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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충영 Dec 31. 2023

[철없는 아저씨의 배우 도전기 (1)]

배우가 되고 싶은 은퇴한 정 부장의 실시간 르포르타주

가슴이 방망이질 치기 시작한다. E엔터테인먼트 P대표가 자리로 돌아왔고, 나는 계약서 초안을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다. 2년짜리 E엔터테인먼트 소속 계약서이다. 문제는 8개월간 연기 교육을 위해 돈을 내야 한다는 점이다. 등록비 60만 원에 연기 수업료 312만 원이다. 한 달에 39만 원에 해당하는 큰돈이다. P대표는 2년간 교육이니 한 달에 15만 원 밖에 안된다고 하지만 8개월은 월 4 회 교육이지만 이후는 월 1회로 수업이 줄어든다. 아내한테 물어보지도 않았다. P대표가 말한다. "10만 원짜리 보조 출연 두 번만 하면 한 달 수업료는 빠집니다. 좀 열심히 하면 한 달 용돈은 충분히 벌 수 있어요. 뭘 망설이십니까?" '그래 눈 딱 감고 2년만 해보자. 나도 배우가 되는 거야!!!' 아직 결심이 서지도 않았는데 내 손은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있었다. 이제 372만 원을 결제할 시간. P대표의 얼굴도 약간 상기된 듯하다. '저기 대표님, 죄송한데요. 계약을 파기했으면 좋겠어요. 연기 실력도 없는 제가 배우가 된다는 게 말이 안 되네요. 시간 뺏어서 죄송해요. 이만 가보겠습니다.'라고 말하고 그냥 뚜벅뚜벅 걸어 나올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나를 감싸는 불가항력의 에너지가 내 입을 막아버렸다. 삼성페이 모드의 내 스마트폰은 P 대표가 부랴 부랴 갖고 온 휴대용 카드 단말기와 마침내 죽음의 키스를 해 버렸다.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일시불인가요?" 나의 결제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는 듯 P 대표는 말했다. "12개월 할부입니다. 이자는 1.8%고요. 이자가 부담되시면 나중에 단역배우로 번 수입으로 나머지를 한방에 결제하시면 됩니다." P대표는 세일즈의 천재다. 내 심리를 완전히 꿰뚫고 있다. 그렇게 순식간에 단역 배우 계약이 끝났다.


그렇게 원했던 계약을 했는데 기쁘지 않고 오히려 마음이 무겁다.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카드 결제 금액을 알려줬더니 "너 낚였네. 낚였어."라는 시니컬한 답이 돌아왔다. 아내의 단도직입적인 그 한마디로 온몸에 힘이 쪽 빠졌다. 나는 중얼거렸다. "도대체 내가 뭘 한 거지?" 하지만 계약서도 읽어 봤고, 언제든지 계약해지를 할 수 있다고 되어 있었고, 중도 해지 시 연기 수업료도 비교적 합리적으로 돌려받을 수 있다는 점을 상기했다. 그리고 E엔터테인먼트는 전혀 실체 없는 회사는 아니었다. 고층 빌딩 한 층에 넓은 사무실과 직원들이 있었다. 이 회사는 주로 아역 배우, 어린이 모델을 전문적으로 기르고 공급하는 배우 송출 업체인 듯했다. 하지만 코로나 때 어려움을 겪으면서 사업 다각화 차원에서 시니어 배우 송출을 시작했다고 한다. P대표와 계약 전 잡담을 나누면서 들은 얘기다. 어쨌든 주사위는 던져졌고, 루비콘 강은 이미 건넜다. 이 회사의 교육과 지원아래 나는 시니어 배우가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기만 하면 된다. '돈을 투자해야 뭐든 열심히 하게 되어 있지. 안 그래?' 그렇게 자위하면서 집으로 오는 전철에 몸을 실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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