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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민 Nov 15. 2023

쌀도 글도 박박 씻어

묵은쌀이 주방 구석에 한가득 숨어 있었다. 언제 산 것인지 기억나진 않았지만 다행히 쌀보관통에 들어있어서 그런지 벌레도 꼬이지 않았고 그저 색깔만 어쩐지 흰색이 아닌 회색빛이 돌뿐이었다. 분명 잘 닫아두긴했는데 눈으로 보기엔 먼지가 쌓인 건지 썩은 건지 알 수 없는 애매한 상태가 되었다. 이대로 버릴까 하다가 혹시 몰라 쌀을 조심스레 씻어보았다. 보통 쌀뜰물이라 하는 뽀안색이 아닌 회색 국물 같은 것이 뚝뚝 떨어진다. 이런대도 씻어야 할까 잠깐 고민했지만 좀 더 씻어 보기로 했다. 어쩐지 씻으면 씻을수록 맑은 물이 올라왔다. 쌀도 어느새 본연의 색인 하얀색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나와 가족들이 먹을 건데 이런 걸 먹어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취사를 해봤다. 밥이 완성되고 맛을 보니, 어라 평소보다 밥맛이 좋았다. 갓 지은 밥이어서 맛있는 건 아니었다. 햅쌀을 사도 요알못(요리를 알지 못하는 자)인 내가 하는 밥은 맛이 없었다. 그런데 이건 맛있었다. 무슨 차이가 있었던가. 재료는 오히려 더 안 좋지 않았던가. 바뀐 것은 딱 하나. 여러 번 그리고 쌀알이 다 없어질 정도로 박박하면 안되고 조심스레 씻은 것뿐, 그리고 아까워서 어떻게든 살리고픈 마음을 담아서 말이다. 영양은 그대로 있고 부유물만 떨어지길 바라며.


모처럼 맛있는 밥을 먹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죽은 줄 알았던 쌀이 맛있는 밥이 되어 살아난 것처럼 마음도 글도 재능도 살아날 수 있다. 이렇게 죽은 것같이 보였어도.


어떤 일을 하던 각 과정은 필요한 법. 그러나 과정이란 게 어떤 단계를 거치느냐에 따라 다른 밥맛, 다른 글맛을 낼 수 있다. 이런 것을 꼭 겪어봐야 알 것은 아닐 텐데 어쩐지 나란 사람은 이렇게 겪어봐야 한다. 아니면 이렇게라도 알아서 다행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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