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랄라스윗이었다.
공연을 했다. 오늘. 몇시간 전에. 그렇다. 나는 음악을 만들고 그 음악을 팀 메이트와 함께 무대에서 연주하는 일을 한다. 대 재앙이 몰아닥친지 1년하고도 반이 지나면서 본업을 거의 잃다시피 한 뒤 그나마 벅스에서 진행하는 뮤직캐스트로 생존보고를 하며 지내고 있었다. 이 공연은 사실 작년 겨울에 제안이 들어왔었는데 “랄라스윗 정동극장에서 공연하실래요? 여름에요.” 실장님의 제안에 정동극장이요?? 하고 되물었다. 내가 아는 그 정동극장이 맞는건가?
서대문 경향신문 건물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정동길이 나온다. 열아홉, 첫 연애를 했을때부터 그 길을 걸었다. 혼자도 걷고 친구들이랑도 걷고 그 다음 만난 남자랑도 걸었다. 덕수궁 돌담길을 숱하게 걸었기 때문에 이별의 이유랍시고 핑계도 못댈 정도로 자주 갔다. 그 길이 너무 좋았다. 도심 한복판에 나타난 비밀의 정원 같았다. 처음 간게 아, 열아홉이 아니라 열여덟이었네.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검정고시 신청을 했는데 시험 장소가 정동길의 창덕여중이었다. 학교는, 학교라기보다 교정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그 곳을 몹시도 더운 여름에 찾아갔다. 생전 처음 보는 국가고시(?)니까 긴장도 잔뜩 했고 떨어질까봐 겁도 났다. 시끄러운 매미소리와 우거진 나뭇잎이 인상적이었는데 그정도만 감상하고 급히 시험장으로 들어갔다. 시험이 끝나고 해가 좀 내려가니 학교가 다시 보였다. 가보진 않았지만 대학 캠퍼스가 이런 분위기일까? 다녔던 예고도 재단에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있어 꽤나 넓은 교정이었는데도 이렇게 아름답진 않았던것 같다. 정동길은 내 인생 첫 국가고시를 본 곳이다. 그 푸르른 공간이 머릿속에 쉽게 각인되는건 당연한 일이었다.
경향신문 건물에는 극장이 있었다. (아닐수도 있다. 왜냐면 나는 항상 반 만 알기 때문이다.) 이름은 기억 안나는데 십대 후반쯤에 그곳에서 심야 영화 상영을 종종 하곤 했다. 만원이면 연달아 세편을 볼 수 있었다. 별로 재미없는거 한 편, 흥미로운 영화 두 편. 이런식이었다. 1층의 맥도날드에서 시간을 떼우다 12시가 되면 극장에 들어갔다. 많지 않은 사람들 속에 심야영화를 보러 온 10대들. 마치 시네필이 된것 마냥 영화에 심취한듯 보이고 싶었지만 제일 기대했던 ‘식스센스’ 감독의 차기작은 펩시맨만 등장하고 끝이 났다. 오히려 기대도 안한 알파치노 주연의 ‘인섬니아’가 인상적이었다. 어라 지금 찾아보니 감독이 크리스토퍼 놀란이었네. 전혀 몰랐다. 그냥 그 때는 그렇게 밤 새 영화를 보고 이거 재밌지 않았냐 와 기 빨려 죽는줄 알았네 이런 대화를 나누는것들이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줬다. 영화 세 편을 연달아보는건 굉장한 체력을 요하는 일이지만 그 나이라 가능했던것 같다. 열여덟, 열아홉. 그렇게 또 정동길을 자주 찾게 되었다.
몇 년에 한 번 가끔씩 청승을 떨며 혼자 외출을 하는 날이 있다. 루트는 언제나 비슷한데 교보문고에서 책들을 훑어본 다음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혼자 영화를 보고 서대문역을 향해 걸어서 정동길을 내려가 그 끝에 있는 서울 시립 미술관의 전시를 관람하는것. 나의 10대ㅍ후반과 20대 초반을 점철했던 이 동네 언저리의 독립 영화관들 중에서는 이제 시네큐브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이 코스 자체가 예술을 사랑한답시고 까불었던 과거를 되새김과 동시에 창작을 위한 영감을 얻는 루트이기도 했다. 시네큐브 앞에 설치된 망치를 든 그 거대한 사람 조형물은 내가 저것에 익숙하다는, 고로 시네큐브를 자주 드나들며 독립 영화를 즐겨보는 자아의 상징같은것이기도 했다. 사랑해 마지 않는 이 동네에서 랄라스윗은 총 세 번의 공연을 했다. 이화여고 내에서 했던 어떤 루키 경연, 이화여고 교정에서 했던 2집 발매 기념 런치콘서트, 그리고 이번의 정동극장에서의 공연까지. 그래서 실장님께서 정동극장 얘기를 꺼냈을 때 이건 꼭 하고 싶다, 해야 한다, 나는 여기서 공연을 하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든건 필연적이었다.
공연을 앞두고 대역병의 확진자가 늘어났다. 공연을 할 수 있을까 없을까. 엎친데 덮치기까지 해서 말 할 수 없는 이런 저런 문제도 생기는 바람에 공연 전전전날까지 할 수 있을지 없을지 알지도 못하는 공연의 합주를 하며 그저 일이 잘 풀리기만을 바랐다. 개복치 같은 마음 상태에서 나는 커다란 데미지를 입었고 일단 공연을, 그것도 2년만의 밴드셋 공연을 할 수 있게 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안도의 한숨조차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방심 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공연이 끝날때까지는 끝난게 아니었다. 공연장에서 확진자가 나올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고마운 연주자 친구들과 함께 모든 준비를 마치고 찾아간 공연장은 너무 아름다웠다. 극장측에서는 최선을 다해 여름날 숲속의 한 가운데를 너무 아름답게 표현해주셨고 게다가 음향팀은 랄라스윗의 첫 단독공연부터 함께 했던 프리사운드였다. 프리사운드의 대표님이 오셔서 인사를 하시는데 그렇게 반가울수가 없었다. 아, 진짜 나만 잘하면 되는구나. 모니터가 안좋고 어쩌고 어떤 변명의 여지도 없었다. 10년 가까이 함께 일한 팀과 공연을 하는데 모니터가 안좋을리가 있나. 국내 최고의 음향 시스템 업체 (웃음) 프리사운드의 대표이신 김성희 실장님께서는 랄라스윗의 어느 곡의 어떤 파트에서 딜레이를 치면 좋은지 딜레이 타임까지 알고 계시는 분이었기에 (심지어 정규1집의 드럼 리듬도 다 외우고 계신다) 전적으로 믿고 무대에 올랐다.
다른 연주자들의 기분까지는 모르겠지만 팀 메이트와 나, 우리 둘은 (물론 이런 얘기를 서로 나누진 않았지만) 꽤나 흥분 상태였다. 둘이 하는 공연과 기타와 함께 셋이 하는 공연이 다르고 5인조 이상의 밴드셋은 그것들과는 또 다르다. 무엇이 제일 좋다라고 어느 하나 찝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굉장히 오랜만의 밴드셋 공연이었기에 그리고 공연에 대한 무게감을 서로 나눠가질수 있기에 올라가는 그 순간 헤어핀을 꽂은채로 올라갈뻔 한것만 빼면 완벽한 상태에서의 입장이었다. 그리고 막이 올랐다.
사진제공 : 국립 정동 극장
사실 올라갈 막 같은건 없었고(...) 그냥 어두워진 공연장을 조심 조심히 걸어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관객분들은 환호 대신 방역수칙을 철저히 지켜 큰 박수를 보내주었다. 인사 없이 조명이 켜지며 시작한 첫 곡은 많은 이들의 예상을 깬 ‘완벽한 순간’이라는 곡이었다. 제목의 뉘앙스가 말해주듯 오늘 참 완벽한 순간이었다는 멘트와 함께 보통 공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곡이었는데 이 곡을 처음으로 연주하자는건 나의 팀메이트 현아의 아이디어였다. 이유를 얘기하진 않았지만 알 것 같았다. 곧바로 수긍했다. 매번 마지막곡으로 연주하던 노래로 시작을 한다는건 여러 의미로 색 달랐지만 노래가 나오고 캄캄했던 관객석의 조명이 조금 밝아지며 거기 앉아있는, 정말로 실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확인했을 때 이 곡을 첫 곡으로 하기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의 모든 공연마다 했던 곡이라 안정적인 음악을 들려드릴수 있는 곡이고 이 곡을 연주할때에는 늘 우리 모두의 마음이 아마도 편했을것이다. 뭐 하나 걸리는거 없는 상태로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분위기의 ‘완벽한 순간’의 연주를 마치고 관객석의 조명이 본격적으로 켜졌을 때, 사실 자칫 잘못하면 울뻔했다. 대중음악이라는걸 업으로 하며 살고 있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어느새 대중이 사라져버린 기분이 들었다. 우리의 노래를, 우리의 공연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겠지. 아쉽고 그립고 보고싶고 듣고 싶은 마음들이 있겠지. 힘들때마다 되새겼다. 그래도 이렇게 실재하는 사람들을 마주보고 있자니 정말 여러분들 그러니까 당신들이 진짜로 존재했군요. 여기 있었네요. 잠깐이라도 의심해서 미안해요. 그런데 정말 이렇게 여기 있다는게 사실 실감이 나질 않네요. 거기 있는 사람들 진짜인가요? 진짜로 여러분들인가요? 묻고 싶었다. 첫 곡 끝나자마자 멘트부터 랩을 쏟아내며 울뻔했지만 다행히도 감정은 울컥에서 그쳤기 때문에 공연을 이어나갈수 있었다. 준비된 멘트들을 하고 공연을 진행 하면서 내 머릿속엔 그저 나만 잘하면 돼라는 생각만 가득했다. 그리고 한 곡 한 곡 마칠때마다 너무 아쉬웠다. 즐거운 곡들은 즐거워서 행복했고 가슴 저린 곡들은 연주하면서도 가슴이 너무 저려서 행복했다.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들을 손가락을 통해 표정과 몸짓 뭐가 됐든 모든걸 동원해서 밖으로 표출하고 싶었다. 기타, 베이스, 드럼이 우리를 안정적으로 받쳐주고 있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것 같았다. 마음 속으로는 짜잔, 여기서 이렇게 우르르 하고 쏟아집니다!! 포인트마다 자랑을 하고 싶었다. 남은 곡이 줄어드는게 그렇게 아쉬울수가 없었다. 언제 다시 할 수 있을지 모르는 밴드셋 공연. 너무 오랜만이었고 우리의 합이 쩌는게 무대에서도 느껴져서 행복했다. 일차적으로는 다섯이서 같은 그루브로 연주하며 드럼 위에 베이스를 얹고 그 위에 순차적으로 다른 악기들을 얹어 마지막으로 보컬이 화룡점정을 찍을때의 희열. 그리고 그걸 랄라스윗을 좋아하는 분들께 들려드리고 있다는 행복감. 정말 짜릿했다. 준비 과정은 불안과 고통이었지만 무대에서 만큼은 행복했다. 무대 체질이라는 말로는 설명을 다 할 수 없는, 가슴 벅찬 느낌. 역시 무대가 있고 내가 있다. 무대는 너무 아름답고 찬란히 빛나며 굉장히 많은 사람들의 손길이 묻은 성스러운 공간이다. 그 곳에 내가 있고 현아가 있고 팀 랄라스윗이 있었다.
사진제공 : @tunacanx_x
공연이 끝나고 극장 문 닫는 시간에 맞춰 서둘러 빠른 철수를 했다. 사무실에 도착해 악기를 내리고 수고했다는 인사와 함께 각자 흩어졌다. 왠지 집까지 걷고 싶은 기분이라 데려다주신다는 걸 한참을 거절하고 터벅 터벅 걸어오는 길에 갑자기 허기가 졌다. 그렇구나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먹었구나. 그래서 이렇게 힘든가? 그런데 먹고 싶은 것도, 먹을 수 있을만한것도 떠오르지 않아서 집 가는 길에 편의점에서 인스턴트 죽을 사고 불꺼진 방에서 조명 하나 켜놓고 한참을 멍하게 있었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떠들석하고 왁자지껄한 공연도 아니었어서 조용한 방이나 조용한 공연장이나 어둡고 조명 켜진것까지 비슷한데 작은방에서 공연을 마치고 뮤지션이 아닌 그냥 인간 박별로 돌아온 나는 예의 그 허전함 비슷한것을 느꼈다. 그치만 이 기분에 잠식 당하고 싶지 않았다. 얼른 죽을 먹고 약을 챙겨먹고 비타민도 먹고 지인들과 카톡으로 수다를 떨었다. 술은 왠걸, 마실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냥. 쭉 한가지 생각만 했다. 또 하고 싶다. 다시 하고 싶다. 내일도, 모레도. 그렇게 매일 같이 공연장에 출근하던 그 때. 적당한 긴장감과 일상감이 공존했던 장기 공연. 아니면 3일 내내 다른 셋리스트를 준비하느라 죽는줄 알았던 2018 원나잇 섬머타임의 그 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자유롭게 해외여행을 다니던 때와 마찬가지로 자유롭게 공연을 했던 날들도 모두 다 전생 같다. 좋은 생이었구나. 공연도 하고 여행도 다니고. 언젠가 그런 날이 다시 올까 모르겠다. 이제 기대나 희망 같은건 남의말이 된지 오래다. 그저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 음악을 좋아하고 공연을 보러왔으면 하는 욕심이 아직 건재하다는걸 확인했다는게 중요하다. 전생이든 현생이든 후생이든간에 언제든 곁에 두고 오래 들을 수 있는 음악을 하는것. 13년전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은 마음이다. 아무리 코로나놈이 창궐을 하든 무슨 미친짓을 하든 나는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고 나의 행복은 좋은 음악을 만들어서 그것들을 사람들 앞에 선보이고 사람들이 좋아해줬을때 내 인생의 퍼즐 조각들이 맞아들며 찾아온다. 그게 나였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다시금 깨달았어요. 고마워요. 랄라스윗을 좋아해주고 들어주고 기다려주고 사랑해주는 모든 이들. 감사합니다. 언젠가 우리 또 다시 만나요. 꼭. 다들 그 때까지 건강하라구!!!!!
사진제공 : @heony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