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레곰 Mar 11. 2024

프랑스에서 농사짓고 김치 담가 먹기

프랑스의 한국 마트는 죄다 파리에 몰려있다. 한국 사람이 웬만큼 사는 지방 도시가 있다면 자그맣게라도 점포를 내주면 좋은데 나날이 파리에만 점포가 집중되어 늘어나고 있는 게 안타까울 지경이다. 내가 살고 있던 엑상프로방스는 프랑스 남쪽 끝 작은 도시다. 한국 마트는 당연히 없고 한국 음식을 구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나마 골목에 있는 중국 마트에 가면 간단한 조미료나 과자 정도는 살 수 있다. (재밌는 건 그 중국 마트는 베트남 사람이 운영한다) 2017년 처음 엑상프로방스에 도착했을 때 중국 마트에서 발견한 양파링과 새우깡을 보고 기뻐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반대로 유리병에 곱게 포장된 김치를 먹다가 뱉었던 안 좋은 추억도 있다. 한류가 유럽 땅을 휩쓸기 직전, 한 한국인이 수출 만을 위하여 만든 제품이 있는데 바로 그게 유리병에 담겨 있던 김치였다. 맵고 짜기는커녕, 배추가 다 물러서 하나도 맛이 없었다.


파리의 대표 한국 마트 K-Mart

그런데 불과 일이 년 뒤 한류가 아시아를 너머 미주 그리고 유럽까지 한바탕 휩쓸었다. 특히 영화 부산행과 오징어게임, K-pop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확 집중되게 해주는 매개체가 되었다. 중국 마트에 입점하는 한국 음식도 변화가 생겼다. 당시 나름 최신 과자라고 불렸던 꼬북칩부터 뻥튀기, 달고나까지 들어왔다. 가장 큰 변화는 바로 김치다. 무려 종갓집 김치와 농협 김치가 남프랑스에 상륙했다. 아주 소량이었지만 매주 다양하게 입고되는 한국 식품이 있다는 게 감동이 밀려왔다. 하루는 내가 자주 가던 중국 식품점 주인이 "혹시 당신이 필요한 한국 물건이 있으면 어제든지 말해주세요. 또 한국에서 자주 먹는 식품이 있으면 요청해 줬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동네에 사는 한국 사람뿐만 아니라 현지인까지도 한국 식품을 찾기 시작하니까 찐 한국 사람의 의견이 절실히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물건이 적고 희귀하면 가격은 올라가는 법이다. 또 마트에 입고되는 때에 잘 맞춰가지 않으면 금방 물건이 다 팔려나가 구경도 하지 못한 적도 많았다. 다행히 나는 생각보다 파리에 갈 일이 많았다. 일 년에 다섯 번 이상 가는 거면 자주 간다고 생각했다. 그때마다 나는 크고 빈 캐리어를 들고 기차에 몸을 실었다. 파리에서 일을 다 본 뒤 마지막 날에 꼭 파리오페라 앞에 있는 한인 마트에 들러서 장을 봤다. 매번 평균 200유로 정도는 구매하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그 많은 물건을 빈 캐리에어 그대로 실어 남쪽까지 내려오곤 했다. 파리에서 주로 샀던 건 각종 김치, 한국산 고춧가루, 들기름, 참기름, 액젓, 만두, 과자 등이다. 아, 파리 한인 마트에는 도시락도 파니까 만원 정도를 주고 김밥 한 줄을 사서 집으로 가는 기차에서 칠성사이다와 함께 먹었다. 


하루는 파리에 다녀오는 것도 지치고 그 많은 물건을 매번 들고 다니는 게 번거로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부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만을 가지고 김치를 담가먹으면 어떨지 고민하고 있었다. 마침 점점 커지는 한류의 영향으로 프랑스 친구들이 김장하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했고 그해부터 매년 나는 김치를 담가먹기 시작했다. 다행히 대형 마트 까르푸에 가면 가을 겨울에 중국 배추 Chou chinois가 나오기 때문에 그걸 사용했다. 프랑스에도 무와 각종 파 그리고 양파, 마늘과 같이 기본 재료는 있었고 소금은 어쩌면 한국보다 질 좋은 지중해 굵은소금을 사용했다. 그 외 고춧가루, 멸치액젓은 중국 마트에서 구매했다. 


첫 김치. 무도 절였다


어릴 때 할머니, 엄마 따라서 김장을 거들던 기억을 더듬었다. 하나둘씩 시행착오를 거쳐 마침내 김치를 완성했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냄새마저 군침 도는 김치가 완성되었다. 배추는 한국배추보다 질기지만 좋은 소금을 사용해서 그런지 훨씬 달고 특유의 짭조름한 맛이 섞여 있었다. 마침 엑상프로방스에 안식년으로 1년 간 살고 계신 이승우 작가님 부부에게 김치를 나눠드릴 수 있었다. 김장은 나누는 것 또한 하나의 문화니까 동네에 살고 있는 가까운 한인에게 나눠주고 싶었다. 며칠 뒤 거리에서 만난 이승우 작가님은 내가 담근 김치가 너무 맛있었다며 그 자리에서 다 먹어치우셨다고 했다. 그리고 진지하게 김치장사를 해볼 생각이 없는지 물어보기도 하셨다. 거리에서 포복절도하며 민망하게 웃음을 지었지만 김장이 잘 된 뿌듯함과 맛있게 먹어준 그분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져서 감사했다. 


조금 더 욕심을 내고 싶었다. 이 땅에서 가장 맛있는 김치를 만들 수 없을까 하고 말이다. 이윽고 파리와 독일에 사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프랑스 마트에서는 도통 구할 수 없는 작물이 있으니 내가 직접 길러보겠다고 내지르며 갖고 있는 씨앗을 보내달라고 했다. 그렇다. 김치에 필요한 몇몇 작물을 직접 농사를 지어 길러보겠다는 다짐을 했다. 사실 씨앗은 한국에서 반출이 불가능하기에 이미 유럽에 세대를 걸쳐 살고 있는 한인들이나 장사를 하며 한국을 오 다니는 분들에게 씨앗을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기숙사 빈 땅 개간 중


내가 살고 있던 기숙사 부지 안에는 노는 땅이 너무 많았다. 남프랑스 특유의 따뜻한 햇살도 있고 석회질이 풍부한 땅도 있으니까 당장이라도 농사를 지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당장 기숙사 사감이 있는 사무실에 찾아가서 농사할 수 있는 아무 땅이나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내 기개에 놀라면서도 널려있는 아무 땅이나 사용하라는 대답을 해주었다. 무엇보다 기숙사 사감은 내가 어떤 농작물을 기를지 관심이 많았는데 마침 유럽에 불어닥친 생태학이 한몫을 했던 게 아닌가 싶다. 


어릴 때 외할아버지 일을 도와 농사를 짓던 기억을 되살려 땅을 개간하고 잡초를 뽑아냈다. 그리고 작물 씨앗을 심을 둑을 만들었다. 첫 농사이기 때문에 바로 씨앗을 심기엔 고민이 많았다. 그래서 땅을 개간하는 동안 씨앗을 물에 불려 싹을 틔웠다. 내가 고른 작물은 꽤나 많았다. 청갓, 적갓, 쪽파, 열무, 총각무, 상추, 오이고추, 깻잎 등 모두 프랑스에서 구하기 힘든 것들이었다. 


싹을 틔우는 중


호기롭게 시작한 나의 첫 농사는 폭상 망했다. 초가을에 일주일 간 휴가를 받고 집을 비웠는데 그 사이에 모든 작물이 사라진 것이다. 도대체 어디로 갔는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모습은, 내가 땅을 막 개간했을 때나 다름이 없었다. 누가 훔쳐간 거지, 내가 휴가 갔다고 다른 사람이 뽑아간 거 아니야? 각종 생각이 들면서 내 마음에 가득 찬 분노를 어떻게든 풀어야 했다. 죄 없는 잡초를 힘껏 뽑아가며 분노와 허탈한 마음을 달래었고 순간 주먹으로 땅을 확 내려쳤을 때 농사가 망한 이유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갈라진 흙 사이로 아직 빛을 내는 뿌리가 드러났고 그 위로 누군가 갉아먹은 흔적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바로 '달팽이'였다. 프랑스 땅에는 너~무 달팽이가 많았다. 우리나라 시골에 있는 작은 달팽이가 아니라 정말로 엄지 손가락보다 큰 달팽이가 해가 지면 어디선가 기어 나왔다. 나는 이놈들을 다 잡아야 성이 풀리겠다고 생각했고 프랑스 웹사이트에서 달팽이를 잡는 방법을 알아냈다. 그날 저녁, 나는 빈 페트병에 맥주를 손가락 세 마디 정도 채워 넣어 땅 속에 비스듬히 세워 놓았다. 얼마나 많은 달팽이가 이 허술한 트랩에 잡힐지 궁금했다. 인터넷이 알려준 달팽이 트랩은 대 성공이었다. 그다음 날 아침, 불과 하루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페트병엔 달팽이 약 40마리 정도가 맥주에 익사해 있었다. 얼마나 징그러운지.... 눈을 질끈 감고 기숙사 사감이 키우는 닭장에 던져버렸다. 


수확한 농작물과 김치


고질적인 문제점을 찾고 난 후, 내 농사는 거침없이 이뤄졌다. 다음번 농사에서 갓과 파를 수확해 기존에 하던 김장에 첨가를 했고 그 맛은 훨씬 시원해지고 달짝지끈해졌다. 그리고 열무와 총각김치를 길러 각종 무침과 여름 김치, 물김치 등을 해 먹었다. 기숙사 냉장고에는 내가 담근 김치가 항상 비치되어 있었고 익어가는 냄새에 이끌려 온 프랑스 친구들이 맛보고 싶다며 아우성이었다. 생각보다 김치 익는 냄새가 그들의 코를 괴롭히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그래서 나는 "내가 김치를 많이 담갔으니 나한테 물어보지 말고 언제든 꺼내 먹으라"라고 공표하기도 했다. 김치의 톡 쏘는 맛과 매운맛 때문에 다시는 먹지 않겠다는 프랑스 친구가 있었는가 하면 김치에 빠져 나만 보면 김치 노래를 하던 프랑스 친구들도 있었다. 지금도 그 프랑스 친구들과 대화를 할 때면 "나 네가 아니라 김치 먹으러 한국 갈 거야"라고 시답지 않은 농담을 하기도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반고흐와 함께 커피 한 잔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