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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민 Sep 06. 2018

남북정상회담과 "민족의 과업"


*2018년 4월 27일 티스토리 블로그에 먼저 올렸던 글을 옮겨왔습니다*


남북정상회담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북한의 미사일 도발과 트럼프의 트위터 도발(...)로 인해 동원령 발동되면 정보업무 볼줄 모르는 정보특기 예비역 중위는 대체 어디로 보내나 진지하게 고민하던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한반도는 최악의 긴장국면에서 전향적인 평화국면으로 목디스크라도 걸릴듯한 180도 태세전환이 이루어졌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풀릴지는 모르지만, 외줄타기하듯 정교한 외교로 한미동맹에 큰 상처를 입히지 않으면서도 미북간의 긴장을 해소하는데 성공한 정부의 수완은 높게 평가할 수 밖에 없다.  어렵게 이뤄낸 성과이니 만큼 정부는 정상회담에 "올인"하는 분위기다.  얼마전 청와대 대변인 논평에서는 문재인 정부의 각오가 드러나는 인상깊은 표현이 나왔다.  "봄 날씨처럼 변덕스러운 비난에 흔들리지 않겠습니다.  그저 우리에게 주어진 민족적 과업을 묵묵히 실천해 나가겠습니다" 라는 말이었다. 


민족적 과업이라 함은 물론 해방 이후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둘로 갈라진 후 정신차려보니 어느덧 칠십년이 지나버린 민족 공동체를 다시 하나로 만드는 일, 즉 "통일"이다.  그리고 통일까지 가는 첫 단계가 남북간의 긴장을 해소하고 한반도에 다시는 전쟁의 악령이 기웃거리지 못하게 하는 "평화"라는 사실 역시 누구도 이견을 제시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글을 통해 평화에서 시작해서 통일로 끝나는 민족 공동체 복원의 과정에 한 단계가 더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싶다.  바로 "청산"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청산이라는 단어를 쓸 때는 보통 친일파 청산 이야기다.  건국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돌아보면 이유야 여러가지가 있었겠지만,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대한민국은 친일파 청산에 완벽히 실패했다.  시작할 때 잘못 박은 이 말뚝은 이후 우리 현대사에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  칠십년이 지난 지금도 까먹을때쯤 되면 페북이나 트위터에 가끔씩 "프랑스는 35만명의 나치 부역자를 처벌하고 10,000명을 처형했다"라는 식의 짤방이 돌아다니는게 보인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숫자도 틀렸고 저것도 나름 문제가 많아서 마냥 부러워할 일은 아닌데, 그냥 저런게 인기를 끄는 것 자체가 우리 국민들이 친일파 청산 실패로 인해 경험한 상처의 깊이를 보여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통일 과정에서는 반드시 제대로된 청산이 이루어져야 한다.  물론 북한 정권 세력의 청산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북한 정권이 무소불위의 국가 권력을 매개로 북한 동포들에게 행하는 폭력은 일제가 우리 조상들에게 가했던 것과 견주어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이런 폭력의 역사를 묵인하고 통일 과정에서 구 북한 정권 세력의 기득권을 인정한다면 새로 만들어지는 통일 한국에 여러모로 치명적인 장애가 될 수 밖에 없다: 첫째, 그들로부터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북한 동포들의 신뢰를 잃어 그들을 민족 공동체에 동화시키기 어려워질 것이다.  둘째, 자유민주주의에 기반한 국제질서 내에서 국가적 정당성을 잃을 것이다.  셋째, 북한 정권 세력 청산의 실패는 친일파 실패와 마찬가지로 결국은 공동체 전체의 깊은 상처가 되어 미래에도 갈등을 야기할 것이다.  물론 통일까지 가는 과정을 원활히 하기 위해 일정부분 관용을 베푸는 정치적 선택의 여지는 있다.  하지만 적어도 현재 북한 정권의 주축을 형성하는 세력이 통일 이후에도 정치 권력으로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친일파 청산 실패라는 큰 실수를 다시 한 번 더 크게 반복하는 일이다. 


북한 정권 세력을 청산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경제 제제를 비롯한 "최대의 압박"을 통해 정권 붕괴를 유도하는 것이 맞을수도 있지만, 반대로 경제 협력을 열심히 해서 북한을 세계 경제에 편입시키고, 80년대의 우리 나라 처럼 자연스러운 정치권력의 이양을 유도하는 것이 최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청산이 필요하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공감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정상회담을 만들어낸 정부의 수완은 높이 평가하면서 정상회담을 준비하는 정부의 자세에서는 미묘한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다.  북한 정권과의 대화는 당연히 필요하다: 일단은 당장은 전쟁을 막아야 하고, 지금은 북한 동포들의 삶에 우리가 영향을 주고 싶어도 창구는 불행히도 정권밖에는 없다.  하지만 정권과의 대화는 최종 목표를 이루기 위한 필요악일 뿐, 그것 자체가 최종 목표는 아니다.  결국 그들은 통일을 위한 협력의 당사자가 아닌, 통일을 위해 청산해야 할 대상자이기 떄문이다. 그래서 정상회담을 둘러싸고 축제 분위기를 만들고 마치 북한 정권과의 화해 그 자체가 '민족적 과업'의 완성이라는 듯 기뻐하는 모습은 조금은 불편하다.  우리는 아직 길고도 불편한 여정의 첫걸음을 내딛고 있을 뿐이다. 


통일로 가는 길에서 조심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적화통일이다.  아, 물론 보수집회에 나가는 어르신들이 말씀하시는, 북한이 다시 탱크를 끌고 휴전선을 넘어 서울을 점령하는 그런 적화통일 얘기는 아니다.  지금 우려되는 것은 무력의 적화통일이 아닌, 가치의 적화통일이다.  즉, 민족 공동체를 복원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인해 북한과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우리의 소중한 가치는 무엇인가 잊어버리는 일이다.  이를테면 민주주의, 인권, 언론의 자유, 그리고 정치를 뛰어넘어 인간과 인간으로서 서로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도리 같은 것 말이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구분짓는 가장 큰 선은 자본주의 따위가 아니라 바로 이런 소중한 가치를 지키는가, 그렇지 않는가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과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우리의 가치는 더 소중히 여기고 철저히 지켜야 한다.  가치의 문제를 작은 문제로 보고, "민족의 과업"이 무엇보다 중요하니 잠깐 접어두고 가도 괜찮다는 식으로 접근하다 어느날 거울을 보면, 북한 사회와 크게 다를바 없는 우리 사회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게 바로 적화통일이다.  


내일 남북 정상회담이 한반도 평화를 향한 첫걸음, 그리고 민족 공동체의 복원을 위한 초석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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