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건‘이 있고 의외로 변한 건 없었다. 여전히 회사 문을 제일 먼저 여는 건 작은 김사장이었다. 그날도 늘 그의 루틴대로 컴퓨터를 켰다.
메일함에 익숙한 듯 낯선 메일이 하나 왔고 그는 이를 열어봤다.
“임원진들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덕분에 저는 넉넉한 퇴직금으로 잘 살고 있습니다(물론 그간 저의 노력의 시간으로 쌓아올린 근속 햇수 덕분이지만요).
이번 일에서 많은 것을 느끼셨으면 좋겠는데. 세상이 참 좋아졌죠? 녹음 및 캡처의 순기능도 잘 아셨을테고요. 그래서말인데 이제는 직원들 수시로 조지는 거 그만하세요. 21세기씩이나 돼서 말과 사람의 소중함을 아시는 조직이 되고 싶으시다면요.
뭐가 조지는 건지 이해하기 쉽게 알려드리면
1. 시도 때도 장소도 주말도 없이 연락하기(밥 먹다 체합니다)
2. 계약된 내용 외 일 시키기(개 케어, 취향 반영 전혀 안 되고 혼밥 못 해서 데리고 가는 밥 친구로서의 동행, 야근 및 추가 수당 미지급 등)
3. 폭언 및 수치심 유발 발언(내 자식, 내 배우자가 들으면 열받을 소리)
4. 문서로 쿠사리 주기(문서는 정확한 게 맞지만 지금처럼 ‘구박의 구실’로 삼으면 다들 쓰기 힘들어합니다)
5. 그 외 기록 및 공개되었을 때 객관적으로 질타받을만한 안 좋을 모든 일
그래도 저는 ‘그’ 조직과 조직원에 대해(본인들이 그 조직원은 아닌 건 아시겠죠?) 리스펙트 한다는 점은 변함없습니다.
안녕히 아니 안녕히 계시지 마세요.
반성할 건 하시고 안녕히 계세요.
그럼 이만
_ 김슬기 ‘전’ 과장
추신:
- 내가 들으면 기분 나쁠 말과 행동을 하지 맙시다. 다 누군가의 가족.
- 부디 이번 일을 계기로 ‘사람’을 나와 ’같은‘ 존재로 보시는 계기로 삼으시길. 존중, 존경받고 싶으면 나 먼저 그렇게 하길. 그러면 언젠가는 존경받지 않으시겠어요?
- 혹여 녹음할까 빈 몸으로 오라 해도 생각을 멈출 수 있을까요? 폭력보다 무서운 게 펜이고 펜보다 무서운 게 소문입니다
* 혹여 이런 문자에 고깝거나 기분 나빠도 할 수 없습니다. 온대로 간다고 꼰대 발언이 꼰대 발언으로 돌아간 것뿐입니다.
이런 저의 의견이 지극히 개인적이라 생각하실 듯하여 그간 연락 끊겼던 퇴사자들의 줄잇는 여러 연락 중 몇 건을 추가로 소개해 드립니다. 반성 좀 하세요.
1.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 인간들을 경험했지만 이렇게까지 천박한 사람인 줄 몰랐고,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있는 것도 알고는 있었지만 또 이렇게 깊이 잠식당해서 자기 파괴의 길로 갔을 줄도 몰랐네. 각설하자면 그 인간은 눈 뜬 장님이라고 생각해. 너의 눈빛에서 느낀 게 경멸 밖에 없다니. 물론 그 눈빛은 진실된 마음일 수 있으나…ㅋㅋㅋ 그건 자기 빼고 모두가 알고 있던 본인의 문제를 우연히 너를 통해 발견하고 자존심이 상해 꼬투리를 잡은 것 같아.
경멸을 인식했더라도 자기 성찰이나 회고를 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단순한 존중의 문제로 해석한 것조차 너무 어리석고 ‘그’답네.
2.
칼날로 이참에 멸을 해 버려~
3.
괴롭혀놓고 왜 개소리인지.. 아이고 두야 잊는 데 오래 걸렸어. ㅠ”
어쩐지 부아가 치미는 작은 김사장이었으나 별도리는 없었다. 조용히 화면 창을 끄고 곧바로 그의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날 그의 첫 임무는 ’라면’이의 사료와 배변 패드 구입이었다. 이런 사실에 두 번째로 현타가 오는 작은 김사장은 장바구니에 있던 사료의 개수를 3개에서 1개로 줄였다. 그리고 그 사료 두 개 마저 두뿔 최고급 사료에서 한 단계 낮은 그러나 얼핏 겉포장지로는 별 차이가 안나는 것으로 바꿨다. 그런 작은 일탈에 살며시 미소 짓는 작은 김사장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행복한 듯 안 행복한 듯 행복하게 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