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주기
단단한 외골격이 특징인 절지동물군은 지구상 가장 성공적인 분류군으로 꼽힌다. 갑옷 같은 껍질이 방어에 능하고 변화무쌍한 환경에 경쟁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런 껍질을 스스로 벗겨낸다. 자신을 지킬 수 있을 만큼의 단단함이 제 성장조차 가로막아서다. 절지동물들은 몸을 더 크게 만들기 위해 오랜 피부를 벗어내고 새로운 외골격을 침착시킨다. 이들은 주어진 평생 내내 탈피한다.
나를 구하는 것이 나의 한계가 되는, 나를 떼어내야 비로소 더 커진 내가 될 수 있는 아이러니. 탈피의 역설을 해방의 메시지로 해석한 예술가가 있다. 스위스 출신의 하이디 부허. 그의 작업은 어떠한 물성에 라텍스를 얇게 바르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것을 피부(혹은 피막)라고 부르는데, 나중에 그 형태를 유지하여 떼어내 전시한다. <바닥 피부>는 조상 대대로 살던 집 마룻바닥의 피부를 떼어낸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는 가부장 사회로부터의 해방을 외칠 수 있었다. 집의 피막을 다 떼어내는 데 걸린 시간은 꼬박 2년.
탈피가 이제는 내가 아니게 된, 과거의 자신과 마주하는 일로 귀결된다면 이 논리엔 어떤 주어든 대입할 수 있지 않을까. 운 좋게 물음에 답이 되는 문장을 책 <타인을 듣는 시간>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야기하는 이가 스스로 자신의 슬픔을 자신에게서 떼어 내고 마주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 이에 따르면, 슬픔과 같은 감정 역시 뗄 수 있는 대상이다. 여기에 두 가지 전제 또한 동시에 읽힌다. 이것은 누가 대신 해줄 수 없고 재촉 역시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이쯤에서 하고 싶었던 말. 하이디 부허가 집 한 채의 피부를 벗겨내는 데만 2년이 필요했다. 팔뚝만 한 게는 이틀이 걸린다. 그래서 나는,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사라진 어린 사람들에게 얼마나 두꺼운 시간이 필요할지 감히 상상할 수 없다. 절지동물이 가장 취약할 땐 새 살 위에 외골격이 단단해지길 기다리는 시간이라고 한다. 지난한 탈피를 대신할 수 없어도 온전히 마치길 기다리는 건 할 수 있다. 그 기간을 함께 감내하는 건 잊지 않겠다는 말과 다름없을 것이니, 얼마나 걸리든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이렇게 몇 자 써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