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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민 Sep 06. 2018

정치인의 팬이 된다는 것


*2018년 1월 16일 티스토리 블로그에 먼저 올렸던 글을 옮겨왔습니다*


나는 뉴캐슬 유나이티드라는 축구팀을 정말 좋아한다.  처음에는 그냥 맨유나 첼시처럼 잘 알려지진 않았는데 나름 강팀이라 뭔가 간지나는거 같아서 생각없이 팬이 됬는데, 어느새 십오년 가까이 됬고 뉴캐슬도 벌써 네번이나 다녀왔다.  그런데 처음 팬이 됬을때는 분명히 강팀이었는데 그 이후로는 매년 한결같이 몰락세다.  10년쯤 전에는 아예 팀에 투자는 안하고 중계권료와 광고수익만 꼬박꼬박 챙겨먹기로 작정한 질 나쁜 오너가 들어서더니 그 이후로는 강등권과 강등을 오가는 본격적으로 답없는 팀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이 팀을 보고 슬픔이나 분노 이외의 감정을 느낀게 언젠지 기억도 가물가물한데, 그래도 축구팀과 조강지처는 바꾸는게 아니라고 하니, 욕하면서도 억지로 꾸역꾸역 경기를 보고 응원하다 보니 여기까지 와버렸다.  이 팀에 대한 팬심으로만 치면 뉴캐슬에서 태어나고 자란 왠만한 사람하고 부대껴도 자신있다.

 

팬심이란게 이성적으로만 보면 말이 안되는 감정이다.  축구팀이 됬든, 아이돌 가수가 됬든, 애정의 대상은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나는 그냥 대상이 잘되면 마냥 좋다.  뉴캐슬 유나이티드처럼 적극적으로 팬들에게 고통을 주는(...) 존재들조차 무조건 믿고 따라가는 팬들이 있다.  아니, 그런 팬들일수록 더 충성스럽고 본받을 만한 사람들로 묘사된다.  중계방송을 보면서 팀은 박살나고 있는데도 경기가 끝나는 순간까지 응원가를 부르는 뉴캐슬 팬들을 보고 "세계 최고의 팬 (best fans in the world)" 이라고 추켜세우는 해설자의 멘트를 듣고 쓴읏움을 지어본게 한두번이 아니다.  


요즘 서울시내 지하철에 등장한 문재인 대통령의 생일 광고로 인해 "정치인팬"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분야만 다를뿐 나도 빡쌔게 팬질을 해본 사람이니, 남들이 뭐라 하든 애정을 표현하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팬이 된다는건 그 애정의 대상이 아무리 날 힘들게 하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마음은 변치 않기로 하는 것이다.  정치인은 절대 이런식으로 좋아해선 안된다.  처음엔 마냥 좋아서 뽑았다고 하더라도, 알고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사람은 아닌지, 권력을 잡고 초심을 잃어 변하는건 아닌지 끊임없이 감시하고 견제해야 한다.  이를 위해 유권자는 팬이 아닌 투자자의 마인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자신의 소중한 한 표로 가장 큰 수익율을 만들어줄 수 있는 사람에게 투자하고, 또 그러다가 그 사람의 수익율이 떨어지거나 조금이라도 더 큰 수익율을 만들어줄 사람이 나타나면 미련없이 돌아서야 한다.  유권자가 아닌 팬이 되버리면 더이상 나의 원하는걸 해줄 사람을 지지하는게 아니라, 내가 지지하는 사람이 원하는게 내가 원하는 것이 되버린다.  그렇게 더이상 감시와 견제를 받지 않는 권력은 무지하게 편해지고, 편하게 휘두르는 권력은 반드시 언젠가는 독재의 경계를 넘나들게 된다. 


지지자들이 자발적으로 낸 광고 하나 가지고 대통령이 독재자가 된다는 헛소리를 하려는건 아니다.  이분은 적어도 소위 말하는 문꿀오소리들의 열광적인 성원을 등에 업고 민주주의의 엎어버릴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로 맹목적으로 지지해도 별문제 없는 훌륭한 지도자라고 하더라도 그래서는 안된다.  위험한건 대통령 이전에 우리의 마음가짐이기 때문이다.  좋아하던 대통령이 임기가 끝나고 떠난다고 해서 한번 정치인을 팬으로 바라보던 사람이 다시 이성적 유권자로 돌아가는건 쉽지 않다.  그보다 훨씬 쉬운 건 또 새로운 동경의 대상을 찾아 옮겨가는 일이다.  계속 이렇게 옮겨 다니다 보면 언젠가는 능숙한 이미지 메이킹으로 무슨일이 있어도 본인을 믿고 따르는 팬들의 힘을 민주주의 질서를 위협하는 무기로 휘두르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러시아가 블라디미르 푸틴을, 미국이 도널드 트럼프를, 대한민국이 박근혜를, 그리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아돌프 히틀러를 만났듯이 말이다.  


대통령은 국정 운영도 잘해야 하지만, 그와는 별도로 민주주의의 핵심이 되는 가치들을 지킬 책임도 있다.  비판적 유권자가 아닌 충성스러운 팬으로서 정치인을 우상화하는 것이 민주주의에 어떻게 위협이 되는지는 젊은 시절 거리에 나서 독재와 맞서기도 했던 대통령 본인이 가장 잘 알 것이다.  물론 개인이 돈을 모아 자발적으로 낸 광고를 국가가 함부로 철거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대신 청와대에서 광고를 낸 분들에게 따로 연락해서 마음만 받겠다는 뜻을 전한다면 어떨까?  이미 광고비를 지불한 부분에 대해서는 서울교통공사와 협조하여 환불해 주거나 아니면 자선 단체나 공익 사업을 위해 활용할 수 있도록 기부하는 방법도 있다.  대통령이 직접 광고를 정중히 사양하고, 본인이 왜 이런 형태의 지지를 원하지 않는지 명쾌하게 설명해 주기를 기대한다. 그게 본인의 팬들과 국민 모두에게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멋있는 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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