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마르세유 대학교 어학당에서 프랑스어를 열심히 배우고 있을 때였다. 다행히 나는 중급반에 들어가 겨우 귀와 입이 열렸고 조금씩 내 생각도 자유롭게 표현하고 있었다. 하루는 프랑스 문화 아뜰리에를 담당하던 선생님이 우리에게 "프로방스 문화가 무엇이 있는지 조사해서 다음 시간에 발표하자"는 숙제를 내줬다.
"프랑스가 아니고 프로방스? 뭐지? 엑상프로방스?"
프로방스 Provence라는 말을 자주 들었지만 내가 머물고 있는 도시의 이름으로 알고 있을 뿐이지, 또 다른 표현이 있을 줄은 잘 모르고 있었다. 선생님은 나의 의문을 꽤 차는 듯 숙제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프랑스는 땅덩이가 꽤나 넓은데(우리나라의 다섯 배) 국경을 모두 닫고 백 년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정도로 기후 환경이 다르고 풍요롭기까지 하다고 했다. 그만큼 각 지역은 다른 문화를 간직하며 발전되어 왔고 그 자체로써 자긍심이 매우 높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남프랑스를 일컫는 프로방스 지역도 자체 언어인 프로방살 Provençal 이 있는데 사투리가 아닌 완전히 다른 언어로서 현지인들에게 사용되고 있는 것도 재미있는 예시였다.
내가 발표한 프로방스의 문화는 바람과 매미였다. 정확하게 문화라기보다는 전통적 상징이라고나 할까. 얼핏 보면 어떠한 연관성도 없을 것 같지만 꽤나 상징적으로 연결고리가 있다. 지중해에 인접한 프로방스는 봄이 되면 뜨거운 여름 날씨가 시작된다. 동시에 북쪽에서는 미스트랄 Mistral이라는 매서운 바람이 몰려오는데 북대서양에서 시작되어 프랑스 내륙으로 들어온 외지 바람이다. 그런데 이 미스트랄 바람이 지나가는 경로가 흥미롭다. 누군가 길을 일부러 만들어 놓은 것처럼 프랑스 내륙에 퍼져있는 산맥의 골짜기가 남쪽으로 안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스트랄은 좁디좁은 산골짜기들을 거치면서 더 큰 힘을 키우게 되고 마지막엔 프로방스 지역을 거쳐 지중해로 빠져나간다. 얼마나 힘이 강력한지 미스트랄이 세게 불 때는 고속도로 위를 달리던 자동차가 뒤집어질 정도다.
위에서 미스트랄이 불어온다면 남쪽부터는 이 바람이 불어온다는 소식을 알리는 곤충이 있다. 바로 매미다. 매미? 여름마다 우리네 밤을 시끄럽게 한다는 그 곤충? 맞다. 우리에게 해충이나 다름이 없는 그 매미다. 프로방스 사람들에게 매미는 바람을 일으키는 존재로 생각한다. 셀 수 없이 많은 매미가 날갯짓을 할 때마다 미스트랄 바람이 휙- 하고 오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더운 여름 매미가 날갯짓을 해줌으로써 우리에게 시원한 바람을 일으켜주는 고마운 존재라고 여기기도 한다. 정말로 가능한 일인지 과학적으로 밝혀진 바는 없다. 아마 아주 오래전부터 프로방스 지방에 살던 사람들의 속언일 것이다. 그렇지만 프로방스 사람들은 바람과 매미를 자기네 상징으로 여기고 있다.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기념품 샵에는 아예 바람을 일으키는 매미를 크고 작은 석고 인형으로 만들어서 팔고 있으니 말이다.
프로방스는 음식으로 아주 유명한 지방이기도 하다. 끝내주는 햇살과 풍부한 영양이 담긴 석회질 토양은 프랑스 북부에서 자라지 못하는 여러 작물을 자라게 해주고 있다. 대표적으로 올리브, 아티초크, 토마토, 가지, 마늘, 각종 콩과 샐러드 등이 있다. 북쪽에서는 왜 안 자라냐고 궁금할 수도 있는데, 파리만 보더라도 해가 잘 뜨지 않고 날씨가 금세 추워져 작물이 잘 자라지 못한다. 그래서 프로방스를 상징하는 음식은 채소를 중심으로 알록달록하다.
내가 자주 먹었던 음식은 '라따뚜이 Ratatouille'다. 쥐가 이 음식을 요리하는 만화로도 우리에게 꽤 익숙한 이름이기도 하다. 라따뚜이는 프로방스 중에서도 내가 살던 엑상프로방스의 전통 음식이다. 요리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올리브기름을 이용해서 각종 야채를 볶고 마지막에는 토마토로 스튜처럼 끓이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이 하나 있다. 바로 모든 야채는 프로방스 땅에서 나고 자란 걸로 요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올리브기름조차도 남프랑스 지중해 연안에서 짠 게 아니라면 진정한 라따뚜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고기도 안 들어가 있고 오직 야채로만 요리된 음식이지만 꽤 강렬한 맛을 준다. 달콤하고 시큼하면서 고소한 맛이 한데 어우러진다. 그런데 라따뚜이 영화 때문에 고오급 음식으로 둔갑해 버렸다. 사실 거기서 나오는 라따뚜이는 고급 레스토랑에 오는 손님들을 위한 레시피로 복잡하기 짝이 없다. 보통 가정집에서는 야채를 자르고, 볶고, 끓인다. 밖에서 놀다 온 아이들이 바로 한입 먹고 낮잠 잘 수 있도록 간단히 만들어야 하는 게 핵심이다. 그래서 학교 구내식당에서도, 가정집에서도, 식당에서도 가볍고 대중적으로 먹을 수 있었다. 거짓말 안 하고 천 번은 먹어봤을 거다. 많이 먹다 보니 내가 제일 잘하는 음식도 라따뚜이가 되어버렸다.
한국의 방학 시즌이 되면 남프랑스에 놀러 오는 친구들이 좀 있었다. 이왕 한국을 떠나 파리가 아닌 남프랑스에 왔으니 기억에 남을만한 음식을 먹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때마다 친구들을 데리고 엑상프로방스를 떠나 마르세유로 향했다. 마르세유는 집에서 버스 타고 40분만 나가면 있는 프로방스 지역의 제일 큰 도시다. 지중해가 바로 코 앞에 인접해 있어서 어딜 가나 생선 비린내가 코를 찌른다. 이곳의 프로방스 전통 음식은 '부야베스 Bouillabaisse'라는 해물탕이다. 원래 어부들이 팔다 남은 생선과 조개들을 한데 모아 끓여 먹던 하찮은 음식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마르세유뿐만 아니라 프로방스, 더 나아가 지중해를 상징하는 음식이 되어버렸다. 조리 방법은 역시나 간단하다. 한꺼번에 다 넣고 끓이면 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역시나 프로방스에서 나고 자란 향신료(특히 샤프란)와 생선으로 요리해야 한다. 생선이 몇 마리 들어가냐에 따라서 가격도 달라진다. 기본 4~5마리가 들어간 부야베스의 가격은 최소 80유로(10만 원)에서 시작한다. 내가 먹어본 가장 비싼 부야베스는 230유로(30만 원) 짜리였다. 그래서 나도 자주 먹지는 못하고 이곳을 방문하는 친구와 손님을 데리고 왔을 때만 먹을 수 있었다. 친한 프랑스 친구는 부야베스를 맛있게 먹으면서도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서민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나눠먹던 음식이 사람들의 돈주머니만 채우고 있으니 참 안타깝네".
그 밖에도 소고기 스튜인 도브 Daube, 빵에 발라먹는 올리브잼 타프나드 tapenade, 각종 콩과 야채를 끓여 피스토 소스를 얹혀 먹는 숩 오 피스토 Soupe au pistou, 프로방스 대표 와인 로제 와인 등 여러 음식이 있다. 프로방스 문화와 음식은 푸른 하늘과 바다, 강렬한 햇살로 온 땅을 다채롭게 만드는 자연환경을 쏙 닮아 있다. 그 지방에 살면서 문화와 음식을 온전히 받아들이면 닮아간다고 하던가. 어쩌면 나도 남들처럼 똑같이 살고 하나만 바라보고 달려가던 인생을, 다채로운 시각과 목적으로 바꿀 수 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