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역사 속 내던져진 한 인간의 고민
*항상 그럴것이지만,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말투는 조금 건방질지도 모릅니다.
그 전에, 영화란 무엇인가?
사진이 발명된 이후 19세기 말, 고속으로 사진을 연속으로 찍은 후 그 사진들을 영사시키면 마치 사진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렇게 뤼미에르 형제들의 손에 의해서 최초의 영화 <열차의 도착>이 만들어지고, 한 작은 카페에서 상영되었다. movie라는 단어는 moving pictures라는 말에서 기원하였다는 사실에서 보이듯이, 영화와 사진을 구분 짓는 가장 본질적인 영화만의 특징은 바로 ‘움직임’이다. 이 움직임이 영화만이 가지는 힘의 원천이며 본질인 셈이다.
레오스 까락스는 무슨 생각을 할까?
레오스 까락스 감독의 <홀리 모터스>는 최초의 영화가 나왔던 시기에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는 하나의 활동사진을 먼저 보여주며 시작한다. 이후 레오스 까락스 본인이 직접 연기하는 오프닝 극장 시퀀스는 이 영화가 개인적인 영화라는 것을 몸소 보여준다. 창밖으로 보이는 비행기, 극장에서 들리는 자동차 클락션 소리와 뱃고동 소리로 탈 것(VEHICLE)들을 전부 노출시키지만, 움직이는 이 것들과는 다르게 자고 있는, 아니 죽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관객들을 동시에 보여준다. 앞으로 나는 어떻게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지, 영화계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고민을 보여준다. <홀리 모터스>는 개인적인 영화라고 말했던가? 그렇다. <홀리 모터스>는 1999년 <폴라X>이후 13년 만에 만든 작품이다. 천재 소리를 들으며 화려하게 데뷔했지만, 이후 좋지 않은 평가들도 받고 심지어 같이 영화를 찍었던 여자친구마저 요절했다. 그 이후 레오스 까락스는 13년동안 메가폰을 들지 않았다. 그런 다사다난한 삶을 살던 인간이 정말 오랜만에 내놓은 작품인데 어떻게 개인적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영화는 무슨 영화인가?
무기력감
이 영화는 단순히 드니 라방이 여러 가지 삶을 살아간다는 내용이 전부가 아니다. 드니 라방이 어떠한 연기를 하느냐에 따라 이 영화의 연출적 스타일이 바뀌며 장르 또한 바뀌게 된다. 드니 라방 본인만이 아니라, 마치 지금까지 ‘영화’라는 매체가 얼마나 다양한 옷을 입고 우리 앞에서 등장했었는지 요약해서 알려주는 것에 더 가깝다. 이 짧은 시퀀스들이 모여서 하나의 영화를 구성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 <홀리 모터스>라는 하나의 영화를 이해하려고 하니 난해하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하다. 시퀀스들을 각각 다른 영화라고 생각하면 이 영화는 신파, 애니메이션, 공포, 드라마, 뮤지컬, 느와르 등 여러 가지 영화적 장르를 느끼게 해준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지점은 각각의 시퀀스가 끝나고 드니 라방이 리무진을 타면 안에서 분장을 새로 하는 모습을 꼭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 때는 아무 장르가 아니고 마치 비어있는 백지장 같은 느낌을 주게 되는데,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고 끊임없이 다음 연기를 준비하는 드니 라방의 무표정한 표정에서 삶에 대한 환멸, 그것에 공감하는 우리는 뭉클함 마저 느껴진다. 이 지점이 진짜 이 영화가 말하려 하는 중요한 지점이기에, 앞에서 끊임없이 여러 장르적 스타일을 보여줘야만 하는 이 영화의 특성상 드니 라방이 리무진에 있는 장면은 아무 기교가 없다. 한 배우가 계속 연기를 반복하기위해 준비하는 이 장면은 아무 에너지도 없고 무기력하기만 하다. 지금까지 배우, 감독, 영화, 심지어 일반인들조차 얼마나 많은 가면을 쓴 채 다양한 모습으로 다른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는가? 그 이후 혼자만 있는 집에 돌아갔을 때는 반대로 얼마나 공허한가? <홀리 모터스>는 에너지 넘치는 영화지만 놀랍게도 속 안은 서늘하도록 무기력하다.
레오스 까락스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는 드니 라방의 원맨쇼에 가까운 이 영화는 마치 여러 개의 시퀀스들이 연관성 없이 나열되어있는, 당최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것 같다. 처음에는 드니 라방이 리무진을 타고 다니며 전혀 다른 삶을 사는 것으로만 보이지만, 드니 라방이 두 명이 나오기도 하고 실제로 칼에 찔리고 총에 맞았음에도 다시 벌떡 일어나는 모습들은 저 곳이 실제 세상이 아님을 보여준다. 저 곳은 즉 영화 속의 세계이며 저 안에서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 배역이 아닌, 그 배역을 연기하는 배우일 뿐인 것이다.
차 안에서 선글라스를 낀 남성이 드니 라방에게 이 일을 왜 계속 하는 거냐고 묻자 드니 라방은 연기의 아름다움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아름다움은 보는 이의 눈이 결정한다는 남성의 말에 드니 라방은 “더 이상 보는 사람이 없다면?”이라고 반문하게 되는데, 이 대화가 사실 이 영화의 모든 것을 함축한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보여주듯이 더 이상 관객들은 예전처럼 영화를 보지 않는다. 관객들은 모두 죽어있다. 그럼 배우인 드니 라방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감독인 레오스 까락스는 어떻게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가?
(움직이지 않는) 죽음
이 영화는 죽음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드니 라방과 같이 리무진을 타고 연기를 하는 여성이 드니 라방과 대화를 나눈 후 고층 건물에서 뛰어내리게 되는데, 마치 그 여성이 배우로써의 삶으로부터 도주할 수 있는 길처럼 보인다. 사실 그 둘의 대화조차 언뜻 보면 잠시 만나서 얘기를 나눈 것으로 보이지만, 대화할 시간이 30분 남았다는 여성의 대사가 나올 때 정확히 영화가 30분 남았다는 점에서 이 대화조차 예정되어있었던 것 같다. 그 전에 드니 라방이 죽어가는 노인 연기를 하는 시퀀스에서는 “죽음도 좋지만, 사랑이 없다.”는 대사를 하게 되는데 이 여성이 투신한 이후에 이 대사를 곱씹어 보면 찡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쯤 되면 이 영화의 제목 <홀리 모터스>는 ‘신성한 모터’라는 의미보다는, 아무도 봐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찍어야 하고, 배우로써 연기를 해야 하고, 리무진으로써 움직여야만 하는 현 세태에 대한, ‘빌어먹을 모터’와 같은 감탄어로 들린다는 이동진 평론가님의 의견에 적극 공감한다. 그렇다면 현재 관객으로써 우리는 이 영화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이 영화는 사실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영화로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물어보는 것 같은 영화다. 하지만 마치 질문의 대상이 꼭 관객들에 국한이 되어있다는 느낌 또한 들지 않는다. 마치 레오스 까락스, 드니 라방이 각자 자기 자신에게 자문하는 듯한 느낌이 더 강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를 보는 것이 우리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것 또한 아니다.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우리가 지금까지 영화를 어떠한 시선으로 바라봤는지, 앞으로 영화는 어떻게 봐야 하는지, 더 나아가 저렇게 치열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관객들 또한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마무리
영화의 태동부터 여러 장르적 기법, 그리고 그것들이 모여 완성된 이렇게 모던한 영화까지, 우리는 이 영화로 지금까지 영화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보았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맨 처음과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19세기에 촬영된 벌거벗은 남성의 움직임을 보고도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영화’라는 한 가지 매체를 위해 살아온 레오스 까락스는 이 영화를 자신의 오랜 연인 예카테리나 골루베바에게 바쳤다. 자신과 함께 <폴라X>를 찍고 이 영화가 만들어지기 1년쯤 전에 의문사한 배우인 그녀의 존재는 레오스 까락스에게 커다란 존재일 것이다. 그와 그녀만이 알 수 있는 요소들도 분명 이 영화에 포함되어 있을 것이고, 레오스 까락스 본인이 입을 열지 않는 이상 그런 의미들은 우리는 영영 모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 의미들은 정녕 모를지라도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영화로 인해 천재가 되었다가 영화로 인해 망가져간 그의 이러한 개인적인 영화라는 것 자체에서 많은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이런 영화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본 리뷰는 페이스북에 2018년 10월 25일 게재한 리뷰를 일부 수정한 글입니다.
https://www.facebook.com/suepeisueba/posts/2031677163557325
*페이스북 : https://www.facebook.com/suepeisueba
*인스타그램 : @spacebar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