런 것일수도 있겠지만, 따지고 보면 진짜 이유는 그저 갈곳없고 허황된 야심의 연장선이었던 것 같다. 시험이 있으면 당연히 잘 보고, 좋은 점수를 받아서 당연히 좋은 학교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딱히 좋은 학교를 나와서 하고 싶은 건 없었지만 그저 자만심에 젖어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높은 곳만을 바라보고 살았고, 내 눈에 보이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리는 대통령이었다. 막상 대통령이 되면 뭘 어떻게 바꾸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머리속에 단 한 문장 어치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철없고 부끄러운 시절이었다. 


그런데 내가 이십대 초반에 철들면서 버린 이런 생각을 아직도 가진 분들도 있는 것 같다. 그것도 어린애들이 아닌, 소위 “사회 지도층”의 어르신들이 말이다. 얼마전 총선 출마를 노리고 있는 친구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갑자기 정치가 왠말이냐며 만류하는 가족들에게 그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당연히 해야하는것 아니냐?” 라며 되려 성을 냈다고 한다. 애초에 공천을 노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만큼 자기 분야에서 성공하고 또 금전적으로 풍요로운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정치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당연히 해야하는 것," 딱히 이유는 없지만 그냥 올라가야 하는 내 출세의 다음 계단 정도인 것 같다. 아니, 단순히 정치권에 기웃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이미 권력의 핵심에 다가선 분들 중에서도 많은 수가 이 이상 깊이 스스로 정치를 하고싶은 이유를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닐까.


사실 이건 유서깊은 사고방식이다. 조선 시대 이후로 현대까지 우리 사회는 유난히 모든 권력이 중앙 정치권에 집중된 형태를 띄어왔고, 개인의 입신양명과 신분은 오로지 중앙 정치권에 얼마나 다가설 수 있는가로 결정되었다. 그나마 사람 취급을 받던 양반들 중에서도 가장 대우를 받았던 것은 과거에 급제하여 관료가 된 사람들이었고, 나머지는 잔반이라고 불리우며 멸시받았다. 현대에도 이 모습이 남아있는 것이다. 높으신 분들은 자기 분야에서 아무리 성공해도 공천 한번 받아보지 못하면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모양이다. 그래서 한국의 정치인은 하고싶은 이유가 있고 적성에 맞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특권이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하게 되는 것이 되어버렸다. 어차피 하고싶다고 할 수 있는게 아니라 기존 정치인들에게 잘 보여서 자격이 주어져야만 할 수 있는 체계라 더욱 그렇다. 정치인이 직업이 아니라 계급이 되버린 것이다.


물론 모든 정치인이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몇몇 빛나는 보석같은 분들이 있다 한들 명확한 이유도 없이 여의도에 굴러들어온 돌덩이 같은 분들에 둘러쌓여 있으니 그 빛이 바랠 수 밖에 없다. 딱히 하고싶은게 없는 분들이 권력을 잡고 휘두르다 보니 다음에 누가 또 권력을 잡는가만이 초미의 관심사고, 그 외의 문제에는 신경쓰지 않는다. 유권자도 권력 암투의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져 정말 본인의 아픔을 바탕으로 소외받은 사람들을 대변하는 정치인, 본인의 신념을 바탕으로 숭고한 원칙과 가치를 지키려 하는 담백하지만 실속있는 정치인들에게는 눈길을 주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정치권은 실제 세상에 사람들이 살아가고 아파하는 문제는 외면한 채, 후하게 쳐줘도 20년은 유통기한이 지난 고리타분한 이념의 문제에 매몰되어 있을 뿐이다. 


https://www.pilotonline.com/government/virginia/article_07d714b2-e347-55a4-b848-e4fd11c32440.html


2년 전 쯤 미국에서 뉴스를 보다가 다니카 로엠 버지니아 주의원의 당선 소식을 들었다. 로엠 의원은 2013년에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별을 바꾼, 미국 최초의 공개적 트렌스젠더 주의원이다. (과거에 성전환 사실을 숨기고 당선된 사례는 있었던 모양이다.)  33세의 평범한 지역신문 기자였던 그녀가 갑작스레 출마를 결심했던 이유는 스스로 “버지니아 최고의 호모포비아”를 자칭하며 성소수자 혐오 발언을 쏟아내던 13선의 베테랑 공화당 주의원 로버트 마셜을 끌어내리기 위해서였다. 마셜은 선거 내내 로엠과의 토론은 물론 만나는 것 자체를 거부했으며, 상대 후보 이야기를 할때마다 굳이 여성 대명사 “she” 대신 남성 대명사 “he”로 지칭하며 모욕을 주었다. 결국 접전 끝에 로엠이 승리를 거두었고, 그는 당선 소식을 듣고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의 축하 전화를 받은 뒤 감동하여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분명 그 순간의 감정은 남달랐을 것이다. 그는 정치를 안하면 안되는 절박한 이유가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총선 출마를 준비하는 분들 중에서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있다면 한번쯤 다니카 로엠을 떠올리면서 본인은 정치를 하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주었으면 한다. 흔히 권력을 잡으면 마냥 다 좋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정치는 힘든 일이다. 엄처난 시간과 돈을 날리고, 본인은 물론 가족까지 내 인생이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게 된다. 그런 희생을 감수하면서라도 손수 바꾸고 싶은, 참을수없이 나를 아프게 만드는 문제가 있는가? 꼭 정치권에 뛰어들어서 내 목소리로 국민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확고한 신념이 있는가? "당신은 왜 정치를 하려고 하는가?" 이 질문에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없다면 좀 아쉽더라도 하지 않는것이 본인과 가족을 위해서도, 나라를 위해서라도 나을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유가 있다면, 아무리 힘들더라도 절대 포기하지 말고 꼭 정치를 해주었으면 한다. 당신같은 사람이 하나라도 많아져야 한국 정치가 변한다. 


11월 초에 다시 뉴스를 보다가 다니카 로엠의 재선 소식을 들었다. 공교롭게도 같은 때, 한국은 박찬주 장군의 자유한국당 영입 소식으로 들썩거리고 있었다. 공관병 갑질이나 삼청교육대 막말같은 문제는 논외로 하더라도, 박찬주 장군과 같은 사람이 스스로 정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상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니 상상하지 않도록 하겠다.


아무쪼록 꼭 정치를 하셔야 되는 분들은 열심히 해 주시고, 굳이 정치를 할 필요가 없는 분들은 말아 주시는 21대 총선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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