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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민 Sep 06. 2018

자유가 빠진 보수에 미래는 없다


*2018년 1월 30일 티스토리 블로그에 먼저 올렸던 글을 옮겨왔습니다*


보수든 진보든 정치적 이념이란건 다 국가와 개인간의 거래에 관한 이야기다.  차이는 그 거래의 내용이다.  보수주의는 개인이 납세, 병역 등 최소한의 의무를 지키는 것을 대가로 국가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고 간섭을 최소화하는 것을 지향한다.  반면 진보주의에서는 국가가 최소한의 경제적 안정을 보장해 주는 것을 대가로 개인은 국가의 폭넓은 통제를 받아들이다.  보수와 진보의 차이는 결국 거래의 무게 중심을 상대적으로 개인 쪽에 두는가, 국가 쪽에 두는가의 문제다.  물론 순수한 보수, 순수한 진보 같은건 상상속의 존재일 뿐이고, 대부분의 사람은 둘이 어느정도 섞인 입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다만 굳이 어설프게 일반화하자면 보수는 자유주의, 진보는 국가주의에 각각 그 기반을 두고 있는게 기본이라는 거다.  


그런데 현대 정치사를 돌면 보수주의가 국가주의와 결합하는 묘한 경우를 찾을 수 있다.  바로 독재 정권의 파시즘이다.  독재 정권에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중요시하는건 건 넌센스다 보니 필연적으로 국가주의적 요소에 기댈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렇게 만들어진 국가주의 보수 체제는 또 하나의 근본적인 모순으로 이어진다.  진보주의에서 개인이 국가에 강한 권력을 위임하는 것은 대가로 공정한 재화의 분배를 보장받기 때문이다 (과연 비대해진 국가 권력이 공정하게 재화를 분배할까라는 현실적인 문제는 일단 논외로 해두자.)  그러나 진보주의에서 국가주의만 쏙 빼온 파시즘은 위임은 받아 놓고 분배같은건 하지 않는다.  오로지 재화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여 국가 권력을 더욱 강화하고 권력자의 배를 불리는데 사용할 뿐이다.  애초에 제정신이면 이런 거래를 할 리는 없으니 파시즘은 대신 폭력과 속임수에 의존한다.  지도자는 우상화되고, 국가에 대한 희생은 미화되며, 외부인이나 소수자에 대한 증오를 조장해서 "그래도 쟤네보다는 낫지" 하는 정서로 자국의 문제점에 대한 불만을 잠재운다.  국가주의에 잠식된 보수주의의 개인은 더이상 합리적 거래의 한 축이 아닌, 폭력적인 국가권력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게 된다.  

한국 보수주의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폭력적 국가주의를 벗어난 적이 없다.  건국 이후 보수 진영은 독재와 반공의 토양에서 자라나 국가주의라는 양분을 먹고 자랄 수 밖에 없었다.  비민주적인 절차로 권력을 잡은 지도자들은 우상화되었고, 국가의 이익을 위해 개인이 희생되는건 미화를 넘어 당연시되었다.  이런 체제는 북한과의 대치상황을 이용해 더욱 정당성을 얻었고, 국가 권력에 의문을 제기하는 수많은 개인들은 "국가 안보"를 위해 친북, 용공의 딱지가 붙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민주화 이후에도 보수 진영은 독재 세력과의 연결고리를 확실히 끊지 못했고, 폭력적 국가주의의 굴레 역시 벗어나지 못했다.  87년 이후 이 나라의 가치가 된 자유, 민주주의, 법치에 전면적으로 반하는 과거 독재자들의 정당성을 부정하기는 커녕, 때로는 도리어 강화하려고도 했다.  지도자가 될 능력도, 의지도 없었던 박근혜 대통령을 단지 비교적 유능했던 독재자의 딸이라는 이유로 청와대까지 보낸 후 그가 국가 권력을 무기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짓밟는 것을 방조한 모습이 최근까지 한국 보수진영의 민낯이었다.  



탄핵은 단지 무능한 대통령 한명이 물러난 것을 넘어, 지금까지 한국 보수 그 자체였던 폭력적 국가주의가 몰락했음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박대통령은 지금까지 50년 넘게 우려먹은 국가주의적 클리쉐의 집대성이었고, 그의 퇴진은 우리가 이제는 더 이상 낡은 국가주의 보수가 성공할 수 없는 나라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고정 지지층을 넘어 다수의 국민이 지지할 수 있는 새로운 기반을 만들기 위해서 한국 보수주의는 이제 처음부터 다시 태어나야 한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한국 보수주의" 라는 것 자체가 지금까지 멀쩡하게 존재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독재를 합리화하기 위해 보수주의의 탈을 쓴 폭력적 국가주의가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보수의 부활은 단지 선거를 이기고 합당을 하면서 국회의원 숫자를 늘려서 될 일이 아니다.  국가주의, 반공주의, 그리고 증오의 구태가 비집고 들어와 있던 자리를 지금이라도 제대로된 새로운 보수주의가 다시 찾아와야 한다.  


이제서야 처음 제대로 만들어지는 한국 보수주의의 정책 기조는 국가가 아닌 개인에 힘을 실어주는 자유주의에 중심을 둬야 한다.  경제 분야에서는 정부의 지원을 받는 회사, 정책적으로 육성받는 산업만 성공할 수 있는 국가주의 경제구조를 버리고, 큰기업 작은기업 구분 없이 모두가 평등한 조건에서 경쟁하는 시장을 만들어야 한다.  안보 분야에서는 "공산당은 일단 닥치고 나빠" 하는 단순해 빠진 반공주의에서 벗어나 북한 체제에 대한 비판의 정당성을 북한 동포들의 인권 문제에서 찾는 새로운 메세지를 만들어야 한다.  사회 분야에서는 그동안 획일화된 국가주의 사회의 음지에서 외면되어 온 여성, 성소수자, 다문화 가정 등에 대해서는 보수 진영이 더 적극적으로 나서 그들이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위해 싸워야 한다.  그리고 과거의 폭력적 국가주의로 인한 부끄러운 과거를 더이상 피해다니지 말고, 똑바로 인정하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아야만 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국가를 위해 개인이 희생하는 일을 더이상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최근 문재인 정부의 실책으로 지적되고 있는 평창 올림픽 단일팀 문제, 암호화폐 규제 문제는 국가주의에 기반할 수 밖에 없는 진보주의의 약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둘 모두 남북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좋은 정책, 또 암호화폐 투기를 방지하기 위해 좋은 정책을 생각하기 이전에 이를 위해 희생되는 국민의 권리는 무엇인가를 고려하지 않아 나온 결과다.  정부의 이런 독단적인 행동에 왜 많은 국민들이 뜻을 모아 반발하고 있는지 고민해 보면 앞으로 보수가 나아갈 길 역시 보인다고 생각한다.  


"보수 적통" 이라는 정체불명의 감투를 잡아보겠다고 경쟁하는 수많은 세력 중 나는 앞으로 보수 진영을 이끌 것이 누군지 알지 못한다.  솔직한 말로 10년쯤 후에도 우리 정치권에 유의미한 보수당이 존재하기나 할지도 별로 확신이 없다.  다만 한가지 확신하는 것은 미래의 보수 진영은 소득과 분배, 반공과 친북과 같은 과거의 단순한 대립구도를 벗어나 지금까지 양쪽 진영 모두에 팽배해 있던 국가주의에 대항하여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변호하는 역할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다면 이 나라에 보수같은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고, 사실 존재할 가치도 없을 것이다.  자유가 빠진 보수에는 미래가 없고, 오로지 자유주의만이 보수의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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