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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이 Feb 06. 2022

이별 후 두 달이 지났다.

 

이 년 가까이 만난 그와 12월에 이별을 이야기하고 조금씩 멀어진 지 두 달이 된 지난 금요일, 한 시간 정도 아폴리나 레스토랑 옆 바(이름을 모르겠다)에서 각자 맥주를 한 잔씩 마시고 이야기를 나눈 뒤 Place de la Commune에서 헤어졌다. 1월 9일 밤에도, 12월 12일 아침에도 그곳에서 인사했다. 그렇게 헤어지고 12월 12일에는 아라스 가는 기차를 놓쳤고, 1월 9일에는 Rue de l'Espérance를 따라 언덕을 내려가는 그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뒤돌고 난 이후로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울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날 오후에 친구를 만나, 저녁에 그와 만나기로 약속했다는 이야기를 전하며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그를 사랑하는 것 같다고, 볼에 난 잔털들과 조용한 잠에 든 숨소리를, 싸구려 피자에 행복하게 웃으며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을, 내 변덕에 어쩔 수 없어하는 표정들도, 사랑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것은 Les Tanneurs 카페에서 였을 거다. 그리고 그 날 저녁에 그를 만났고 Le Papagallo에 가서 서로가 서로를 견딜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경험했고(아마 스트레스 때문이었을 것 같다) 아마도 마지막으로 서로에게 소리를 지르고, 각자 Rue des Cinq Diamants의 양 끝을 향해 걸었다. 아주 가까운 사람의 반대쪽으로 걸어야 하는 일의 충동성과 피로를 더는 경험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화가 나서 아끼는 이를 등지고 걷는 것은 마지막이라고. 


2월 4일, 지난 금요일, 이별을 말하고 정확히 두 달 하고 하루가 지난 날 우리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바에서 맥주 한 잔씩을 앞에 두고 지난 한 달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우리의 친구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를 나누고, 바를 나와 Place de la Commune에서 포옹을 하고 헤어졌다. 나는 와줘서 고맙다고 말했고, 그는 모든 것에 고맙다고 답했다. 그와의 포옹이 그것이 마지막은 아니었을 것이다. 살면서 우리는 우리의 연이 허용하는 마주침들 속에서 따뜻한 포옹을 나눌 것이다. 우리가 함께 나눈 지난 2년의 시간은 언제고 그리울 것이다(코비드로 인한 세 번의 외출금지를 함께 보냈다! 그동안에 많은 어려움도 함께 했고, 그리스도 같이 네 번이나 갔다, 토로니에서 두 번의 생일을 보냈고.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그것들을 잊더라도 내 안에 살아 있을 경험들이다). 나는 언제나 그의 행복을 바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더 이상 나와 삶을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아마 다시는, 여름과 내 생일을 함께 보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하나도 슬프지 않다. 옳은 일이다. 마침내 이별을 극복한 것 같다.


그리고 이 일기를 쓰는 지금은 2월 6일, 일요일이다. 2월 4일, 그렇게 그와 다정한 이별을 마무리하고 친구와 Le Papagallo에 갔고, 흠모하는(...) 바텐더로부터 샷을 받아 마신 뒤 밖에서 릴로 이사 가는 친구 커플을 배웅하는 남자아이들(...) 무리와 친구를 먹었고(...), 그 중 한 명과 춤을 추고 다른 한 명에게 번호를 주고 다음 날 점심에 초대를 받고, 바텐더에게 번호를 따이고(.........). 정신 없는 주말을 보낸 뒤, 비오는 일요일 이른 오후를 나의 작은 방에서 조용히 보내고 있다. 내가 페이스북 스토리를 올리면 그의 어머니(와 나의 엄마...)가 가장 먼저 보는데, 그는 어제 저녁부터 하루 종일 메신저에 접속을 하지 않는 것 같고. 그런 것에 신경을 쓰다가 괜히 목 스트레칭을 한 번 해보고 그러다 천장에서 내려오는 거미를 발견하고...(저 각도로 내려오면 내 머리로 안착할 것 같은데 일단은 그대로 두었다. 알아서 이동하길...). 그러다가 문득 내 마음이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내 마음에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싶다가, 친구를 만나서 내리는 비를 보며 커피를 마실까, 점심에 초대했지만 가지 않았던 그 착하고 귀여운 남자애랑 맥주 약속을 잡을까 하다가 '그의 일 때문에 더 이상 내가 마음 아프지 않아도 괜다', '마음 쓰지 않아도 된다'라고 스스로에게 말을 해주니 편안해졌다. 


그렇다. 나는 이제 그 때문에, 그와 나의 관계 때문에 힘들어 하지 않아도 된다. 그가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아도, 그가 내 친구들과 만나고 싶어하지 않아도, 만나고 싶다며 왜 안 보여주냐고 해도, 내 가족의 영상통화에 인사를 하고 싶다고 해도, 자기 가족과 영상통화를 한다고 인사하라고 해도, 그것이 하고 싶어서도, 하고 싶지 않아서도 마음 쓰지 않아도 된다. 그가 행복해 보이지 않아도, 그가 아주 행복해 보여서 나에게 무엇을 더 바랄까,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아도 된다. 그의 수업이나 논문을 걱정하지 않아도 좋고 그의 친구들과 만날 때 그가 내가 덜 사교적이라고 생각할까 스트레스 받지 않아도 된다. 언제 오느냐고 묻지 않아도 되고, 말해주길 기대하지 않아도 된다. 


서로가 들인 노력에 비해 우리는 깊은 신뢰를 쌓지 못했고 그것이 결국 사랑을 만드는 일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하지만 연인이라는 것은 또한 어떤 '직위'라서 신뢰 없이 그 직위를 유지하는 것에는 너무 많은 품이 들었던 것 같다. 내 마음은 오래 불안과 불만에 가득찼었다. 그것이 그의 잘못도 아닌 채로. 불안과 불만은 사랑과 행복의 효과는 아니다. 이별은 좋은 선택이었다. 우리가 2년 전에 그 이상한 공간에서 이상한 시간에 서로를 알아보고 곧바로 서로에게 빠졌던 것처럼, 그 반짝이던 인연이 우리를 미래의 어떤 한 시간에 한 공간에 잠시 데려다 놓으면 다시 한 번 따뜻하게 포옹을 나눌 것이다.


그때와 그곳이 아닌 시간과 장소에서 나는 더 이상 마음 쓰지 않아도 된다. 그의 일은 나의 일이 아니다. 오늘은 비 오는 일요일이고, 나는 자유롭기 위해 나의 삶을 살고 있다. 오직 나의 것만을. 


2020년 토로니의 바다에서 그가 찍은 영상 속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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