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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알라맘 Jan 26. 2021

엄마 사람 고행길의 가이드북

feat. 김남희 [길 위에서 읽는 시]

새해를 맞으러 가는 일주일 남짓한 캠핑 여행길에 김남희 작가의 [길 위에서 읽는 시] 한 권을 골랐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아이 기저귀 가방 한 구석에 밀어 넣었다. 시 하나에 작가의 짧은 산문 하나, 그렇게 28개 장으로 구성된 책이다. 그러니 길게 집중하지 않고도 잠깐씩 짬이 날 때마다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왕복 2천 킬로미터를 달릴 차 안에서 우는 아이 달래고, 일주일간 길 위에서 밥 먹이고 똥 닦이고 애 잡으러 뛰어다닐 고행 길을 나서면서, 혹시 아이가 낮잠이라도 자거나 제 아빠랑 산책을 가면 책을 펼쳐볼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31개월 아이와 함께하는 이 험난한 여행길 위에서도 좋아하는 작가님이 고른 시들로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마치 새해 소원을 빌듯 그렇게 여행길에 책 한 권을 챙겨 나왔다.


매일 텐트를 치고 접을 때마다 아이는 사고를 쳤다. 두 사람이 양쪽에서 마주 잡고 쳐야 하는 텐트, 그런데 절대 한 순간도 제자리에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아이는 어떡한단 말인가. 잠시 차에 가둬놓으면 차 안에 버튼이란 버튼을 다 눌러보는 걸로 모자라서, 컵홀더에 조금 남아있던 커피를 카시트에 들이붓고, 먹다만 감자칩 과자 부스러기로 바닥까지 아주 엉망으로 만들어놓는다. 카시트 커피를 닦으며 남편에게 “커피는 왜 남겼어!” 하고 소리치면, “감자칩은 누가 거기다 뒀는데? 다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왜 애를 거기 두냐고!” 하는 더 큰 짜증이 돌아온다. 아침부터 네댓 시간 장거리 운전을 한 남편은 텐트도 쳤으니 쉬고 싶다. 그럼 저기 또 줄행랑을 치고 있는 아이 뒤는 누가 계속 따라다녀야 한단 말인가. 그러니 책은 언제 읽는단 말인가.


여행 사흘째가 되어서야 드디어 책을 펼쳤다. 집을 나와 벌써 세 번째 텐트를 치고 난 후였다. 캠핑장에 도착하기 직전 타이밍 좋게 아이는 낮잠이 들었다. 오늘은 둘이서 평화롭게 텐트를 치고, 의자에 앉아 시원한 맥주를 땄다.  그리고 책을 펼쳤다! 모름지기 여행이란 이런 여유와 낭만 아닌가. 아이의 낮잠 시간이 가뭄의 단비, 사막의 오아시스, 뜨거운 여름 길 위의 차가운 맥주 한 캔처럼 고마웠다. 책 속에는 내 마음을 꼭 알아주는 길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늘 세상이 길들이지 못한 영혼이고 싶었다. 무리 짓지 않아도 당당한 단독자로 우아하게 늙고 싶었다. 사십 대 중반을 넘기고 나니 우아하고 당당한 삶은 멀어지고 가난한 독거노인의 삶만 가까워지고 있다. 그래도 내 안의 작은 소녀를 지키고 싶다는 야망은 남아 있다. 알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 호기심을 품고 다가가고, 매번 상처 입으면서도 사람의 마음에 뛰어들고, 계절의 변화에 절대로 무심하지 않으며, 최악의 순간에도 유머만은 잃지 않고, 눈치도 없이 혼자 “아니다(No)”라고 말하며 대책 없이 오늘을 사는 소녀. 누구의 가슴에나 남아 있을 철들지 않은 소년과 소녀의 얼굴. 인생의 무자비함을 알아갈수록 작아지고 희미해지는 그 소녀가 마침내 내 안에서 사라진다면, 그날이 내가 늙는 날이라고 믿는다. 그 욕심 때문에 여행을 하고, 산책을 하고, 시를 읽는다.

김남희 [길 위에서 읽는 시] 들어가며 부분에서


프롤로그만 읽었을 뿐인데, 아직 작가가 고른 시와 이야기들은 시작도 안되었는데, 이미 책을 다 읽은 듯 큰 위로를 받았다. 나도 아직 그런 내 안의 소녀를 가지고 있다고, 그 욕심 때문에 아이를 데리고 이 고행을 하고, 아이와 함께 산책과 조깅의 중간쯤 매일 길을 나서고, 이렇게 이 책도 펼치게 된 것이라고, 작가님에게 답장이라도 쓰고 싶었다.





본디 시라는 것이 외롭고 쓸쓸하고 혼자 가는 먼 집 같은 세계인데, 거기에 덧붙여진 작가의 산문에는 고비 사막, 아이슬란드, 라다크처럼 춥고 높고 황량한 오지에서의 그리움에 사무치는 밤들이 있었다. 밤의 어둠이 짙을수록 별들이 더 반짝이듯, 그녀의 고독한 발걸음 위에서 그 눈물들은 시와 함께 더 아름답게 빛났다. 끝내 길들지 않는 영혼을 가진 소녀의 시적인 삶이 정말 한 편의 시와 같았다.


남반구에서 반대의 계절을 살고 있는 나는, 가끔 숨이 턱턱 막히게 뜨거운 여름날, 폭설이 내린 한국의 눈 사진을 보며 더위를 식힌다. 하루 종일 아이와 씨름하며 고독이 무엇이요, 잠시 잠깐 심심할 시간마저 없는 지금의 나에게, 작가의 여유로운 시간들과 혼자만의 여행, 감성적인 글까지 나는 마냥 그가 부러웠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이 책에서 작가는 ‘한 존재의 우주가 되어보지 못했다는 것, 아마도 이번 생의 내 가장 큰 결핍일 것’이라며, 누군가의 어머니가 되어보지 못한 안타까운 마음을 고백하고 있다.


자기 앞의 생을 사는 우리 모두는 각자 생의 무게를 견디고 있구나. 홀로 훌쩍 떠날 수 있는 당신을 내가 부러워하듯, 그 차가운 적막을 견디고 고상한 글을 피울 수 있는 당신을 내가 부러워하듯, 당신은 나처럼 한 우주를 품에 안고 젖을 먹여보는 것, 나의 소란스러운 일상 가운데 자라나는 엄마의 인생을 부러워하는구나. 그렇게 새해에 읽은 첫 책은 엄마 사람의 고행길 위에 행복을 일깨워준 가이드북이 되었다. 덕분에 31개월 아이와 함께하는 8박 9일의 왕복 2천 킬로미터 새해맞이 캠핑 여행도 무사히 잘 마쳤다.


새해맞이 여행 길 위에서 나의 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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