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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율 Mar 06. 2021

단순함이 전하는 진실

#02. 마크 로스코

      

어떻게 사람들의 반응을 얻을 수 있을까?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독자들의 반응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요즘 같이 생산자와 소비자의 구분 없이 콘텐츠를 만들어가는 시대에는 양방향의 소통과 참여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채널에서 소통과 참여를 일으킨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콘텐츠만 올리면 됐다는 식으로 가만히 발 뻗고 기다리는 건 답이 없다. 그렇다고 억지로 참여와 소통을 구걸하는 건 더 답이 없다.   


현재 회사에서 매주 1회씩 제공하는 뉴스레터 서비스를 맡아 진행하고 있다. 이와 연계해 인스타 채널을 함께 관리하고 있는데, 요즘 최고의 관심사는 구독자와의 돈독한 관계 형성이다. 여러 채널을 통해 조금씩 구독자들이 모이는 가운데, 그들과 좀 더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만들면서 뭔가 일방향적인 전달이라는 느낌을 종종 받을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들 다 한다는 인스타 이벤트를 준비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이벤트를 준비하면서 가장 고민했던 부분은 '반응'이었다. 채널 개설 후 처음 진행해 보는 일이다 보니, 과연 우리 이벤트에 독자들의 반응이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두 번째는 '진심'이었다. 다른 곳에서 진행한 인스타 이벤트 사례들을 살펴보는데, 뭐랄까... 진심이 안 느껴지는 곳들이 많았다. 그런 곳은 주로 마구잡이식으로 모객하는 느낌이 강했고, 또 그런 이벤트의 참여자들은 경품을 노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벤트 후에 언팔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하는데, 그럴 거면 진행한 의미가 있나 싶었다. 이벤트이지만, 그 안에 무언가 '진심'을 주고받는 것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 이벤트의 목표는 원래 우리의 콘텐츠에 관심을 가졌거나, 관심을 가질만한 사람들의 찐반응을 얻어내는 것으로 은연중에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고 나니, 다음의 문제가 선명해졌다.


'사람들의 찐반응이라는 건 어떻게 이끌어낼 수 있을까?'





그림 앞에서 눈물 흘리는 사람들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의 그림은 머리를 넘어 가슴을 움직이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많은 관객들이 그의 작품을 보고 눈물을 흘려본 적 있다고 답변했다고 한다. 그중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지금은 고인이 된 스티브 잡스도 포함돼 있을지 모른다. 소문에 의하면, 잡스는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마크 로스코의 그림에 푹 빠져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그림을 보고 눈물을 흘릴 정도면, 그냥 감동을 넘어 진한 감동을 얻은 것일 테다. 로스코는 사람들이 자신의 그림 앞에서 우는 것에 대해, 자신이 그릴 때 느낀 것과 똑같은 종교적 경험을 한 것이라고 말한다. 과연 그 경험은 무엇이기에 로스코를 포함한 다수의 관객에게 진한 감동을 전하는 것일까?


(좌) 마크 로스코 <Orange and Yellow>, 1956 / (우) 마크 로스코 <Untitled>, 1969


사람들은 로스코의 그림을 색면 회화(Color-Field Painting)라고 불렀다. 색면 회화는 2-3개의 색채로 캔버스 전체를 뒤덮는 것으로, 형태를 극도로 단순화시키는 반면, 캔버스를 거대하게 확대함으로써 색채에 압도감을 느끼게 한다. 로스코의 그림은 매우 단순하다. 어떤 인물이나 풍경이 있는 것도, 사건이나 스토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 앞에 보이는 것은 오직 경계가 불분명한 색 덩어리, 그것 외에는 아무런 정보가 없다.  


로스코는 작품 설명에 있어서도 침묵을 지켰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자잘한 설명이나 비평을 원치 않았으니, 오직 감상자가 작품 앞에 집중할 수 있기를 바랐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에는 무제(Untitled)가 많다. 작품명이 감상에 제한을 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생전에 그가 작품에 대해 부연 설명한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캔버스에서 18인치(약 45cm)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감상하기를 권장한 것이 전부였다. 감상자가 그림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그들이 그림 안에 있기를 원했다.   


로스코의 이 단순한 그림 앞에서 사람들은 왜 눈물을 흘리는 것일까? 왜 그의 그림에 깊이 매료되었으며,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토해내야만 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로스코가 말하는 '단순함'에 집중해 봐야 한다. 그는 왜 그토록 '단순함'을 추구했으며, 그가 추구한 '단순함'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성취할 수 있었는가?





단순함은 본질만을 남기는 것


마크 로스코가 추구한 단순함은 복잡함을 거친 단순함이다. 보다 정확하게는 그의 말처럼 '복잡한 사고의 단순한 표현'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만일 단순함을 '하나'로 표현한다면, 그의 단순함은 무(無)에서 하나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다(多)에서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를 덜어내는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단순함의 결과를 얻기까지의 과정은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복잡한 사고의 단순한 표현을 위해, 로스코는 크게 두 가지 일에 집중한다. 하나는 목표가 되는 것의 본질에 가까이 다가가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목표의 본질을 흐리는 나머지 것들을 모두 제거하는 일이었다. 로스코는 작품의 목표를 '감정에의 집중'으로 두었다. 그는 작품 안에서 관객들이 자신 스스로의 감정에 최고로 집중할 수 있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감정의 본질, 곧 인간의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감정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한다. 그것을 탐구하기에 가장 적합한 방법은 '신화'였다. 신화는 비극, 환희, 운명 등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과 욕망의 원형을 담고 있는 그릇이었기 때문이다.


(왼쪽부터) 마크 로스코, <Portrait>, 1939 / 마크 로스코, <Mutliform>, 1948 / 마크 로스코, <No. 46>, 1957.



로스코는 감정의 원형을 지속적으로 탐구하며, 자신만의 작품 스타일을 발전시켜 나갔다. 말년에는 캔버스에서 인물, 풍경, 스토리를 모두 제거하기에 이른다. 그리고는 오직 경계가 모호한 색 덩어리로만 그림을 채우기 시작한다. 사물의 형태를 보여주는 방식은 감정의 본질을 드러내는 데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신, 색채에 담긴 상징성을 통해 감정의 원형을 드러내고자 했다. 각각의 색채는 감정의 원형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예를 들어, 검정은 밤과 어둠, 죽음, 두려움, 고독과 같은 감정과 심상을 유발한다면, 빨강은 낮과 빛, 에너지, 생명, 활기, 소란스러움 등을 이끌어 낼 수 있다. 로스코에게 색은 인간의 무의식에 존재하는 심상 곧 원형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자, 작가의 심리를 대변해 줄 수 있는 매체였다.


그것은 감상자로 하여금 그림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 곧 울거나 웃거나 숭고함을 느끼게 하는 체험을 가능하게 했다. 로스코는 회화의 기본 구성이라 여겨지던 배경, 인물, 사건을 캔버스 안에서 모두 지워버림으로써, 자기 작품의 본질이라 여겼던 감정을 그 어떤 그림에서보다 살아 숨 쉬게 만들었다.





단순함, 진실을 드러내는 힘


로스코가 그림을 그리는 목표는 관객과의 '교감'에 있었다. 곧, 자신의 작품이 혼자만의 독백이 아니라, 감상자와 상호작용하는 소통의 장이 되길 원했다. 그런데 진정한 교감과 소통이 가능하려면, 자신의 그림이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감상자가 비집고 들어올 수 있는 '틈'. 그 틈이 있어야 감상자가 자신의 마음을 열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씩 들려줄 수가 있다. 로스코의 작품을 보면서 눈물을 흘려본 감상자가 특히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은 로스코의 그림 앞에서 자신의 감정, 혹은 자신도 몰랐던 감정들을 쏟아내는 체험을 하게 된다. 그림을 보고 있지만, 실은 자기 자신과 마주한 것이다.    


결국 로스코의 단순함은 진실을 드러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 로스코는 진실이 말로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몸소 느끼는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리하여 작품에서 자신의 말은 비우고, 관객의 경험으로 채움으로써 진실이 드러나도록 했다. 그런 점에서 봤을 때, 로스코에게 단순함이란 비움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채움'을 지향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대체로 내 것에서 무언가를 채울 때보다 덜어낼 때 더 큰 불안감을 느낀다. 기획에 있어서도 애정이 크면 클수록, 이것저것 더 많이 넣으려는 욕심을 부리게 된다. 하지만 그러다 보면 의도치 않게 기획의 본질이 흐려지고 난잡해진다. 난잡한 기획 앞에 소비자들의 공감을 이끈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아니, 애초에 소비자가 마음을 둘 공간은 마땅치 않을 것이다.


지금 나의 기획안이 한 두 줄로 정리가 안 된다면, 다시 본질로 돌아가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내가 진행하는 기획의 진짜 의도는 무엇이며, 이루고자 하는 목적은 무엇인지를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은 고된 작업이며, 한 번으로는 결코 원하는 답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거듭된 질문을 통해 그 답을 얻어낼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는 과감하게 덜어낼 수만 있다면, 그 틈 사이로 분명 소비자들은 찐반응을 보내올 것이다.




우리는 복잡한 생각을 단순하게 표현해야 한다.
평면은 환상을 없애고 진실을 드러낸다.

- Mark Rothk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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