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레곰 Mar 08. 2024

반고흐와 함께 커피 한 잔을

내가 살았던 도시에서 아를 Arles까지 바로 옆동네니까 자주 갈 수 있지 않겠냐고 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엑상프로방스에서 아를까지 차로 운전해서 45분 남짓, 대중교통 버스로는 한번 갈아타서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남프랑스는 도로가 잘 닦여있지 않고 고속도로마저 단순한 길로 엮어져 있어서 더 빠른 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그 길로만 가고 싶은 곳에 다다를 수 있다. 


아를 시내 전경


아를은 독특한 도시다. 역사와 전통이 매우 깊고 도시 곳곳에 잘 간직하고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어쩌면 아를이 엑상프로방스보다 조금 더 전통성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지중해가 근접해 있고 도시 앞에는 론강이 흐르고 있으니 외적이 자주 침입을 했을 것이고 사람들은 더욱 강인하고 굳건하게 살아와야 했다. 특히 꺄마그 Camargue에서부터 아를까지 흰말을 타고 도시를 지키며 사람들과 순례자를 지키는 가디언이 많았다. 프랑스 사람들은 도시의 색깔이 분명히 드러난 사람들에게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별칭을 붙어줬다. 그래서 아를 사람은 아를레지안 Arlésien이라고 부른다. 


프로방스 해바라기


그런데 이런 아를에 정말로 갈 일이 많았다. 한 번은 어학수업을 하면서 문화 탐방으로 방문했었고 또 한 번은 학교 세미나 참석하러, 다른 번에는 학교 실습하러 그 밖에는 친구들을 데리고 놀러 왔던 기억이 있다. 정확하게 몇 번이나 아를을 다녀왔는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사실은 깨달았다. 빈센트 반 고흐가 충분히 아를에 반해 평생 눌러앉고 싶어 했다는 것 말이다. 


온통 노오란 건물과 파아란 하늘이 인상적인 이곳은 한국 사람에게 굉장히 익숙한 도시다. 도시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마을에 불과하지만 분명 프랑스 사람들에게 아를은 도시나 다름이 없다. 빈센트 반 고흐가 일생의 짧은 순간 이곳에 머물며 살았고 프로방스 특유의 정취에 반해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곳이다. 분명히 앞에서 언급한 아를 특유의 강인한 분위기가 고흐의 마음을 더 잡아당겼을지도 모르겠다. 


반 고흐 카페

내가 아를에 갈 때마다 고흐의 여정을 따라 시내 Centre ville를 산책한다. 먼저 도시 입구에서 보이는 생트로핌 주교좌성당을 중심으로 그 광장에 머무른다. 아를은 과거 독립된 왕국이었고, 가톨릭교회에서도 상당한 위치를 가졌다. 아를 대주교는 교황청에 오다니면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고, 프랑스 내에서도 많은 고위 성직자들이 아를에 모여 회의까지 했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의 교회 박해 그리고 정교분리법으로 아를 대교구는 엑상프로방스 대교구에 편입되어 현재는 교구의 기능이 사라진 상태다. 교구의 중심이 되었던 교구청 건물은 거리 이름으로만 남아있고 현재 아를 지방정부 청사로 사용하고 있다.


이런 아픔을 간직한 채 조금 걷다 보면 아를 카페가 나온다. 고흐가 '밤의 카페테라스 Terrasse du café le soir' 그림을 그린 곳이다. 아닌 밤 중에도 프로방스 특유의 노란빛이 어두움을 뚫고 나와 손님들을 반긴다. 그러나 고흐의 명성 때문인지 카페 이름은 반고흐 카페로 바뀌었고 나처럼 고흐의 자취를 찾아온 사람들을 맞이하기 위해 관광 카페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카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어서 시간을 거스르며 고흐와 마치 대화를 하며 커피 한 잔을 마주 보고 마시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고흐가 정신병 진단을 받고 입원했던 병원은 현재 엑스 마르세유 대학교 아를 캠퍼스로 사용하고 있다. 고흐가 갇혀 지내며 바깥 풍경을 그렸던 정취는 그대로 남아있으나 그가 가졌던 슬픔과 고독함은 더 이상 느끼기 힘들다. 오히려 교실로 바뀌어 버린 옛 병원동을 들락날락하며 수업을 듣고 있는 대학생들의 생기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제 갓 성인이 되어 세상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대학생들에게 고흐의 그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여유란 아마도 없을지도 모르겠다. 


반 고흐가 입원했던 병원

아를 시내를 거의 다 돌다 보면 로마 시대에 세워진 원형 경기장, 야외 공연극장이 폐허가 되어 관광객들의 발길을 끌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조그맣게 세워진 많은 성당과 수도원이 쉽지 않게 보인다. 이처럼 아를은 문화, 종교, 역사가 한데 어우러져 프로방스의 중심 도시나 다름이 없었다. 아를에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때 한 아를레지안 집에서 며칠 머문 적이 었었다. 그가 아를에 대해 한 말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아를은 내가 나고 자란 곳입니다. 그러면서 아를의 모든 성격 caractère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나 자신을 존재하게 해 줬어요. 이곳을 떠나는 건 제 정체성을 버리는 거나 다름이 없겠지요." 사람은 도시를 세우고, 도시는 사람의 흔적을 그대로 남긴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은 사라지지만 그 흔적은 도시 곳곳에 켜켜이 쌓여서 또 다른 세대에 오는 사람들을 맞이해 준다. 2천 년의 시간이 묵혀진 아를이지만 아직도 그 도시는 더 많은 시간과 사람을 품을 힘이 남아 있는 듯해 보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프랑스에서 운전하면서 느낀 것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