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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별 Dec 07. 2021

절규 하지 않는 뭉크의 그림은 의사에 가깝다

약 두달정도 되는 시간동안 마음과 몸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턱관절 통증이 심해졌는데 스플린트는 절대 끼기 싫어서 약이랑 찜질로 버티는중이다.


좋아졌다고 생각한 정신건강은 친구가 떠나면서 나도 같이 무너져 내렸다. 카톡을 보내도 읽지 않고 보고싶어서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다는게 쉽게 납득되지 않았다. 건강이 방심한 틈을 타 이러저러한 일들이 생겼는데 결코 중대사안이 아닌 이것들은 스트레스 대처능력이 저하될대로 저하된 내게 턱관절 통증을 가져다주었다. 나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버텼나보다. 사랑니 발치를 제외하면 수술도 입원도 경험하지 못한채 고통을 모르고 살았다고 해도 무방한데 이렇게 묵직하면서도 끝이 없는 통증은 나를 엄살쟁이로 만들었다.


아프다고 해봐야 연중 행사로 치르는 술병이 전부였고 웬만한 타박상이나 근육통은 그냥 넘기곤 했다. 아프다는 말을 잘 안하고 살았는데 이번 턱 통증은 무서워서 병원을 못 갈 정도다. 돌아 누워 턱에 힘을 주면 뭔가가 신경을 자극하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처음 구강내과를 갔을 때 나한테 턱이 묵직하게 아프세요, 찌르는듯 아프세요? 혹은 턱을 벌릴때 찌직하는 소리가 나나요 삐빅하는 소리가 나나요? 이런식의 질문 수십개에 답해야 했는데 거 참 이상한 질문도 다 있다 싶었지. 그런데 턱관절 세계관에 오래 머무르다 보니 이제 저 질문들이 뭘 의미하는지 알겠다. 근육 문제인건지 디스크 문제인건지를 파악하기 위한것이었다. 정밀 검사를 받기전인 나는 제발 근육 문제이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턱 관절속 디스크가 닳아서 느끼는 고통이 아니었으면 한다. 제발... 플리즈....


여튼 이렇게 사람이 지속적으로 아프니까 (턱관절 장애는 턱 뿐만 아니라 심한 두통과 목, 어깨 주변의 통증도 함께 가져온다.) 아픈 나도 싫고 아프다고 말하는것도 싫고 아파서 뭘 못하겠는것도 싫고 그냥 내가 졸라 싫어진다. 얼마전에 피부염과 알러지가 함께 찾아와서 진짜ㅋㅋㅋ 너무 너무 너무 화가 났다. 그 와중에 집 화장실에 문제가 생겨 공사를 해야했고 임시 거처에서 3일을 지냈다. 왜 집에 안가는건지 모르겠다는 달에의 짜증난 표정을 보자니 미안한데 나도 집에 가고 싶고 내 침대에 누워서 쉬고 싶다고!! 하지만 어쩔수가 없었다. 그동안 도대체 어떻게 며칠에 한 번 숙소를 옮겨가며 여행을 한건지 모르겠다.


드디어 공사가 끝나고 집으로 복귀, 오랜만에 잠 다운 잠을 잤다. 그리고 버퍼링을 하는동안 트위터를 켰는데 별로 큰 관심이 없었던 화가 뭉크의 절망적인 삶에 대한 타래가 있길래 집중해서 읽었다. 비극은 어째서 한 사람에게 이리도 집중적으로 찾아오는지. 80대까지 살아있는게 신기할 정도로 고단한 삶이었을것 같다. 그리고 화면을 넘기다 이 그림을 보게 됐다.


말년쯤의 뭉크가 정신병원을 퇴원하고나서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그의 그림이 내 마음을 뺏을정도로 매력있진 않았다. “절규”같은 경우 너무나 오랫동안 밈으로 사용되어서 사실 명화라는 인식도 사라져버렸고. 그런데 이 그림을 본 순간 와, 이거는 꼭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 이 그림이 전시된 미술관을 꼭 가야겠다 라는 생각이 단단히 들 정도로 순식간에 내 마음에 자리 잡았다. 정신병, 입원, 퇴원 후의 희망 같은 키워드에 공감한게 아니다. 화풍에서 뭉크 특유의 질감이 느껴지는데 뭔가가 달랐다. 선 하나 하나를 관찰했다. 물감의 결, 색의 배합, 뭉크가 표현하는 달이 만든 강, 그걸 보고 우동을 떠올린 만화 허니와 클로버의 하구미, 붓이 지나간 자국, 사방으로 뻗은 햇살의 강렬함. 그림이지만 보고있어도 그 뜨거운 태양의 열이 느껴졌다. 생에 대한 찬사가 들리는듯 하다. 살아있는 어떤 존재들의 강력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그림이었다. 미술에는 조예가 없어 딱히 좋아하는 그림도 화가도 없다. 이상하게 런던 네셔널 갤러리를 세 번이나 갔지만 갈 때마다 어지러워서 도망치듯 나왔는데 이렇게 그림에 강하게 끌린건 처음이었다.


고통은 인간을 무력하게 만든다. 두통처럼 대부분 원인불명이고 찾기도 어려운 통증은 더 강력한 무력감을 선사한다. 최근 내가 겪은 몇개의 질병과 통증은 그 정도가 별거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엄살쟁이로, 약한 인간으로 그리고 약쟁이로 만들어버렸다. 약해도 된다. 다시 강해지면 되니까. 그런데 한번 무너졌던 인간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데 얼마나 힘이 드는지, 약해졌다는 기분이 얼마나 더러운지, 일어날 타이밍을 찾을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걸 경험해봤으니까. 아니까. 두 배로 엄살쟁이가 됐고 두 배로 스트레스를 받았으며 두 배로 약해졌다. 그냥 나는 모든 상황이 어서 빨리 지나가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지나면 나아지겠지. 지금은 무슨 방법이 있는것도 아니니까. 이런식으로 하루 하루 무기력해졌다.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 미약하고도 별거 아닌 통증은 이 그림을 본 순간 잠시 멈췄다. 큰 통창이 열리고 기분 좋은 바람이 얼굴에 쏟아지는듯 했다. 존재하지 않는 하얀 커튼이 펄럭였다. 상상 속의 공기는 따뜻했고 살짝 바다 냄새가 섞여있었다. 앞으로의 상황이 조금은 괜찮아질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근거도 논리도 없는 상상에 지나지 않지만 음악이나 문학, 미술 같은것들이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그렇게 무논리적이지도 않다.


힐링 혹은 치유 그런거는 예술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의사나 약사에게 문의하는게 낫지 않을까요, 라고 시대에게 말하고 싶던 오랜 세월이 있다. 그런데 뭉크 같은 예술가도 의사나 약사가   있지 싶다. 어쩌면, 혹은 확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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