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비롯한 전 세계 헌법에 영향을 미친 영국, 미국과 같은 나라의 헌법과 정치체제는 애초에 민주주의를 지향하지 않았다. 민주주의를 불신하고 민주주의를 억제함을 목표로 했다.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들의 논의에서 이 점이 잘 드러난다. 자신들이 만들려는 공화국이 민주주의를 지향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민주주의는 끔찍한 당쟁과 분열로 치닫기 마련이라고 생각했다. 해밀턴과 매디슨은 페더럴리스트 페이퍼(1788)에서 아메리카 공화국의 본질은 정부의 그 어떤 부문에서도 “대중의 집단적 영향력을 철저히 배제”하는 데 있다고 명확하게 못 박았다.
특히 미국의 의회와 선거제도는 전혀 민주주의를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제임스 매디슨은 국가의 참된 이익을 가장 잘 꿰뚫어 볼 지혜를 가진 일부 선량들을 통해 국가가 지배되어야 하며, 선거에서 당선한 사람들의 목소리는 소집된 대중 집회에서 나오는 목소리보다 훨씬 공동선에 부합한다고 했다.
19세기 불안한 타협
그들은 민주주의를 통해 힘을 얻을 흥분한 대중이 타인의 자유, 특히 상위 엘리트들의 재산권을 침해할 위험을 막는 데 집중했다. 헌법의 토대는 민주주의보다는 자유주의였다.
상황이 조금 바뀐 것은 19세기에 들어서이다. 미국 사회의 물질적 정치적 조건이 대규모 이민, 서부로의 팽창, 남북전쟁, 급속한 산업화 등으로 크게 달라졌다. 존재감을 키우기 시작한 대중의 요구를 받아들여, 일부 정치인과 이론가들은 민주주의라는 천덕꾸러기 개념을 되살렸다. 한때 정부의 그 어떤 부문에서도 대중을 배제하려고 만들어진 헌법이 이제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뒷받침하게 했다.
물론 민주적 개혁을 이뤄나가는 과정은 아주 느릿느릿했다. 1870년 제15차 헌법 수정으로 ‘인종, 피부색. 노예였던 경력“이 더는 투표권을 금지하는 조건이 되지 못했는데, 실제로는 긴 세월 동안 지켜지지 않았다. 1920년 제19차 헌법 수정에 들어서야 “미국 국민의 투표권은 성에 따라 금지되거나 제약될 수 없다.”라는 조항이 명시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 헌법에 대한 이해가 대폭 수정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대의제는 자유를 지키기 위해 민주주의를 억누르려는 이유에서 탄생했지만, 이제 대의제는 오늘날의 물리적 조건에서 민주주의 이상을 실현할 가장 현실적인 수단으로 설정되었다. 그리고 헌법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동시에 추구하는 것으로, 다시 말해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것으로 재해석되었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우려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충돌 문제는 해결하지 않은 채로.
기만 또는 최적화
자유민주주의는 엘리트의 통제와 대중의 지배의 기묘한 조화를 바라면서 만들어진 개념이다. 이 개념을 종래의 엘리트와 새롭게 부상한 대중은 각자 유리한 방향으로 받아들였다. 대중은 이제 자신들의 의사를 정책 결정에 반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엘리트들은 여전히 가장 중요한 문제들은 자신들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야스차 뭉크는 당시 엘리트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우리가 결과를 통제할 수 있게 해 준다면, 너희가 통치하는 것처럼 해주지.”
동상이몽, 어찌 보면 기만적인 타협이었지만, 이후 자유민주주의는 세계의 절반을 정복할 정도로 지배적인 개념이 된다. 자유민주주의는 인류 역사상 가장 번영하고 안정된 시대를 이끈 정치이념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크다. 두 개념은 논리적으로 모순되지만, 바로 그 모순으로 인해 의미심장하다. 자유주의 없는 민주주의는 전체주의로, 민주주의 없는 자유주의는 과두정으로 타락하여, 자유도 민주도 없는 세상을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2022년 자유민주주의 논란을 보며
최근 우리 사회는 해묵은 자유민주주의 논란을 반복 중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과서에 자유민주주의라고 적을 것인지, 민주주의를 적을 것인지를 두고 싸우고 있다. 각자의 이해관계와 명분을 두고 싸우는 것이겠지만, 교과서로 배울 어린 학생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얼굴이 화끈거린다.
첫째, 자유민주주의와 민주주의는 양자택일 문제가 아니다. 자유주의에서 출발했으나 민주주의와 아슬아슬 타협한 우리의 헌법과 정치체제를 설명할 때는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정확하다. 하지만 국민의 자기 통치, 국가의 정책 결정에 국민의 의사를 효과적으로 반영하는 것에 집중해서 이야기할 때는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민주주의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
둘째, 우리에게는 자유민주주의를 반공과 같은 의미로 해석하고, 정권에 반대하면 다짜고짜 빨갱이로 몰아세운 경험이 있다. 행여 그러한 경험을 추억하여 자유민주주의만 기록된 교과서를 만들려 한다면 퇴행적이고 위험하다. 상대 진영이 그러한 행태를 반복할까 두려워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 자체를 교과서에서 모조리 추방하려 하는 것도 발전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셋째, 논의를 심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떤 자유주의냐”, “어떤 민주주의냐”, 그리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유지되어야 하느냐”에 대한 ‘진짜 중요한’ 논의로 옮겨가야 한다. 가뜩이나 자유와 민주 모두에 경고등이 켜진 시대이다. 고작해야 말싸움 수준을 간신히 벗어난, 용어 논쟁만 반복할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