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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이임 Nov 25. 2022

녹즙과 운동

상향등을 켜고 뿌연 새벽을 가로질러 간다. 양손에 얼음 팩과 녹즙, 고객의 동호수가 적혀 있는 종이와 볼펜을 쥐고서. 새벽 네 시 반부터 아파트 단지 다섯 곳을 돌면 일곱 시 반쯤 된다. 배달 알바 일과다.

 

배달하면서 가장 불편했던 건 무엇이었나. 그건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야 하는 것도 아니고, 생각보다 적은 보수도 아니었다. 바로 매번 경비실을 들려야 한다는 점이다. 신분증을 맡긴 뒤 각 동으로 들어갈 수 있는 마스터 키를 받아야 한다. 그럴 때마다 단지 위로 다니지 말고 주차장으로 바로 들어가라는 소리를 듣는다. 새벽이라 주민들이 깬다는 이유였다. 단지는 또 얼마나 넓은 지, 동과 동 사이에도 거리가 꽤 난다. 바삐 뛰어야만 한다. 배달할 집이 30층이 넘어가면 마음이 조급했다. 엘리베이터 타는 시간도 아까워서 낮은 층은 뛰어 올라가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적응이 되자, 그제서야 녹즙이 눈에 들어왔다. 키즈하이, 유기케일… 50가지가 넘는 종류의 녹즙들. 맛이 궁금해졌다. 우리 집도 한 번 시켜볼까 싶었다. 배달사원이 정성스레 보냉 가방에 얼음 두 팩을 함께 넣어 아침까지 차갑다. 그거 하나 들고 출근하면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퇴근한 아침에 밥을 먹으며 우리 집도 배달을 신청하려고 녹즙 사이트에 들어갔다. 사람들이 제일 많이 먹는 사과 케일로 주문해야겠다. 그리고 요일마다 다른 종류로 먹으니 화 목은 노니 깔라만시로 신청해야지. 그렇게 견적을 재고 나니 십만 원이 훌쩍 넘어 있었다. 고작 음료수 값으로 이렇게 많은 돈을 지불하다니. 그 다섯 개의 아파트가 다른 세상 같았다.

 

십만 원으로 녹즙 마실 바에 체육관 끊고 운동이나 하겠다. 핸드폰을 덮고 괜한 심술을 부린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있다. 확실히 가난한 사람은 부자보다 시기심이 더 많고, 이는 가난의 가장 깊은 비극이라고. 이게 다 결핍의 불안 때문이란다. 그리고 자주 이런 결핍 때문에 가난한 사람은 자기에게 없는 모든 것을 과대평가하고 무한히 많은 것을 과소평가한다고 했다. 이 말을 한 작자가 어떻게 가난을 아나. 가난해봤나? 내 말은 그 십만 원으로 더 가치 있는 일에 쓰라는 것이다. 이건 절대 십만 원이 아까워서 그런 게 아니다. 절대로, 절대로….

 

오늘도 31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잠깐 한 숨 돌린다. ‘돈 아깝게 이런 걸 왜 먹어’ 하면서 동시에 이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녹즙을 사지 않으면 내 일자리도 사라질 거라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대충 쑤셔 넣으려던 것도 신경 써서 넣게 된다. 더 빨리 다른 동으로 뛰어간다. ‘체육관은 무슨 이게 운동이다’ 위안하며 그렇게 뿌연 새벽을 가로질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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