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에세이
섣부르게도 걷다가 이 에세이의 출간 형식을 먼저 생각했다.
지금은 글 제목에 연도와 월, 일을 함께 병기하고 있다.
(딱히 의미가 있어서라기보다 매일 쓰기 위함이다.)
그러나 월, 일까지는 몰라도 연도라는 것은 너무도 크게 글의 영속성을 박탈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역사적 시점이 아닌, 일개 개인의 하루를 지칭한다는 점에서.)
게다, 내 첫 에세이 <이건, 제목이 없는 게 제목이라서>의 에필로그에 나는
어떠한 장르의 글이든 영속성을 제일의 목표로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었다.
오늘날처럼 개인의 욕망을 분수령 삼아 책이 쏟아지는 시대에 그것이 불가능한 일인 줄 알면서도 말이다.
결론_ 월(月)을 제외한 연도와 일자는 최대한 생략할 것이다.
-
산책로를 벗어나 다시 아파트 단지로 돌아오는 길이면
이제 그만 바삐 집으로 향하고 싶은 주인과 조금 더 흙과 풀의 내음을 향유하고 싶은 개의
동상이몽을 자주 목격한다.
그곳이 인간의 목적이 시작되고, 마무리되는 지점이기에 그렇다.
오늘은 그곳에 전체적으로 옅은 베이지색을 띤 진돗개 한 마리가 마치 그보다 아주 살짝 더 진한, 반의반 정도만 톤이 업그레이드된 베이지색 양말 두 짝을
뒷다리에 곱게 신은 듯한 우아한 모습으로 상체를 수그려 풀내음을 맡고 있었다.
고개를 땅에 묻고 몇 초간 흔들리지 않는 모습과 살짝 위쪽을 응시하는 낮은 음조의 눈망울이 어찌나 순박한지
'개는 무엇을 탐미하고 있나' 싶은 질문을 던지게 만들었다.
개를 주인공으로 한 동화 한 편을 정리해야 하는데 개에 대해 너무 무지하다.
그런데, 지금 읽고 있는 소설은 개와는 전혀 관련 없는 내용이지만,
글의 사설 중 "개에게 정말 영혼이 있다고 믿는다면, 개를 기를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장이 나온다.
질문을 듣고 살짝 숨이 막혔다.
차마 기를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만약 정말 개에게 영혼이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이 정말 그러하다면,
그 자신이 그의 영혼대로 살도록 둘 것이다.
인간이 부모에게 길러지는 것도 다 한때이듯이.
정해진 누군가에게 죽을 때까지 길러질 수 없듯이.
그러나 문장 하나를 따로 떼어 옳고 그름을 논하자는 것이 절대 아니고, 다만 그 이야기의 변증법적 맥락에서 그 문장과 질문이 필요했을 뿐일 테다.
종종 난해하다고 평가받지만, 그래서 내 영혼과 늘 맞닿는 그 작가가 쓴 이번의 책이 내게 준 것이라면,
'유능함이 자신을 증명하는 종류의 능력이라면 불능은 세계를 증명하는 능력이다'라는 제언이다.
불능이 곧 세계를 증명하는 능력이라면, 세계는 무능하다는 것이다.
신에게는 악의는 없지만, 신은 공평하지도 않다.
신은 유능할지 몰라도, 이 세계는 유능하지 않다.
신은 자신을 증명하는 종류의 능력은 지녔을지 몰라도, 세계를 유능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참 고마운 문장이었다.
덕분에 지금 나의 불능을 그 어느 때보다도 따뜻하게 감쌀 수 있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