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 짊어진 돌봄, 국가와 나누고자 병을 알려 도움 요청
출장 중이었다. 창원에서 김해공항으로 이동할 때 비가 퍼부었다. 그래도 제주행 비행기는 예정대로 뜬단다. 빗길을 무사히 왔으니 차 한잔 마시며 숨을 돌리자 했는데, 전화가 왔다. 언제라도 두 손으로 받는 전화, 병원에서 온 전화다.
장애인등록을 갱신하려면 진료기록과 의사진단서를 다시 받아서 구청에 제출해야 한다. 의사는 곤란한 목소리로 장애인등록을 갱신하는 목적이 뭐냐고 묻는다. 목적이 뭐냐고? 또래 아이들에 비해 기능이 떨어지고 일상생활의 어려움을 겪는 것을 알면서 왜 물어보시지? 의사의 말은 기능이 좋아졌기 때문에 장애인 등록 갱신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교수님, 그럼 아이가 집에만 있어야 할까요? 집에서 부모가 끼고만 있을까요? 기능이 나쁘면 나빠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좋아지면 좋아졌으니 제도 바깥에 있으라는 이런 모순이 어디 있나요? 결국 모든 게 가족의 몫이라는 걸 다시 한번 알려주시는 거죠?” 라고 말하고 말았다.
의사에게 따질 일은 아니었다. 쏟아내고 나니 기운이 빠진다. 비행기도 타야 하는데, 출장도 마쳐야 하는데. 눈을 감아도 쉴 수가 없다. 대신 가방에 넣어온 헤르만 헤세의 「정원 가꾸기의 즐거움」을 펼쳤다.
“그가 갈망하는 것은 오로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이다. 그것이 고향이다. 그것이 행복이다.”(79쪽)
헤세가 정원에 있는 나무에게 하는 말이다. 그런데 내게 하는 말인 것 같기도 하고, 아이에게 하는 말 같기도 하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 아이도, 나도.
나무가 처음 장애인 등록을 한 것은 2016년이었다. 대한민국 청년이라면 피해 갈 수 없는 징병검사를 마친 후의 일이다. 2015년 10월 30일, 만 19세가 된 나무는 의정부 병역판정검사장에 갔다. A4사이즈 벽돌책 4권 분량의 진료기록을 들고. 여기에는 그동안의 입퇴원 기록, 종합심리검사 결과지 등이 들어있다. 그러니까 2008년 2월부터 2015년 10월까지 조현병과 함께 한 역사가 담겨있는 셈이다.
나무와 나는 검사장 입구에서 헤어졌다. 여기서부터는 나무가 혼자 해야 한다. 나무는 신체검사를 하고, 인성검사와 군의관 면담까지 마치고 나왔다. 징병검사 결과는 면제. 예상한 결과였다. 그런데 기분이 묘했다. 군대가 받아주지 않는 몸, 군대 갈 수 없는 몸을 가졌다고 국가가 확인해 주니 소외된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징병검사를 마친 기념으로 부대찌개를 먹기로 했다. 의정부 하면 부대찌개 아닌가. 한국전쟁의 씁쓸한 유산 부대찌개. 우리는 부대찌개를 맛있게 먹고 오늘의 씁쓸함을 잊기로 했다.
징병검사가 예상대로 진행된 뒤 다음 순서로 장애인 등록을 하기로 했다. 정신장애인의 경우 지원보다 낙인이 크다고 담당의사는 걱정했다. 별 혜택이 없는데 굳이 할 필요가 있냐며 다시 생각해 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하겠다고 했다. 계속 아플 거라면, 정신장애를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면, 장애인 등록을 하고 지원받을 수 있는 사회서비스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우리 가족이 짊어진 돌봄을 국가와 나눌 수 있기 때문에.
가까운 주민센터에 갔다. 의사소견서와 진료기록을 첨부해 장애인 등록 신청을 했다. 국민연금공단에서 장애정도에 대한 심사를 거쳐 장애판정을 받았다. 정신장애 3급. 정신장애는 다른 장애와 달리 1급에서 3급까지 분류된다. 정신장애는 모두 중증장애다. 이제 나무는 정신장애 3급, 중증장애인이 되었다.
이로써 나무는 지하철과 기차 승차권을 할인받고, 영화관람이나 박물관 출입 시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대학을 장애인 전형으로 간 것은 아니다. 정신장애 학생을 뽑는 대학은 없었다. 나무는 일반전형으로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 다니면서도 장애인이라고 등록금 혜택을 받는 것도 없었다. 등록금 지원은 1~2급 장애학생만 해당되었다. 또 대학에 있는 장애학생지원센터도 정신장애 학생은 대상이 아니었다. 장애학생지원센터는 신체장애 학생위주로 지원하고 있었고, 학생상담센터는 심리상담이나 진로상담을 하는 곳이지 정신장애인을 지원하는 곳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장애인 등록을 한 것은 잘한 결정이었다. 장애인 등록 갱신도 잘 된 일이다. 장애인 등록을 했기 때문에 나무가 대학을 졸업하고 갈 곳이 없을 때, 지역 정신건강복지센터를 이용할 수 있었고 사례관리를 받을 수 있었다. 사례관리사는 바리스타 자격증이 있는 나무가 카페에서 일할 수 있도록 추천해 줬고, 병원기반 동료활동가 양성교육에 지원할 수 있도록 안내했다.
이런 일은 부모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병을 알리고 장애인 등록을 하고 사회에 도움을 요청했고, 지역 정신건강복지센터는 응답했다. 장애인 등록은 나무가 덜 외롭게 살 수 있는 사회적 장치가 됐다.
이렇게 나무는 자존하고 자립하기 위한 길을 조금씩 만들어 가고 있다. 병도 삶의 일부임을 받아들여서 가능한 일이었다. 병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도 있고, 그 삶도 아름다울 수 있음을 말이다. 고통은 길지만, 그래서 순간순간 찾아오는 작은 행복이 소중하다는 것도 깨닫고 말이다. 예를 들어, 징병검사를 마친 의정부에서 부대찌개를 맛있게 먹는 순간을 즐기는 것처럼.
<한겨레 21> 1522호, 2024.7.22.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