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주민 Jul 09. 2020

안희정이 지키는 빈소와 고민이 없었던 사람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0070714120000566

형사 의뢰인 중에는 정말 무죄인 억울한 분들도 있지만, 보통은 그래도 뭔가 법에 저촉될 만한 일을 하신 분들이 더 많다. 계속 만나다 보면 그런 분들도 머리속에서 세 가지 정도 부류로 나뉘게 되는것 같다.


첫째, 악의는 없지만 본의아니게 일에 휘말려 죄를 짓게 된 분들이다. 이런 분들은 보람을 느끼면서 즐겁게 변호해 드릴 수 있다.


둘째, 솔직히 악당 같지만 그래도 의뢰인으로 받을 수는 있는 분들이다. 변호하면서 보람이 느껴지진 않지만 죄와 상관없이 형사 피의자로서의 방어권이 있다고 믿기에, 열심히 변호해 드린다.


셋째, 너무 죄질이 나빠서 방어권이고 뭐고 도저히 변호해 드릴 수 없는 분들이다. 다행히 이런 분들은 애초에 법무법인에서 잘 수임하지 않는다. 


변호사가 된 이후 확고해 진거지, 그 전에도 내 머리 속에는 이런 분류가 있었던 것 같다.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일거라고 생각한다: (1) “살다보면 그럴수도 있지” 싶어 평가가 크게 변하지 않는 사람; (2) 잘못했지만 그래도 죄값을 치루면 종전의 평판을 회복할 사람; (3) 너무 죄질이 나빠 도저히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 사람. 주변에 죄를 지은 분이 생기면 으레 이 세 가지 중 하나로 생각하게 되는것 같다.


며칠전, 모친상을 당해 잠시 출소한 안희정에게 여당의 유력 정치인들이 찾아가고 대통령이 조화까지 보내는 모습이 끔찍하게도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오랜 친구이자 동지에게 온정을 보내고 싶었던 인간적인 마음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우리 나라를 움직이는 권력자인 그들에게서 안희정이 지키는 빈소를 찾아가는 사실에 대한 조금의 고민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안희정은 내 가까운 친구였다면 간신히 (2)의 끄트머리 정도에 있었을 사람이다. 그래도 (3)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마저 내가 한국에서 자란 한국 남자로서 아직 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해서 그렇게 느끼는 건지 약간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빈소에 모습을 드러낸 권력자들에게 안희정은 (1), 그것도 고민이 필요없을 정도로 당연한 (1)이었다. 누구보다도 더 여론의 미미한 변화에 민감하신 대통령께서 “대통령 문재인”이라는 여섯글자가 대문짝만하게 써진 거대한 조화를 보내셨다. 대선까지 지지율 관리를 위해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할 유력한 차기 주자도 당당히 카메라 앞에 나타나 안희정의 손을 맞잡았다. 이번에 통일부 장관으로 내정된 이인영 의원은 심지어 안희정의 경험을 본인이 학생 시절 민주화운동을 하며 옥살이 하던 것에 빗대며 “굉장히 마음이 무겁다”고 이야기하기까지 했다. 


이들이 무조건 빈소를 찾지 말아야 했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나는 최소한 주변의 눈을 의식하여 low-key로 하려는 고민의 흔적이 보고 싶었다. 기자들이 없는 늦은 밤시간에 조용히 찾아가거나, 개인적인 방문이니 사진은 찍지 말아달라고 의례적인 부탁이라도 하는것 말이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여론에 민감해야 할 정치인임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당당했던 모습으로 인해 결론은 피할수 없게 되었다: 그들에게 안희정이 했던 일은 인간관계를 재고해야 할 만큼 심각한 범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위계에 위한 성폭행이 현대사회의 까탈스러운 페미니즘으로 인해 새로 생겨난 요상한 범죄가 아니라는건 춘향전의 내용 정도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동안 우리가 심각한 범죄라고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꽃뱀이 갑자기 말을 바꾸면 누구든 구렁이 담넘어가듯 억울하게 범죄자가 될 수 있는 일은 더더욱 아니다. 권력을 휘둘러 강제로 성행위를 하는 사람에게는 무기를 휘둘러 강제로 성행위를 하는 사람 만큼이나 본인이 잘못된 일을 하고 있다는 자각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안희정은 그걸 알면서도 한두번도 아닌 수차례 반복해서 피해자를 성폭행한 사람이다. 그런 범죄자를 지금 대한민국 최고의 권력자들이 “안타깝게 곤경에 처한 동지”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번 일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한국인의 평균적인 성에 대한 관념은 내가 성인이 된 후 15년만 보더라도 크게 변했다. 그래서 기성 세대가 단지 그 격변을 따라가지 못했다고 해서 악마화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 기성 세대가 법과 제도를 움직일 힘을 가진 권력자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런 힘을 가진 순간, 본인의 머릿속에 편견이나 악습이 없는가 항상 경계하고, 억지로라도 고쳐야할 의무가 있다. 그렇지 못할 경우 그 편견이나 악습이 부조리한 제도의 사슬이 되어 고스란히 우리 사회의 약자들을 옭아매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국무위원, 차기 대통령에게 그정도의 경각심을 요구하는 것이 무리한 부탁일까.


손정우가 출소하고 안희정이 지키는 빈소에 대통령의 화환이 나타난 2020년 7월 6일, 그날만큼 대한민국의 여성에게 권력자가 만든 부조리의 사슬이 더 무겁게 느껴졌던 날은 없었을것 같다. 



트위터: https://twitter.com/oldtype


글쓴이는 평범한 관심바라기입니다.  읽어보고 공감하셨다면 밑의 하트모양이 "like it" 버튼을 눌러주세요

작가의 이전글 차별금지법이 가장 급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