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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이스바 Dec 30. 2021

<무서운집>

당신은 과연 의도와 열정까지 비웃을 수 있을까?

*항상 그럴것이지만,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말투는 조금 건방질지도 모릅니다.


사랑해주고 싶은 영화


가장 영화에 미쳐있던 고등학교 시절, 딱 한 번 상영하는 양병간 감독님의 <무서운집>을 2시간을 넘게 서울 조이앤시네마로 달려가서 감상했던 기억은 나에게는 결코 잊지 못 할 경험이다. 그 후 vod를 구매해서 한 번 더 감상했었고, 군대에서 선임들과 함께 감상하기도 했었고, dvd까지 구매해서 최근에 한 번 더 감상하였다. 몇 번을 보아도, 아니 볼 수록 더 사랑스러운 영화다. 누구에게나 가끔 이렇게, 남들이 뭐라고 하든 미치도록 사랑해주고 싶게 만드는 영화가 가슴 속에 들어오는 경험이 있을 것이다. 축복인지 저주인지, 나에게는 이 영화가 그렇다.


(일부러) 못만든 영화


영화 <무서운집> 스틸컷

토미 웨소 감독의 <더 룸>은 놀라우리만치 못 만든 완성도 때문에 컬트적인 인기를 얻은 영화이다. 하지만 <무서운집>은 못 만든 영화가 아니라, 일부러 뻔뻔하게 못 만든 영화인 척 하는 영화다. 90회가 넘어간 촬영 기간 내내 양병간 감독은 연극배우 출신인 구윤희 배우에게 끊임 없이 어색한 연기를 주문하였으며, 상업 디자인에서 거의 사용될 일이 없는 기본 굴림체 폰트로 예고편과 타이틀, 엔딩 크레딧을 작성하였다. 양병간 감독의 전작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는 경험이 없는 초보 감독이 결코 아니다. 개봉 당시 SNS상에서 화제였던 예고편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본편은 더욱 강렬하게 도대체 이게 뭔가 싶은 당혹감과 피식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끌어내기 위한 감독의 의도가 담겨 있다. 이 뻔뻔한 '컨셉질'을 통해 영화 속 내용을 초월한 메타적인 코미디가 형성된다. 밀로스 포먼의 [맨 온 더 문]에서 일부러 굉장히 긴장하고 쭈뼛거리는 초짜 스탠딩 코미디언을 연기하여 코미디를 이끌어내는 앤디 카우프만이 영화를 찍는다면 이런 영화가 나오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성공한 영화라고 볼 수 있다.


기성세대에 저항하는 기성세대

<무서운집>이 세상 빛을 본 2015년 당시 양병간 감독님의 나이는 한국 나이로 66세였다. 영화감독 중에서도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었으며, <무서운집>은 감독의 전작 <태양 속의 남자> 이후 21년만에 나온 영화였다. 21년이라는 기간동안 영화 기술과 한국 영화는 빠르게 변화해왔다. 철 지난 늙다리 감독이 만들어서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올드한 영화가 나오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 수도 있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을 모두 비웃는 것 처럼, <무서운집>은 반대로 스스로 아웃사이더를 자칭하는 영화로 모습을 드러냈다. <무서운집>은 이야기가 아니라 연출적인 면에서 소위 '병맛'이라고 부르는 기믹을 선택했으며, 이는 전혀 올드하지 않고 오히려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코드다. 곧 할아버지 소리를 들을 66살 감독도 이런 영화를 찍는데, 너희들은 뭐하는 거냐며 젊은 영화인들에게 일갈하는 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는 철저히 기존의 영화의 문법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공포영화는 공포를 주는 존재에 대해 간단히 언급만되고 진짜 그 존재의 모습은 중반부부터 보여주는 것이 정석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시작한지 6분 30초만에 바로 귀신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이후 귀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집안일과 식사장면, 수면 장면으로 약 30분을 소비하며, 그 이후는 종교나 초월적인 힘을 사용하는 것이 아닌 나무 막대나 칼과 같은 물리공격을 이용하여 귀신과 사투를 벌인다. 이 영화의 진짜 장르인 코미디의 관점에서 봐도, 우스꽝스러운 상황이나 대사로 코미디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 시종일관 어색한 연기와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장면들의 반복을 통해 이 영화가 막나가려고 작정한 것 같은 뉘앙스를 폴폴 풍기며 내용 외적인 부분에서 코미디를 형성한다.


다른 예술의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영화 역시 기존의 것으로부터 저항하는 시도들을 통해 발전해왔다.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이나 거기에 영향을 받은 프랑스의 누벨바그, 누벨바그에 영향을 받은 아메리칸 뉴 웨이브, 오버하우젠 선언을 통한 뉴 저먼 시네마, 덴마크의 도그마95 선언까지 영화역사의 굵직한 전환점들은 항상 이렇게 저항하려는 정신으로부터 만들어졌다. 이러한 사조를 이끌었던 감독들은 대부분 당시 젊은 층이었지만, 양병간 감독님은 전혀 젊은 감독이 아니다. 어쩌면 요즘 한국의 젊은 영화인들은 너무 조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직접 메가폰을 드셨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꿈꾸었고 지금도 그 꿈을 마냥 놓지는 않은 내가 <무서운집>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영화는 못 만들 것 같다는 존경심과 동시에 나같이 젊은 사람이 했어야 하는 일을 이런 기성 감독님이 하셨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무서운집> GV를 진행중인 양병간 감독(오른쪽)

전통을 외치는 혁명

이렇게 혁명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는 영화지만, 정작 이 영화가 내포하는 메시지는 꽤 보수적인 것 처럼 보인다. 내가 2015년 극장에서 단체로 이 영화를 봤을 때 느꼈던 기분은, 이 영화는 무조건 단체로 관람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어이없는 장면들의 연속에 관객 한 두명이 피식거리기 시작하면 연쇄작용처럼 따라 웃다가 결국 모두가 박장대소하는 그림이 굉장히 자주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특성상 단체로 관람해야 그 진가를 느낄 수 있다. 그렇다. 이 영화는 "혼자 보지 말고 여럿이서 보라"고 말하는 영화인 것이다. 


영화가 디지털화되고 인터넷이 발달하고 웬 전염병까지 창궐한 지금, 이제 영화를 집에서 혼자 보는 것은 너무나도 익숙한 모습이다. 이러한 상황에 <무서운집>이라는 영화는 적잖이 불만이 쌓여 있을 것이다. 왜? 영화는 당연히 다같이 보는 것이기 때문이고, 그러라고 만들어진 영화이기 때문이다. 움직이는 사진예술이라는 부분만 보면, 뤼미에르 형제보다 에디슨이 영화를 4년 더 먼저 발명했다. 하지만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가 최초의 영화로 인정된 이유는 혼자서 보는 것이 아닌 다같이 보는 것이 영화라고 세상 사람들이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 단체성은 영화의 본질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지금은 잃어버린 이 영화의 가치를 다시금 외치고 있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내용은 하나도 안중요할까?


영화 <무서운집> 스틸컷

그러면 정작 영화의 내용은 아무것도 아닌가? 처음 관람했을 때는 솔직히 그렇게 생각했다. 단지 영화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가 만든 어설픈 영화를 '표방'하기 위해 의미 없는 내용을 설정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러 번 볼 수록 이 영화는 내용적인 면에서도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느껴진다.


영화는 사진작가 부부가 어렵게 장만한 집에 귀신이 출몰하고, 남편이 출장간 사이에 출몰하는 귀신과 아내가 사투를 벌이는 내용이 전부다. 극 초반에 아내는 귀신의 존재를 믿지 않으며(몇 번이나 봤으면서 이를 악물고 믿지 않는 이 부분이 너무 열받게 한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집안일에 몰두한다. 청소도 하고 김장도 하고 빨래도 걷는다. 그 중간중간 섬뜩함을 느끼고 어느 새 밤이 되어 잠에 청하는데, 잠들지 못하게 귀신이 계속 나와서 괴롭힌다. 그렇게 무서우면 집을 뛰쳐나올법도 한데, 아내는 뛰쳐나가는 대신 나무막대와 칼을 들고 귀신과 맞선다.


누구에게나 무서운집

아내가 귀신과 싸우지 않을 때는 집안일만 한다. 주부니까 당연하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이 가사노동은 끝이 없으며 단순노동의 반복이다. 즉 이 아내에게 집이라는 곳은 귀신이 나와서 괴롭히든지, 집안일을 해야하든지 둘 중 하나만 해야 하는 곳이다. 이 곳이 지옥이 아니라면 어디겠는가? 말 그대로 '귀신이 나와서 무서운 집'임과 동시에 '일이 끝나지 않는 무서운 집'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내는 결코 그 집을 포기할 수 없다. 매년 집값이 오르기만 하는 이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고생을 해서 드디어 얻은 내 집인데 그걸 어찌 포기할 수 있냐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무섭지만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무서운 집'이기도 하다. 양병간 감독님은 제목을 '무서운 집'이라고 하지 않고 '무서운집'이라고 띄어쓰기를 지우셨다. 고유명사로 불리길 원하셨다고 하셨다. '무서운 집'이라고 쓰면 그 말은 즉 무섭지 않은 집도 존재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에 무섭지 않은 집은 없다. 


영화 <무서운집> 스틸컷

시시포스의 계단 오르내리기

계단이라는 공간은 원래 영화에서 잘 나오지 않는다. 단순히 이동하는 구간 외에 용도가 없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추격씬이나 대사가 있는 그런 장면이 아니라면 일반적인 영화에서 계단을 오르내리는 장면은 찍지 않고, 도착한 장면으로 바로 이어 붙이는 연출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무서운집>은 시작부터 남편을 배웅하는 장면에서 계단을 계단을 내려가는 장면을 내내 보여주고, 그 후에도 아내는 이 계단을 계속 오르내린다. 

귀신의 형체인 마네킹은 1층 스튜디오에 있고 둘이 사는 집은 4층정도 되는 건물 옥상에 있기 때문에, 귀신의 정체를 확인하러 내려갔다가 다시 집으로 올라가는 움직임의 반복이다. 즉 귀신이 나타나야 아내는 귀신의 존재를 확인하러 계단을 통해 움직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귀신이 아내를 계속 계단에 머무르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에 걸맞게 이 계단이라는 공간은 푸른 조명과 벽면에 같은 사진의 액자가 여러개 걸려있는 모습으로 굉장히 초현실적인 공간처럼 보인다. 중간에 아내가 계단에서 제자리뛰기를 하는 모습만 봐도, 이 계단이라는 공간은 아내에게 끝이 없는 공간처럼 보인다. 마치 그녀가 해야 하는 가사노동처럼 말이다.


영화를 안보고 평가하는게 가능한가?


인터넷이라는 공간 자체가 하나의 농담을 하기 위한 곳 처럼 이용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지만, 개인적으로 <무서운집>을 <클레멘타인>이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과 같은 영화와 동급 취급하는 것은 꽤 불만이다. 개인의 감상은 자유이며 존중받아야 하지만, 불만인 것은 대부분 이 영화를 감상하지도 않은 채 단지 다수에 편승하여 창의적인 농담을 쏟아내는 유희거리로 이용한다는 것이다. 과연 포털사이트에 <무서운집> 평점을 매긴 사람들 중에, 진지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이 영화를 감상한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무서운집>은 내가 지금까지 영화를 보면서 크게 충격을 받은 몇 안되는 매우 훌륭한 영화다. 이것 만큼은 농담이 아니다. 이 영화는 명작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다.



*본 리뷰는 페이스북에 2020년 11월 2일 게재한 리뷰를 일부 수정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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