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읽고 쓰고 둔다
어느 찌질한 방화범의 고백
『금각사』 /미시마 유키오/허호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 2017
이건 또 뭐야?
작품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 읽는다면 전반부는 좀 지루하다.
주인공 미조구치의 성장 과정과 사건들은 그저 찌질함 자체다. 시골 사찰의 주지 아들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자신도 중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중학 시절도 그렇고, 아버지가 강조하는 금각사의 미(美)도 실체를 보지 못한 채 환영만 간직할 뿐이라 공감하기 어렵다.
아버지가 죽고 교토로 무대를 옮겨 금각사도 직접 보고 대학에 들어갈 계획이지만 훌륭한 승려가 되겠다는 의지는 없다. 제대로 정진하여 노사의 신임도 받고 후계자가 되면 좋으련만 금각만 바라보다 엉뚱한 사건에 연루된다. 관광객 여자의 배를 밟아 유산시킨 죄의식은 있으나 떳떳하게 자수하지도 못하고, 착한 친구 말에 위로받으며 자기 행위를 감출뿐이다. 다행스럽게도 노사의 배려로 대학은 갔다.
얘도 문제네!
대학에서 만난 안짱다리 친구 가시와키의 언행은 불결하고 사악하다.
불교의 선문답 같기도 하고, 청소년기의 덜 자란 자의식 같기도 한 요설이 불편하다. 자기가 동정을 뗀 사설을 늘어놓고 이후의 악마적인 엽색 행각을 이어간다. 이 녀석의 언행에 스며드는 미조구치의 모습은 또 무엇인가.
기숙사 선배 또는 성숙한 동급생이 등장하는 성장소설의 전형인가. 둘의 행동을 정신없이 따라가다 보면 누구 하나 죽을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전후 일본의 이상한 남자들 이야기라는 측면에서 『설국』이나 『인간 실격』, 『개인적 체험』에서 본 놈들이 겹친다. 심지어 1차 대전 후 유럽 청년들의 방황을 그린 헤르만 헤세나 서머싯 몸도 생각난다. 결국 고뇌와 방황 끝에 많은 것을 상실하고 새로운 자아로 성숙하게 태어나는 이야기가 될 것인가?
그런데 엉뚱하게도 죽는 것은 옆에 있던 착한 친구였다. 누구에게나 말 못 할 고민은 있었나. 그 죽음을 전해 들으며 이상한 배신감을 느낀다.
가질 수 없다고 파괴하다니.
지루한 시간이 지나다가 미조구치가 금각에 불 지르며 장르 변경. 사회성 짙은 스릴러가 된다. 늘어놓았던 사설들이 인근 산꼭대기로 도망가 담배 한 대 피우며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것이었구나 이해된다.
방화 장면을 스펙터클 하게 보여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면 몰입도가 좋지 않았을까. 처음부터 그렇게 풀었다면 동정심을 자극하여 범죄를 합리화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말더듬이와 추한 외모, 무능력한 부모에 시골 출신의 콤플렉스. 힘들게 살아온 과정에서 그를 지배한 절대적 존재 ‘금각’을 파괴함으로써 자유와 새로운 삶을 만들려 했다는 성장 스토리. 작가는 그런 전개가 싫었던 모양이다. 계속 찌질하고 멍청한 놈으로 남겨두고 싶었을 것이다.
『호밀밭의 파수꾼』 정도의 일탈이라면 아픔을 이겨내고 새로운 출발을 하는 주인공을 향해 격려와 응원을 보낼 수 있겠지만 이번 경우는 그냥 갸우뚱할 뿐이다. 문화재 방화범에게 새로운 삶이 무슨 의미인가.
살면서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것들의 몰락.
육군에 간 선배의 단도, 마을 처녀 우이코, 낯선 곳에서 만났던 꽃꽂이 선생의 잔영과 같은 사건들을 열거하며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했지만 갖지 못한 것들을 기억한다. 단도에 상처를 내고, 우이코는 다른 남자의 품에서 죽었다. 꽃꽂이 선생은 가시와키에게 유린당했고, 그렇게 배신하고 사라져 간 것에 실망한다. 마지막 남은 아름다움의 원형 ‘금각’은 가질 수 없다면 배신하기 전에 파괴한다. 남천의 고양이처럼. 금각을 처음 보던 날 이미 방화가 운명 정해졌다는 망상까지 곁들여 범죄의 이유를 만들어 간다.
독자의 시간.
사회적으로 미숙하고 정신적으로 부족한 방화범의 수기를 읽으며 해석하고 의미 부여할 필요는 없다. 불교에 귀의하여 평생 정진할 요량으로 공부하고 살아갈 녀석인 줄 알았더니, 스승이나 미행하고 여자 밝히는 억압된 욕망 덩어리에 부모와 스승, 친구에게 이해받고 싶어 몸부림치는 어린아이였을 뿐.
이 작품이 발간된 50년대부터 낭만의 80년대까지. 청춘들에게 질풍노도의 시대가 허락되었던 때에는 이 작품이 하나의 텍스트요 교본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정의를 빙자한 경쟁에 시달리는 현재의 청춘들에게 문화재에 불을 질렀고, 자신의 범죄를 반성하지 않으며, 어찌어찌 살아보겠다고 잔머리 굴리는 이야기는 어떻게 읽힐 것인가. 작가가 살아간 시대와 독자의 시간의 다름을 생각한다.
낯선 날의 잔인한 폭력
“우리들이 갑자기 잔인해지는 건,
가령 이렇게 화창한 봄날 오후에 잘 다듬어진 잔디밭 위에서,
나뭇가지 사이로 햇살이 스미듯 비치는 모습을
무심코 바라보고 있을 때와 같은,
그러한 순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니?”
하나의 작품이 그 작가의 생각을 투영한 결과라면, 작가가 그 시절 갖고 있던 내면의 불안과 이후의 엉뚱한 방식의 죽음까지도 이해할 것 같다. 어느 날 갑자기 잔인해지지는 않는다. 내면에 응축된 무엇인가를 찾아 긴 이야기를 펼쳐낸 것이다. 재주가 뛰어났으나 그것을 감당하지 못해 끝내 불행했던 한 사내가 기록한 방화범의 고백. 한 문장씩 다듬어 읽다 보면 느끼지 못하고 지나친 구절만으로도 어느 날 문득 떠오르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다 읽고 책을 덮을 때 문득 중학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금테 안경에 열정적으로 수업을 진행하는 생물 선생이 있었다. 학생들과 교류는 많지 않지만, 수업 준비도 철저하고 열심히 사는 중년의 사내였다.
그런데, 가을바람이 선선히 불기 시작해 창문을 열어 놓고 수업하던 어느 날,
누군가 잠시 창밖을 내다보며 하품했다. 코를 간지럽히는 바람과 작열하는 햇빛의 부조화로 나타나는 현상. 교탁 앞으로 불려 나간 녀석에게 무차별적인 따귀 세례가 이어졌다. 무서워서 한발 물러설 때마다 따라가며 때렸다. 그 거대한 폭력보다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그 선생의 말이었다.
“어때, 너보다 작은놈이 때리니까 기분 나쁘냐. 그렇게 기분 나쁜 눈빛으로 쳐다보면 어쩔 텐데. 이 놈이 반성이 없어. 반성하고 빌어야지”
그 맑고 개운한 날, 그 선생을 자극했던 기운은 무엇이었을까.
자기보단 커가는 제자들에게 그런 감정을 가진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그렇게 평온한 교실 풍경에서 무엇이 폭발할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