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 엄마들은 집구석에서 왜 글을 쓰는가
브런치 연재를 일주일 걸렀다. 불현듯 내 안에 ‘왜 쓰는가’ 하는 물음표 알람이 켜졌고, 그 이유와 답을 나 스스로 정확히 알고 있음에도 또다시 의문의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브런치에서 매해 열리는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를 오픈하였다. 아직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한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았고 (사실 그중의 절반은 쉬었고), 써놓은 글 수도 이제 고작 20개 남짓이지만, 이 기회에 쓴 글들을 일단락 지어보고 싶었다. 해외 육아에 대한 주제로 매주 연재를 하고 있는 이 매거진을 브런치북으로 발행해보면 어떨까.
그러자 불현듯 또 하나의 의문이 들었다.
내 글들을 ‘누가’ 그리고 ‘왜’ 읽을까?
내가 쓰는 이유에는 나의 하소연, 신세 한탄(?), 나의 자아 성찰, 성취감 획득, 그리고 나의 자뻑(!) 등이 있다. 바쁜 일상에 시간을 쪼개서 나의 일상을 글로 푸는 일은, 가끔은 귀찮기도 하고 게으름을 부리게 되기도 하지만, 그 어떤 일보다 나 스스로에게 제일 큰 만족감을 준다. 마치 내가 나를 위해 차곡차곡 적금을 붓는 기분이랄까, 남편 몰래 숨겨둔 비상금 통장 같달까. (실제로 그런 것이 좀 있어야 할 텐데... 글이나 쓰고 앉아있는 헛똑똑이다) 아무튼 이건 내가 쓰는 이유이고, 도대체 나의 글은 누가 왜 읽을까.
누군가가 내 글에 라이킷을 눌렀다는 알람, 내 매거진을 구독한다는 브런치 알람이 울릴 때마다, 지친 일상에 깜짝 선물처럼 작은 활력소가 된다. 그와 동시에 궁금하다. 내 글이 그 누군가에게 소소한 웃음이 되었을까, 위로나 공감이 되었을까, 어디서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 혹은 깜짝 놀랄만한 천둥번개(!)가 되었을까 하고. 매주 글을 업데이트할 때마다 항상 라이킷을 눌러주시는 익숙한 닉네임의 구독자분들께 고맙고 따스한 응원을 얻으며 또 물어보고 싶다. 지금 내 글들이 제대로 자라고 있는가 하고.
브런치에서 수많은 육아맘들의 고충이 담긴 글들을 본다. 내가 매일 겪고 있는 다 아는 남의 일상을 굳이 글로 또 읽으며, 내가 얻는 것은 위로와 공감 그리고 나와 같은 육아 전쟁을 치르고 있는 그녀들의 뜨거운 열정이다. 더군다나 바깥일을 하다가 출산과 동시에 집안에 똬리를 틀게 된 경단녀들의 글은 뜨겁다 못해 활활 타오른다. 마치 육아학 박사 논문을 쓰는 것처럼, 육아 전문 용어 대백과사전을 편찬하는 것처럼, 똥 싼 아이 기저귀 가는 일에도 전문 용어와 장비들이 등장하고 아주 ‘똥폼’을 잡고 글을 쓴다.
나 또한 그렇다. 살림과 육아는 해도 티 안 나고 안 하면 티 나는 일이다. 월급도 성과도 승진도 휴가도 없다. 물론 내 집이고 내 자식이고 내 살림이다. 그것들을 가꾸고 키우며 사는 일은 행복하고 사랑스러운 일이다. 근데 이게 ‘자랑’이 안된다. 내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아이는 쑥쑥 자라고 있는데 나는 폭삭폭삭 늙고 있다. 아이의 성장 시계가 돌아가는 방향과는 정반대로 나는 노화되고 있다. 내 젊음의 시간을 바쳐 공들여 키운 아이가 제 시간이 필요하다며 제 방문을 닫을 때, 사춘기 아이와 씨름하는 엄마가 아니라 나도 준비된 내 방을 가지고 싶다.
그것이 나에게는 글이다.
글을 묶은 것이 책이고, 책을 낸 사람은 작가다. 요즘은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지 않고도, 여행기나 에세이를 통해 쉽게 책을 내고 작가가 될 수 있다. 물론 그 또한 당연히 쉬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예술로써 글을 빚는, 문학으로써 글을 짓는 글쟁이도 필요하지만, 여행의 파노라마를 텍스트로 보여주는, 일상의 순간을 글로 쏘는 책도 작가 또한 중요하다. 어찌 됐건 뭔가를 끄적이는 한 사람이 내 글을 묶어 언젠가 한번 세상에 책을 내고 싶다는 욕심이 어떻게 없을까. 작가라는 뽀대나는 타이틀이 어찌 탐나지 않을까.
근데 여전히 자신이 없다. 20대 초반 8개월 정도 육로로 유라시아 횡단 여행을 다녀왔을 때, 그때도 끄적끄적 뭔가를 쓰고 있었고 서점에는 여행 에세이가 한창 유행이었다. 어린 치기에 그런 소나 개나 쓰는 ‘나 어디 가봤네!’ 여행기는 창피하게 느껴졌다. 아직 뭔가를 결과물로 내기에는 인생도 여행도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다음 반년 정도 이란에 살면서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 써본 글로도 나는 자신이 없었다. 그때 출판을 목표로 이란에 대해 글을 쓰던 한 친구를 알았는데, 나는 사실 그의 글이 조금 우스웠고 책을 낼 만한 가치까지는 없다고 생각했다. 일 년 꼬박 그 글에만 전념하던 그 친구는 결국 출판사와 계약을 했고 책을 냈다. 그리고 어느 날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일단 한번 거기까지 가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있어.
그랬다. 그 친구는 그 책을 내고, 거기까지 가본 결과 또 다음 책을 낼 기회를 얻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자신이 없다. 누가 나의 글을 비웃지 않을지, 내가 뭐라고 펜대를 굴리며 아는 척을 하는 건지, 내 글이 세상에 무슨 소용이 있을지. 그럼에도 쓰는 일을 끈적끈적 또 멈추지 못하고 있다. ‘나는 왜 쓰는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가면서. 그리고 ‘이건 그냥 나를 위한 일이야’ 하고 내 속에 웅크려 스스로만을 위로하면서 나만의 방을 열심히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