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숙 작가 장편소설 <아버지에게 갔었어>
"부모님의 청춘을 먹고 자란 우리는
부모님의 황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신경숙 작가의 장편소설 <아버지에게 갔었어>는 인간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는 상실을 통해 비로소 아버지라는 한 사람을 이해하게 되는 과정을 그려낸 이야기입니다. 오랜 기간 써 온 이번 작품을 통해 가족의 나이 듦을 처음 바라보게 된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담백하게 펼쳐놓습니다.
이 책에서 우리는 모두 언젠가, 혹은 조만간 부모의 보호자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부모의 나이 듦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부모를 개별적인 한 사람으로 처음 바라보게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마다의 삶이 다르듯이, 아버지와의 관계 또한 같을 리 없지만, 소설 속 가족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각자의 아버지, 그리고 가족에 대한 생각과 마음이 깊어지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책을 읽으면서 나의 근원인 아버지는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어떻게 늙어가는지를 되짚어 보며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에 대해 이해하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는 오래전 취재했던 한 할머니가 떠올랐습니다.
스무 살에 시집와 60년 동안 한 마을에서 뿌리내리며 살아온 순희 할머니는 취재 당시 1,500만 원이라는 거액의 손해배상 소송이 걸려있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를 고소한 사람은 놀랍게도, 경찰이었습니다.
지난봄, 길에서 돈다발 하나를 주운 일이 사건의 시작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주인을 찾아주라며 바로 옆 파출소에 돈을 맡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파출소에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경찰이 선행한 할머니를 고소한 건데요. 취재차 찾아가게 된 파출소, 그 곳에서는 또 다른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경찰이 할머니에게 돈을 받은 적이 없다는 건데요.
경찰 관계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느 날, 순희 할머니가 다짜고짜 파출소를 찾아와 자신이 주워다 준 돈 100만 원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밝히라고 했답니다. 경찰이 그런 사실이 없다고 하자, 이번엔 딸이 나서서 여러 기관에 민원을 넣는 바람에 큰 곤혹을 치러야 했답니다. 한두 번 그런 게 아니랍니다.
그저 좋은 마음으로, 길에서 주운 돈다발을 경찰에 맡겼는데 돌아온 건 치매환자라는 막말뿐이었다는 순희 할머니. 반면 경찰은 할머니가 돈을 맡긴 적이 없는데도, 경찰이 거짓말을 한다며 모함하는 바람에 명예가 실추됐다고 말합니다.
100만 원 때문에 시골마을에서 벌어진 이 소동은, 급기야 1,500만 원 손해배상 소송으로까지 번졌는데요. 눈이 나쁜 할머니를 대신해 당시의 CCTV를 확인해 준 스님 역시 돈을 갖다 준 모습은 찍혀 있지 않았다고 진술하면서 할머니는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평생 장사를 하며 5남매를 키워 온 순희 할머니는 자식들 앞길에 행여나 해가 될까 봐 행동 하나하나 조심하며 살아왔기에 지금의 상황이 너무 억울하다고 말했습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그런데 취재 도중, 순희 할머니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웃들은 팔순이 가까운 나이에도 총기를 잃지 않던 할머니가 요즘 들어 달라졌다고 입을 모아 말했습니다.
"봄부터 그랬나? 어제 읍내 갔다 왔는데 오늘 저녁에 모여서 갔다 왔다 그러면 ‘내가 언제 갔다 와?’ 이래요."
경찰도 이번 일이 있기 전, 할머니가 파출소를 찾아온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할머니가 은행 직원이 할머니가 예금해 둔 200만 원을 빼돌렸다며 경찰에 조사를 요구한 건데요.
처음 듣는 이야기에 놀란 딸이 할머니와 함께 은행에 찾아가 확인해보니, 할머니가 200만 원짜리 적금을 해약하면서 다른 통장에 옮겨둔 걸 깜빡하고 오해를 한 거였습니다. 오해가 풀려 다행이지만 딸은 예전 같지 않은 엄마가 안쓰럽고 걱정되기 시작했습니다.
5남매를 키우느라, 평생 안 해 본 장사가 없을 정도로 억척스러웠던 엄마. 글을 몰라도 늘 정확하고 빈틈없는 분이었습니다. 자신이 모르는 새, 엄마에게 변화가 온 것은 아닐지.. 걱정하는 따님을 위해 할머니의 건강상태를 확인해봤습니다.
고장 난 형광등처럼 자꾸만 깜빡깜빡한다는 순희 할머니의 기억력 검사도 받아봤습니다. 검사 결과, 할머니는 치매가 진행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왔습니다. 할머니의 심리 검사도 받아봤는데요.
"할머니는 평생 살아오시면서 못 배운 것에 대한 한이 있으시고, 그것 때문에 항상 사람들이 나를 함부로 보거나 나의 것들을 뺏어가지 않을까 피해의식이 많으신 상태입니다."
엄마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신했습니다. 하지만 떨어져 사는 동안 정작 엄마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는 사실을, 딸은 이제야 깨달았다고 저에게 털어놨습니다. 이윽고 딸은 자신과 함께 도시로 나가 살자고 하지만, 순희 할머니는 자식만 잘 살면 그만이라며, 고향에 남아있겠다고 하셨습니다.
이후 경찰서를 찾은 딸은 그간의 상황을 설명했고, 한 발 씩 물러나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기로 했습니다.
순희 할머니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자식들 키우느라 허리가 휘도록 일해 온 억척스러운 세월을 뒤로하고, 흐릿해진 기억 속에서도 온 마음을 다해 자식 잘 되기만을 바라는 그런 노모의 적적한 일상 말입니다.
부모의 청춘을 먹고 자란 자식들이지만, 부모의 황혼은 잘 알지 못합니다. 순희 할머니의 이야기는 어쩌면 고향에 계신 우리 부모님의 이야기가 아닐까요?
가정의 달 5월입니다. 쑥스러워서 혹은 기회가 없어서 감사의 표현을 못하는 순간이 훨씬 많은데 이번 기회에 가족들에게 애정 어린 표현을 하면 어떨까요?
신경숙 작가의 소설 <아버지에게 갔었어>를 통해 가족의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는 한 달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