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워 보여도 결코 가볍지 않은 "밥 한 끼"
한 달 전부터 새 직장으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거의 일 년을 쉬다가 다시 일하는 소감을 딱 한 마디로 표현하면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밥벌이도 하고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얼굴, 새로운 일을 만나는 것이니
고맙고도 감사한 마음이다.
아직은 쓸만하다고 인정받은 것 같아 잠시
어깨가 으쓱 올라가는 건 보너스.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출발한 직장 생활은 워밍업을 끝내고 이제 본격 주행 중이다.
다시 시작한 직장 생활에서도 오아시스는
여전히 점심시간 이다. 쉴때는 점심을 거르거나 대충 때우곤 했는데 이젠 그러지 않아서 좋다. 밥은 역시 누군가와 함께 먹어야 밥심도 난다. 동료들과 식탁에서 나누는 대화도 따스하기만 하다.
처음 점심을 먹으러 사무실 근처
음식점에 간 날, 재미있는 장면을 목격했다.
식사를 마친 동료들이 계산대 앞에 모여 각자 카드를 꺼내 음식값을 치르는 광경이었다.
한 사람이 일괄 계산하고 나중에 정산할 거라 예상했는데. 앗! 진짜 더치페이를 하네.
신기한 듯 한동안 눈길을 떼지 못했다.
식당 주인도 불편한 기색 없이 카드를 받고
돌려주기를 반복했다. 누군가 특별한
일로 밥을 살 때를 제외하곤 여럿이 식사할
때는 예외 없이 현장에서 더치페이를 했다.
정해진 단골집 없이 어느 식당에 가서든
그날 식성에 따라 각자 메뉴를 선택해서 먹고
자기 몫을 내면 끝. 깔끔하고 합리적이다.
나만 모르고 지내왔던 것일까? 지구를 떠났다가 돌아와 적응 훈련을 하는 느낌이다.
동료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유심히 본다.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라 해도 배울 건
분명히 있다. 따슨 밥을 목구멍으로 넘기며 이어지는 대화, 온기로 채워진 분위기. 동료들과 함께 하는 점심시간은 언제나 즐겁다.
밥과 직장 생활은 자웅동체 같다.
“밥벌이”를 위해서 직장에 나가고, 무엇이든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거” 아니냐며 밥을 먹고, 직장에서 나가거나 일이 없으면 “밥줄이 끊긴다”라는 말을 하고, “밥 한번 먹자”란 말로 인연을 이어가고, “밥값을 해야 한다”라며 결의를 다지고 “밥이 보약”이라며 식사를 챙긴다. 직장 생활과 관련된 밥의 은유가 이렇게 많을 줄이야.
그중에서 "밥 한 번 먹자" 만큼 귀에 익은 말도 없을 것이다. 가벼워 보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우리 밥 한 번 먹자". 상황에 따라 “난 당신과 잘 지내고 싶다” 혹은 “난 당신에 대해서 알고 싶다” "우리 사이 문제없지" 란 의미로 누구든지 한번쯤 해보았을 말.
진짜 밥 한 끼를 함께 하자는 의미부터 가벼운 인사 정도로 건네는 말까지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냥 인사정도로 하는 말을 두고 굳이 약속을 정하려 하는 사람은 눈치 없는 사람 취급을 받는다. 가벼운 인사로 남발하는 사람도 호감이 가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밥을 언제 함께 먹느냐에 따라 친밀도를 판단하기도 한다. 점심보다 저녁을 함께 할 수 있는 정도는 돼야 끈끈한 관계로 인정 한다. 저녁은 점심처럼 시간제약이 덜하고 상황에 따라 술 한잔 정도 할 수 있을테니 그리 생각해도 무리가 없다고 보여지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좋은 인연과는 언제 밥을 같이 먹어도 좋을 테니까.
두 달에 걸쳐 연속으로 밥 한 번 먹었던
특별한 기억이 있다.
전에 회사 다닐 때, 부서원이 40명 이상 되는
매머드 부서로 발령난 적이 있다. 부서원 전원과 따로따로 식사할 계획을 세웠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일종의 신고식이었다. 한두 명씩 약속이 되어 식사를 하다보니 거의 두 달이 지나서야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업무중에는 사적인 대화가 거의 어려워
밥이라도 한끼 하니 벽이 약간 낮아지긴 했다.
그때 절실히 느꼈다. 회사에서 진정한 관계의
시작은 밥 한 끼라는 걸.
좋아하는 시 한 편이 있다.
밥에 대한 함민복 시인의 시. “긍정적인 밥”.
..시 한 편에 삼만원이면 /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밤이 되네// 시 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인은 자신이 쓴 시를 통해 국밥 한 그릇
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주고
싶다고 말했다. 굳이 시가 아니라도 국밥
한 그릇을 함께하며 서로 가슴이 따스해질 수 있다면.
그런 의미에서, 밥을 한 끼 나눈 사람은
소중한 인연이다. 밥만 함께 먹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마음을 나누었기
때문이다. 반드시 국밥이 아니라도.
밥에 관한 한 가장 향기로운 말씀을 하신
분은 어머니였다. 어머니께 전화를 드리면
항상 하시는 말씀 "밥은 거르지 말고 먹고
다녀라." 이 세상의 어떤 어머니라도 나처럼 자식에게 그런 말씀을 하셨을 것이다.
이번 추석에 성묘 가면 어머니께 고할 예정이다.
“어머니, 걱정마세요.
여전히 밥은 잘 먹고 다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